얼마 전에 국회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다. 국회의원들이 대거 얼굴을 보이면서 그런대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 세미나의 목적은 이명박 정부에 의해 폐기되다시피 한 '지속 가능 발전의 원칙'을 되살림으로써 한국을 진정 지속 가능한 사회로 만드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지속 가능 발전의 원칙은 범지구적 환경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1992년 지구정상회담에서 채택된 범지구적 원칙이다. 지속 가능 발전의 원칙은 유엔이 주최한 이 모임에서 채택된 이래 자유무역의 이념과 함께 지구촌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세계적 추세에 부응하여 한국도 지속 가능 발전의 원칙을 환경 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지난 2000년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설치했다. 2006년에는 정부가 지속 가능 발전을 위한 국가 비전을 선포했으며, 2007년에는 지속가능발전기본법을 제정했다. 기본법은 시민 사회, 정부, 업계가 모두 지지하는 가운데 제출된 지 28일 만에 국회를 통과하는 진기록을 남기며 2007년 8월 공표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속 가능 발전의 원칙을 격하시키고 대신 "녹색성장"이란 개념을 내세웠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 직속으로 녹색성장위원회를 설치했고, 많은 논란 끝에 녹색성장기본법을 제정했다. 종전 대통령 직속이었던 지속가능발전위원회가 환경부의 한 위원회로 격하됐고, 지속가능발전기본법은 사실상 사문화됐다. 이명박 정부가 강행한 녹색성장의 개념이 종전의 지속 가능 발전의 개념을 대체할 만큼 포괄적이고 강력한 개념인가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많은 전문가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이미 있는 것을 잘 살리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었음에도, 이명박 정부는 결과적으로 옥상옥 식의 덧칠을 함으로써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혼란과 낭비를 초래했다.
더욱이 녹색성장의 명분 아래 이명박 정부가 강행했던 4대강 사업이 사실 대규모 환경 파괴 사업이었다는 논란이 일면서, 녹색성장 정책은 결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어떻든, 국가 정책 추진에 있어 기본 강령이 되는 지속 가능 발전의 개념과 녹색성장의 개념을 둘러싼 혼란, 그리고 이 두 개념과 연결된 법과 제도의 난립을 일관성 있게 정리할 필요성이 절실해졌고, 이것이 이번 국회의 지속 가능 발전 세미나를 낳게 한 원인이 되었다. 과연 박근혜 정부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지 두고 볼 일이다.
1992년 지구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지속 가능 발전의 원칙은 경제, 사회, 환경, 이 모든 부문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담는 개념이다. 지금 우리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가 위태롭고, 우리 사회도 불안하며, 우리 환경도 점점 더 악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지속 가능성'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존에 절실한 명제로 다가오고 있다. 녹색성장도 결국은 지속 가능 발전을 위한 것이다. 녹색성장이 설령 우리의 경제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고 해도 우리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하지 못 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이런 점에서 보면 녹색성장의 개념은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의 하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지속 가능성이 상위의 개념이라고 하면, 현재 우리 사회는 과연 지속 가능한 사회인가부터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우리 사회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면, 과연 어떤 요인이 우리 사회를 그렇게 만들고 있을까?
역사책에는 극도의 빈부 격차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얘기로 가득하다. 미국도 두 번의 큰 위기를 겪었다. 1930년대 대공황과 2008년 경제 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묘하게도 이 두 번의 위기 직전, 빈부격차가 극에 달했다. 미국에서 부유한 상위 1퍼센트가 미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몫이 대공황 직전(1929년)엔 23.1퍼센트로 치솟았고 이번 경제 위기 직전(2007년)에도 23.5퍼센트로 치솟았다. 바로 이 상위 1퍼센트가 나머지 99퍼센트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안기면서 "월가를 점령하라"란 구호 아래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가게 만들었다.
최근 <불평등의 대가>라는 책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스티글리츠 교수는 이 책에서 미국이 "1퍼센트를 위한, 1퍼센트에 의한, 1퍼센트의 국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극심한 불평등이 계속된다면, 미국은 망하게 된다고 그는 경고한다. 요컨대, 극심한 불평등은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사실,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을 처음 제창한 학자들은 빈부 격차가 환경 오염과 환경 파괴의 주된 원인이며 또한 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적 노력을 방해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 발전의 개념과 녹색성장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국의 빈부 격차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한국의 부자 상위 1퍼센트가 GDP에서 차지하는 몫이 1998년에는 6.97퍼센트였으나 2011년에는 11.5퍼센트로 늘어났다. 한국도 "1퍼센트를 위한, 1퍼센트에 의한, 1퍼센트의 국가"가 되지 않도록 지속 가능한 발전 원칙을 확고하게 추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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