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첫 번의 음력 설"
해방 후에 처음 맞는 구정, 이 날은 시내에 있는 각 관서, 회사, 학교, 신문사도 전부 쉰다. 조선 사람은 과거 이 구정을 맞이하려고 애를 썼으나 일본 제정은 구정 폐지를 강요해서 한 번도 우리 '설'이라고 즐겨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없는 쌀을 절약해서 적으나마 떡도 하고 밥도 해서 조선 해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선조의 제상 위에 받쳐 놓은 각 가정의 구정의 아침은 퍽 명랑하다. (<동아일보> 1946년 2월 2일자)
1946년 설날의 기사였다. 그런데 1947년 설날인 1월 22일 <동아일보> 지면에서 설과 관계된 기사는 "구정 맞는 재민(災民)에게 따뜻한 원호의 선물" 하나뿐이었다. 이보다 며칠 앞서 1월 19일자 <경향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있었다.
1월 22일 즉 음력 정월 초하룻날도 관청에서 쉬느냐고 각 방면으로부터 문의가 들어오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인사행정청장 정일형은 2중 과세 폐지의 취지로 보아 쉬지 않고 평시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1946년 1월 23일자 <자유신문>의 아래 기사를 보면 1946년의 설날은 군정청에서도 공휴일로 지정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설에 민간의 철시에도 불구하고 근무를 강행한 것은 "2중 과세 폐지"의 의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이 의지가 누구의 것이었을까?
"상점 모두 철시-옛날로 돌아간 구정 풍경"
모든 일이 "잘 돼야지" 하는 도야지 해의 양력 정초를 지낸 지 20여 일 만에 어제는 음력으로 또다시 '설날'을 맞이하였다. 생활의 간결을 부르짖고 독립 못 된 살림살이의 규모를 줄이자고 하면서 두 번씩 과세를 한다는 모순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 또한 우리 현실이라고 할까?
왜정 40여 년에 쪼들리고 눌리고 기를 펴지 못하는 바람에 과연 설날을 설게(서럽게) 지낸 것이 쓰라린 과거였다. 이제 기운을 펴고 '쏘니' 대신에 두둑한 떡국을 먹고 '도소주' 대신에 귀밝이술을 한 잔 마시는 것도 우리 세상으로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리는 완전히 철시를 했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세배를 다니는 깨끼저고리 귀여운 애기들의 얼굴이 빛나고 삼단같이 늘여 땋은 머리 대신에 기계화한 웨이브가 찬바람에 휘날리는 아가씨들의 발걸음도 제법 활기가 있어 예전대로 구정을 맞이한 느낌이 있다.
악성 인플레로 그 가치조차 의심나는 백 원짜리 두 장 반을 내어야 고기 한 근을 사는 이 판에 모리배는 살이 쪘으니 부유한 계급의 설 잔치가 풍성하다 하겠지만 아직도 움막 하나를 갖지 못한 전재동포에게는 너무도 쓰라린 정초이다. 하여간 인플레이션 덕분에 수박 겉핥기로 겉만 휘번지르르하게 정초를 두 번씩 지내나 속으로 골탕을 먹는 미-소 양군 점령 하의 우리의 정치와 경제생활을 생각할 때 그리 대단한 흥겨운 정초도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작년 정월에는 신탁문제 바람에 경향 각처가 설떨해서 이 날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또 작년에는 군정청에서도 이 날을 공휴일로 했었으나 금년에는 일을 하라 했고 모든 저자가 문을 닫았건만 은행만은 손님이 드문 채 가게를 내었고 드문드문 지나는 전차 때문에 시민의 발만 피곤해지니 역시 모순으로 뒤범벅이 된 정초가 아니었는가.
1946년의 설날은(2월 2일) 마침 토요일이었다. 한 달 전 중경임정 세력 중심의 '국자(國字)' 사태를 겪은 미군정 당국자들이 어차피 반공일(半空日)인 설날을 공휴일로 한 것은 조선인의 반감을 가급적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1947년의 설날은(1월 22일) 수요일이었고, 군정청의 '조선인화(Koreanization)'가 거의 마무리된 시점이었다. 사령관과 군정장관 이외의 부서장은 명목상으로라도 모두 조선인이 맡고 있었다. 이 날을 공휴일로 하지 않은 데는 조선 풍속을 중시하지 않는 미국인들이 "웬만하면 그냥 일합시다." 한 태도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조선인 관리들의 '이중과세 폐지'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설은 추석과 함께 조선 최대의 명절이다. 일본의 조선 지배에서 양력과세 강요는 문화적 침략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메이지 초기에(1872년) 태양력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일본은 양력과세를 근대화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양력설을 "국민의 축일"이란 이름으로 3일간의 공휴일로 지정, 국가주의의 문화적 초점으로 만들었다.
1895년 조선의 태양력 채택은 청일전쟁의 결과에 따라 중국 제도에서 일본 제도로 넘어간 것이다. 자발적 선택이 아니기 때문에 태양력 사용에는 '일본 냄새'가 묻어 있었다. 설날 차례를 지내려면 제 시간에 출근할 수 없으니 식민지체제의 제도권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양력과세의 압력이 지속적으로 작용했고, '일본 냄새'에 반감을 느끼는 제도권 밖의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일본이 군국주의화한 1930년대에는 제도권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음력과세를 금지하는 문화적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 구호가 '이중과세 폐지'였다. 해방 후 첫 설인 1946년에는 사라졌던 이 구호를 이듬해 되살려낸 것이 누구였을까?
군정청의 '조선인화'를 통해 행정 전면에 나선 '조선인'은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김상태의 서울대 박사 학위 논문 "근현대 평안도 출신 사회 지도층 연구"의 제4장 제2절 "평안도 출신 사회 지도층의 분단 지향"(105~130쪽)에 따르면 군정청의 중상위층 관리 중에는 식민지 시대 관리 출신이 압도적이었고 20여 명의 최고위층 관리는 대부분 관계 외부에서 충원되었다. 이 최고위층 관리군의 성향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김상태는 기독교인, 미국 유학, 연희전문, 흥사단, YMCA 등을 꼽았다.
이 키워드들이 '민족주의'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여기 해당되는 이들 중에 민족주의자로 자타가 공인한 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 키워드들이 '전통'과는 충돌을 일으킨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키워드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민족주의자 중 특정한 부류에 속했던 것이다.
조관자의 논문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를 다시 펼쳐놓고 생각해 본다. 일본의 급속한 패망이 없었더라면 해방 후의 '친미 내셔널리스트'들이 민족주의자로 행세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광수도 민족주의자로 계속 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민족의 힘'과 '민족의 영광'을 추구하는 '내셔널리즘'이라면 그 수단으로 '친일'도 할 수 있고 '친미'도 할 수 있다. '민족의 전통'을 부정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여기서 '민족주의' 대신 '내셔널리즘'이란 말을 쓰는 것은 서양의 내셔널리즘을 그대로 받아들인, 일종의 '거울 속의 오리엔탈리즘'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전통적 민족의식에 근거를 두지 않고 서양 내셔널리즘의 관념과 기준을 따르기 때문에 민족의 전통을 등질 수 있는 것이다.
근대화를 절체절명의 과제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에 힘을 쏟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양력과세 강요에는 합리적 근거가 없다.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로 요약되는 (전근대) 서양식 명절을 따라가는데 우리 명절을 지키는 것보다 근대화를 위한 어떤 이점이 있는가. 그보다는 조선의 전통을 말살하고 일본식 근대화를 강요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의지를 담고 있던 것이 '이중과세 폐지' 구호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양력과세 강요는 해방 후 첫 설 한 차례를 거르고는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 해방 전후를 관통하는 양력과세 강요의 기본 축은 국가주의였다. 끈질긴 압력을 무릅쓰고 다수 인민이 음력설을 지키는 데는 국가주의(일본 제국주의와 대한민국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도 한 몫 한 것으로 이해된다.
1985년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음력설을 공휴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85년에 비로소 양력설의 3일 연휴에 곁들여 음력설을 '민속의 날'이란 이름의 공휴일로 만들었다. 1986년 어느 단체의 조사에서는 국민의 83.5퍼센트가 음력과세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설" 조) 그리고 1989년 비로소 음력설이 '설'의 이름을 되찾고 3일 연휴가 제도화되었다.
1985년은 전두환 정권이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공휴일을 대폭 늘리고 '국풍'이니 뭐니 전통을 아끼는 시늉을 할 때였다. 그리고 1989년은 군사 독재를 청산한 직후였다. 정권이 민의에 영합하려는 시점에서 음력설이 엉뚱한 이름으로나마 존재를 인정받고, 민의가 정권을 좌우하게 된 시점에서 설이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억압 체제가 대한민국에서도 1987년까지 이어져 온 사실을 설의 위상 변화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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