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언론사의 새해맞이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시민들이 정치인·정당으로부터 그 답을 듣고 싶어 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 이슈로 '서민 복지 확대'를 들고 있다. 이는 정치·사회 전문가들의 분석과도 일치한다. 겉으론 복지를 둘러싼 논쟁이 한풀 꺾인 모양새지만, 곧 펼쳐질 본 싸움을 위해 각 당은 물밑에서 이 이슈에 대한 밑그림을 가다듬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0년 6·2 지방선거를 통해 본격화된 복지 국가 담론은 마침내 한국의 정치권 전반을 뒤흔드는 힘을 갖게 되었다. 지난해엔 무상급식 등 보편 복지에 찬성하는 박원순 서울 시장 등 시민 정치 세력이 부각되었고 연말 민주통합당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한나라당 역시 오세훈 전 서울 시장 등 반(反)복지 정치인들이 힘을 잃어가는 한편, 친(親) 복지 성향의 박근혜 및 쇄신파가 당 재편의 키를 쥐게 됐다.
'프레시안 books'는 2012년 첫 대담으로, 위처럼 지난해를 사로잡은 '복지 국가'와 관련된 최근 담론을 정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출간된 복지 국가 관련 단행본을 중심으로 복지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고, 결론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가야 할 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다.
대담자로는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이태수 꽃동네대학교 교수, 이상이 제주대학교 교수가 나섰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2007년작 <복지 국가 혁명>(밈 펴냄)에 참여한 이래 국내에 '보편적 복지' 담론이 확대되는 데 앞장서 온 세 사람은 △복지 국가를 받치고 있는 이념·사상적 기반, △구체적인 정책, △이념과 정책 사이를 연결하는 구현 과정을 다룬 수 권의 책들을 소개하면서 그 의의를 분석했다. 나아가 이제부터 적극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역동적 복지 국가의 그림, 조세 정책에 대한 의견을 내놨다. 다음은 두 시간에 걸친 대담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 (왼쪽부터 시계 방향) 이태수 꽃동네대학교 교수,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이상이 제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허환주) |
보편적 복지를 '진보의 담론'으로 만든 최초의 책?
정승일 : 지난해 복지 이슈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10월 26일 서울 시장 선거와 무상급식 논쟁을 계기로 이제는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하는 논쟁을 넘어 보편적 복지는 당연한 전제로 깔면서, 그러한 보편적 복지 국가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는 논쟁으로 차원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복지를 강조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사회복지 예산을 조금 늘리거나 보편적 복지의 요소를 일부 도입하는 선별적 복지 확대에 그쳤다. 경제 정책에서는 신자유주의를 견지하면서 사회복지에서도 선별적 복지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미국식 구상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들, 그리고 일반 대중들도 패러다임 자체의 변환, 즉 보편적 복지 국가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논의 지형 변화를 담론적으로 이끌어갔던 여러 책들이 있었다. 오늘의 좌담은 그간 출간되었던 복지 국가 관련 책들을 그간의 복지 국가 담론의 변화 맥락 속에서 조망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 역시 '보편적 복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 개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7년 여름 <복지 국가 혁명> 출간 준비에 참여하면서였다. 오늘 좌담에 참석한 세 사람 모두 당시 그 책을 함께 준비했다.
▲ <복지 국가 혁명>(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회 지음, 밈 펴냄). ⓒ밈 |
노무현 정부의 핵심을 이루던 소수의 사람들이 복지 확대를 이야기하고 또한 관련 정책도 결정되고 있었는데, 거기엔 뚜렷한 한계가 있으며 왜곡될 가능성도 있었다. 보다 광범위한 복지 국가에 대한 상(像)이 지식인과 대중들 사이에 공유될 필요가 있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라는 단체는 이런 상황에서 '복지 국가 운동'의 필요성을 전면에 제기하고 '복지 정권'이 실현되도록 하겠다는 의미에서 탄생했다. 우리는 복지 국가란 대통령 한 명 바뀐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위한 정책 정당을 만들어야 하고 지속적이고 대중적인 대규모 운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설립 취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출간한 책이 <복지 국가 혁명>이었다.
보편적 복지의 정치 담론화에 기여한 책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출범하고 몇 개월 후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고, 진보 진영은 얼어붙었다. 민주, 진보 정당들이 분열되었고 운동권은 바닥으로 침체했다. 그런 상황에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2008년부터 복지 국가 아카데미를 시작했다. 또한 지속적으로 담론과 정책을 개발했다. 그리고 그 성과를 모아 2년 뒤인 2010년 3월에 발간한 책이 바로 <역동적 복지 국가의 논리와 전략>(밈 펴냄)이다.
▲ <역동적 복지 국가의 논리와 전략>(이상이 엮음, 밈 펴냄). ⓒ밈 |
이후 실제로 우리 정치권은 복지 국가라는 화두와 가치관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성되고 있다. 이제는 한나라당마저도 보수주의 입장에서 복지 국가를 수용하는 박근혜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시장 만능주의 세력으로 분화되고 있다.
정승일 : <역동적 복지 국가의 논리와 전략>이 나온 뒤 진보·개혁 정치인들이 복지를 중심으로 모였고 복지 이슈가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책이 나온 지 3개월 뒤인 6.2 지방선거에서는 무상급식이 중심적 정치 이슈로 대두되었다. 무상급식 문제야말로 '선별적 복지 vs. 보편적 복지' 프레임을 잘 보여줬는데 여기서 '보편적 복지' 진영이 승리한 셈이다. 진보 진영만 놓고 보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보편적 복지 국가'라는데 있어선 큰 합의를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에 관한 다른 여러 책들도 출간되었다. (상자 기사 1 참조)
상자 기사 1 : '왜 우리에게 복지 국가가 필요한가'를 알고 싶다면. 이태수의 <왜 복지 국가인가>(이학사 펴냄, 2011) "이 책 2부의 부제에 쓴 대로, 우리 사회는 '정글 사회'다. 한국을 정글로 만드는 빈곤·자살 등 위기적인 면을 다양한 통계와 현상을 통해 보여 주면서, 그것을 내적인 구체적 흐름들과 연결 지으면서 묘사했다. 우리 사회가 복지 국가로 가야만 하는 이유를 설파하고, 앞으로 어떤 복지 국가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 이야기했다. 강연 내용을 쉽게 풀어 썼기 때문에 고등학생부터 일반 성인들, 복지에 대해서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은 지식인까지 하루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책이다." (이태수) 경향신문 특별 취재팀의 <우리는 중산층까지 복지 확대를 요구한다>(밈 펴냄, 2011) "<경향신문>이 갖고 있는 네트워크를 총 동원해서 복지 국가를 시민의 입장에서 볼 수 있도록 기획한 책이다. 기획도 과감했고, 인력도 대거 투입한 역작이다. 그리스,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여러 외국 사례를 상세하게 보도했고, 국내의 거의 모든 복지 전문가들이 한 마디씩 참여해 거들었을 정도로 충실하다.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과 <조선일보>가 함께 했던 '복지 백년대계'라는 시리즈가 있는데, 이것과 <경향신문>의 기획이 보수 언론·진보 언론의 양대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이) |
보편적 복지 국가의 모델, 스웨덴을 찾아서
정승일 : 그렇다면 복지 국가 운동이 앞으로 지향하는 모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보편적 복지 국가가 이룩된 사회는 대체 어떤 사회인가?'하는 물음이다.
이태수 : 복지 국가는 20세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서구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대안 체제이다. 따라서 국가·시기마다 다르게 변용되어 왔다. 그 가운데 "사회 구성원 각각의 인간다운 삶을 책임지는 사회의 공동선을 인정하고, 이를 위해 사회 구성원 각각이 사회연대와 참여의 정신으로 충만하며, 민주국가가 이들을 대변하여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하는 예로는 역시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을 들 수 있다.
정승일 : 요즘 서점에서도 스웨덴을 다룬 책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상자 기사 2 참조) 이 책들은 이미 복지 국가를 구축한 사회의 삶의 모습을 세세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준다. '이런 게 실제로 가능해?'라는 의문이 들 정도의 모습이 펼쳐진다.
상자 기사 2 : 스웨덴의 거짓말 같은 현실을 보라 신필균의 <복지 국가 스웨덴>(후마니타스 펴냄, 2011) "저자는 1970년대 초반 스웨덴으로 유학을 가는데, 한국에서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서 귀국을 못하게 된다. 이후로 20년 이상을 스웨덴에 살며 공부를 했고, 스톡홀름 시 공무원을 하기도 했다. 복지 정책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정책 실무자로 스웨덴을 체험한 셈이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스웨덴 복지 정책을 세밀한 부분까지 설명하고 있다." (정승일) 변광수의 <복지 국가 스웨덴 사람들>(문예림 펴냄, 2009) "이 책엔 스웨덴에 유학을 가서 아이를 낳았는데, 임신·출산시 모든 과정에 무료로 간호사가 가가호호 방문 간호를 해 준다는 내용이 있다. 그 때가 1960년대인데 이미 그런 제도가 있던 것이다. 한국은 아직도 안 돼 있지 않나. 내가 어디 구청장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제도를 한 번 해보자고 이야기를 꺼내면, 그들은 '답이 안 나온다'고 대답한다. 한 구당 1년에 3000명 이상의 아이가 탄생하는데, 간호사 수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게 우리 사회가 복지 국가에 대해 갖고 있는 상상력의 현주소다." (이태수) 박승희의 <스웨덴 사회 복지의 실제>(양서원 펴냄, 2007) "이념적인 복지 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는 사회 복지 전문가들이 본 스웨덴 복지의 실제를 다루고 있다. 그 어떤 프로젝트의 돈도 받지 않은 현장 탐사 보고서다. 스웨덴 노인들이 어떤 연금·요양서비스를 받고 있는지, 아동 수당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전부 인터뷰해서 '제도가 국민 개개인에게 급여로서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추적한 책이다." (이태수) |
소비적 복지+생산적 복지=역동적 복지 국가
▲ <복지 국가 스웨덴>(신필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전통적인 케인즈주의 복지 국가에서 중요한 것은 총 수요 관리이다. 소득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총수요가 줄어들고 경제가 불황에 빠지니, 정부가 복지 재정을 늘려 소비 수요를 관리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케인즈주의 복지 국가는 '소비적 복지'라고 이야기된다.
스웨덴 복지 국가 역시 소비적 복지 국가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이 아니다. 스웨덴에서는 '적극적 보편적 복지'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건 사회복지 정책을 넘어, 그 자체로 경제 정책이 된다. 보편적 복지를 통해 모든 국민을 다 건강하게 만들고 제대로 된 보육과 교육의 기회를 주면, 인적 자본이 강화되어 결과적으로 공정한 경제 성장과 혁신이 이루어진다. 이른바 생산적 복지다.
정승일 : 케인즈주의 복지 국가가 소비와 수요를 강조한다면 우리가 지향하는 북유럽 모델에서는 생산과 공급도 강조하고, 따라서 경제 성장도 지향한다. 예를 들어 스웨덴에선 사회적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지키고 있는데, 그 결과 업종별 최저임금 수준이 높게 설정된다. 그래서 그 임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기업들은 자동적으로 퇴출된다. 그렇지만 기업이 문을 닫아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오더라도 정부가 실업자들을 적극적으로 책임진다. 말하자면 망해야 마땅한 기업은 '잘 망하게' 도와준다. 그야말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이상이 : 최저 임금을 확 올리고, 최저 임금도 못 주는 기업들은 순차적으로 도산될 수 있도록 하고, 그 안에서 기술 혁신이 일어나고 임금·근로 조건의 기업 간 양극화가 좁혀지게 해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새로운 혁신적 기업들이 계속 탄생하고 경쟁력이 강화된다. 공급과 생산의 측면에서 기술력과 생산력 상승의 선순환 구조가 작동한다. 이렇듯 생산과 공급의 성장 엔진을 탑재한 복지 국가를 '역동적 복지 국가'라고 볼 수 있다.
역동적 복지 국가냐 경제 민주화냐?
▲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프레시안(허환주) |
한편, 최근 "복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제 민주화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생산 및 공급 체제를 재벌 위주에서 중소기업 위주로 재편하는 것이 복지 국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경제 민주화론자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앞으로의 치열한 논의를 위해서도, 보편적 복지 국가를 어떻게 생산·공급 즉 기업 체제 및 금융 체제와 결합시켜 '역동적'으로 만들 것인지, 이를 위해 재벌과 중소기업, 금융 시장을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 논의하기 시작해야 한다.
참고로 우리가 지향하는 복지 국가 모델에 케인즈주의적인 소비 수요만이 아니라 공급 및 생산 측면의 경제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 관해 더 깊이 보려면 <역동적 복지 국가의 길>(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엮음, 밈 펴냄, 2011)을 읽기 바란다. 이와 관련하여 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 펴냄, 2011)도 추천한다. 그리고 보조적으로 미야모토 타로의 <복지 국가 전략-스웨덴 모델의 정치경제학>(임성근 옮김, 논형 펴냄, 2003)도 도움이 된다.
매년 50조원의 추가 복지 예산이 필요하다면?
정승일 : 그런데 복지 국가의 역동성 논의에 앞서 당장은 복지 국가를 위한 돈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이냐, 이른바 재정 운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어떤 책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 <왜 복지 국가인가>(이태수 지음, 이학사 펴냄). ⓒ이학사 |
결국 우리는 지금보다 수배 많은 복지 재원이 필요하다. 또 하나는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는 우리가 낸 세금만큼도 복지로 되돌려 받지 못한다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더 많은 국가 재정을 복지 분야로 돌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길게 보면 증세도 해야 되겠지만, 당장은 국가 재정의 지출 구조에 대한 과감한 조정도 강조되어야 한다.
이상이 : 지나치게 많은 토건 예산을 복지 예산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문제는 그 규모인데, 어떤 진보 인사들은 토건 관련 예산을 줄이고 토건족에 세금만 더 부과해도 수십조 원의 복지 예산을 만들 수 있는 양 말한다. 하지만 민주통합당에서는 향후 정부 예산에서 토건에서 복지로 돌릴 수 있는 금액을 평균 연 10.7조 원 정도로 본다. 내 생각엔 그것도 많고, 10조 원 정도라고 봐야 맞다.
이 돈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이라고 본다. 일자리를 자주 잃어 고용보험이 정말 필요한데도 정작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사각지대의 노동자들, 영세 자영업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비정규직이 많은 노동 시장을 바꾸어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려면, 매년 10조 원 정도가 실업수당과 직업 재훈련, 사회적 일자리 창출 등에 투여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아동수당이나 노인복지, 의료, 교육 등은 무슨 돈으로 하는가? 따라서 10조 원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총체적 재원 마련이 필요하다. 당장 2013년 2월 집권 직후부터 매년 30~40조 원 정도가 복지 재원으로 추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10조원을 넘는 나머지 20~30조 원을 어떻게 매년 마련할 것인가? 증세, 불가피한 것 아닌가.
2013년 이후의 집권 5년간 매년 평균 50조 원의 추가적 복지 예산이 필요하다. 그 중 10조 원은 토건 예산을 절약해서 마련할 수 있다. 나머지 40조 원은 증세 또는 사회보험료 인상을 통해 조달해야 한다. 그중 15조 원 정도는 건강 보험료 인상 등으로 마련하고, 나머지 25조 원은 복지 국가 목적세로 증세를 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구상에 관해서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지난 10월에 펴낸 <역동적 복지 국가의 길>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한나라당에도 못 미치는 민주당의 복지 구상?
정승일 : 민주당은 지난해 8월 보편적 복지 국가 재정의 청사진으로 '33조 원 안(案)'을 내놨다. 차기 정권을 잡을 경우 매해 33조 원의 재원을 마련해 3+3(무상 급식·보육·의료+반값 등록금·일자리·주거 복지) 정책을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그 33조 원을 MB의 토건예산을 대폭 줄여서 12조원 만들고(재정개혁), 건강보험료를 인상하는 등으로 통해 6조 원(복지개혁), 그리고 소득세·법인세 추가감세 철회와 음성탈루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 등의 실질 증세를 통해 15조원 등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국민들이 증세는 싫어하니 명목상 증세는 안 하는 걸로 되어 있다.
이상이 :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박근혜 쪽에서 오히려 증세를 하겠다고 나온다. 박근혜 캠프의 안종범 성균관대 교수가 GDP 대비 조세부담률을 22퍼센트까지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오히려 21.5퍼센트까지 늘리면 족하다 말한다. 오히려 박근혜 쪽의 복지 국가 구상이 더욱 앞서가고 있다.
서로 복지를 더욱 많이 하겠다는 것이야 우리 입장에서 보면 좋은 경쟁 구도인데…. (웃음) 이런 논란이 진행될수록 누가 진정한 복지를 얘기하는지, 누가 진짜 포퓰리스트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 <역동적 복지 국가의 길>(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엮음, 밈 펴냄). ⓒ밈 |
정승일 : 최근 윤흥식 인하대학교 교수가 복지 국가 재원 마련을 위해 부가가치세를 올리면 어떻겠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스웨덴과 덴마크 등 북유럽 복지 국가의 부가가치세 세율과 세수가 우리보다 많은데, 우리고 그것을 모방하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득 재분배에 역행하는 부가가치세를 우리가 무작정 도입할 수는 없다. 스웨덴의 역사적 맥락을 봐야 한다. 이 문제 역시 <역동적 복지 국가의 길>의 조세재정 편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복지 국가보다 투명성과 공정·공평이 더 중요한 거 아냐?"
▲ 이상이 제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허환주) |
그리고 이들은 노동 시장의 불공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복지 국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대기업 정규직은 사내 복지와 임금 수준이 높고 노동조합도 있다. 이에 반해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사내 복지와 임금 수준이 낮다. 따라서 복지 국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투명한 공정 국가'라는 것이다.
이상이 : 복지 국가를 만들게 되면 공정·공평의 문제와 투명성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면이 많다. 예컨대 2000년에 건강 보험이 통합되었는데, 당시 통합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논리가 "소득 파악이 투명한 직장인들과 불투명한 자영업자를 하나의 제도로 묶어버리면 직장인들이 손해를 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보편적 의료 복지를 만드는 것보다 지역 자영업자들의 소득 투명성을 높이는 과제가 급선무라 주장했다. 이들은 나중에 건보 통합에 반대하는 헌법 소원을 걸기도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땠나? 오히려 보편적 의료 보험 제도 덕택에 자영업자 소득 파악률이 30퍼센트에서 70퍼센트로 높아졌다. 이는 OECD 내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신용카드 사용, 현금영수증 제도가 정착되니 자영업자 소득이 대부분 파악된다. 한국 사회는 더 이상 10년 전처럼 지하 경제가 전체의 30퍼센트에 이른다는 불투명한 사회가 아니다.
정승일 : 복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선 세금을 걷어서 재정을 충당해야 하는데, 세금을 거두기 위해선 그 체계가 투명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같은 경우는, 비단 이건희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웬만한 고소득자들도 세금을 잘 안 낸다. 지금까지는 당사자들이 이러한 세금 징수의 허술함에 별로 신경을 안 썼다면, 복지 국가론이 나오고 과세 논의가 나오면서 투명성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한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직결되는 메커니즘이란 의미에서 복지 국가야말로 투명 사회를 만드는 결정적 수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복지 국가 대 자유주의?
이상이 : 나는 나아가 복지 국가를 옹호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시민운동 하시는 분들 가운데서도 '민주주의의 반대는 군사 독재, 권위적 정부'라는 틀에 매몰되어 있다 보니 '정부에 저항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라는 낡은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기꺼이 참여해, 그 공동체를 좋게 만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며 그 원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 국가를 옹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오해하지 않는가. '국가'가 나오면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주의를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사고방식을 지적하고 싶다.
이태수 :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맹점은 시장의 폐해, 즉 시장이 가져다주는 실패 요인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자유에 대해선 천착하는데, 그 자유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 하에서 궁극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하는 부분에 있어선 한계를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적 가치가 복지 제도하고 연동되어질 수 있는 부분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그렇게 분리된 형태의 단계에서만 논하다 보니까 결국 여러 지점에서 복지 국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충돌하는 게 아닌가 싶다.
복지는 사회 기본권, 문제는 참여다
▲ 이태수 꽃동네대학교 교수. ⓒ프레시안(허환주) |
현재 복지를 얘기할 때 정부나 제도에 의한 부분이 강력하게 형성되어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복지 국가를 오로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한 커다란 제3세력으로서의 정부'만으로 이해하는 건 너무 추상적이다. 제도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몰락하거나 자체의 무게감에 의해 붕괴될 가능성이 크다. 정말 중요한 건 제도 안에 살아 숨 쉬는 시민들의 인권에 대한 수준이다.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주변의 삶에 연대하는 정신을 발휘할 수 있어야만 제도가 무게감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지 않는다.
실제로 복지 국가 논쟁의 핵심을 '복지권을 시민권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보는 이들도 있다. 마셜(영국의 사회학자 토마스 마셜)이 말하는 시민권 변천의 역사 속의 '사회권'이, 천부적 권리로 인정되는 성숙한 단계로 접어드는 것. 그거야말로 보편적 복지 국가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기반이다. 그러므로 물음은 '우리 사회의 인권에 대한 시민의 의식을 어떻게 높이느냐'로 돌아온다. 나아가 '복지에 깨어 있는 시민의 힘'을 어떻게 구현할 것이냐다.
이상이 : 정말 중요한 지적이다. 복지를 경제·사회 운영 원리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게 우리 주장이었다. 왜 복지 국가를 하려고 할까? 다 같이 행복하기 위해, 사회구성원 모두의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하는 거다. 한국 사회를 보면 형식적 민주주의의 권리는 대체로 틀이 잡혀 있지만, 삶의 민주주의에 있어선 갈 길이 멀다. 지적한대로 사회권 보장이 관권이고, 그걸 제도화하려는 노력이 복지라고 생각한다. 사회권이 제도화되기 위한 새로운 운영 원리가 복지 국가인 것이다.
지적한대로 흔히 복지에 대해 '시장 대 정부'라는 대립 항을 만들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때 정부라는 것을 하나의 커다란 행정 기계로 이해하곤 한다. 하지만 이 생각 자체가 상당한 편향일 수 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정부는 늘 시민의 참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정치와 시장, 시장과 정치라는 관계를 바라보고 조직된 힘으로서 정치적 과정을 통해 들어오는 환류 시스템이 중요하다. 결론은 역시 민주주의다.
참여 민주주의와 결부되지 못한 커다란 관료주의 정부가 복지 국가를 운영한 대표적인 예가 남유럽 국가들, 그 중에서도 그리스다. 북유럽 국가들이 국민의 권리나 사회권에 대한 연대의식으로 똘똘 뭉친 반면, 그리스는 사회적 신뢰감, 연대의식 수준이 뚝 떨어져 있고 사회가 투명하지 못하다. 결국 복지국가는 민주주의, 사회 연대의식과 함께 가야 한다는 얘기다.
이태수 : 그렇다. 특히 소수의 고위급 인사들에 권력이 집중되고 거기로부터 왜곡이 발생하는 중앙 집권적인 정부와,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한 자발적 참여에 의해 구성되는 지역 정부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후자의 정부가 GDP의 30퍼센트를 복지를 위해 쓰는 것은 전자의 정부가 GDP의 30퍼센트를 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 ⓒ플래닛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달라졌다. 민주 정부 10년 동안 복지의 발전을 생각했던 사람들이 해온 방식은 대통령의 큰 결단을 요구하거나 보건복지부에서 더 많은 예산을 빼오는 방법 등, 복지마저도 중앙 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6.2 지방선거를 치르면서부터는 그것보단 훨씬 지역 밀착적인 부분을 고민하게 된 것 같다.
지역 사회에서 생활 밀착적인 변화를 고민하는 움직임은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지식인들도 지역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는 경험들을 함께 축적할 필요가 있다. 중앙 정부에선 손에 잡히는 거버넌스(협치)가 만들어지고 지방 정부 리더들이 그걸 수용하면서 펼쳐지는 모델이, 우리나라가 복지 국가로 가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더 나은 삶, 더 나은 복지 국가를 상상하라
정승일 : 이야기를 들으니 '복지 국가, 복지 국가 해도 결국엔 '국가' 아니냐'는 비판이 떠오른다. 하지만 복지 국가는 비스마르크 식의 위로부터의 복지뿐 아니라 풀뿌리에 기초한 시민 사회의 힘을 필요로 한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선 '참여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권, 지식인뿐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이제 새로운 국가를 상상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이에 도움을 줄 만한 책으로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와 로버트 라이시의 <왜 위기는 반복되는가>를 추천하고 싶다. (상자 기사 3 참조) 미국에서조차 이제 미래는 복지 국가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이태수 : 마지막으로 학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가 많은 책을 이야기했지만 아직까지도 복지 국가 담론은 배가 고프다. 특히 실제로 스웨덴 같은 복지 국가가 구현되는 '과정'을 다룬 책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할 것 같다. 사람이 책을 만들지만, 결국 책이 사람을 만드는 것 아닌가? 앞으로 복지 국가에 대한 더 많은 책들이 나와서, 우리가 앞서 낸 책들은 빨리 잊혔으면 좋겠다. (웃음)
상자 기사 3: 복지 국가에 관한 영감을 줄 정치경제학적 담론들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박태일·유병규·예상한·한상완 옮김, 현대경제연구원books 펴냄, 2008) & 로버트 라이시의 <왜 위기는 반복되는가>(박슬라·안진환 옮김, 김영사 펴냄, 2011) "폴 크루그먼은 미국의 '리버럴' 즉 민주당원들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1930년대의 뉴딜동맹 즉 복지 국가 동맹을 다시 부활시켜야만 미국이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버트 라이시 역시 2008년 금융 위기를 겪은 뒤 기존의 자기 생각을 많이 수정하면서 낸 책인 <왜 위기는 반복되는가>에서 폴 크루그먼과 똑같은 논조를 보여준다. 이 책들은 미국에서 진행되는 새로운 복지 국가론의 핵심이다. 물론 크루그먼과 라이시의 책에서는 현재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넘어서는 복지 국가의 미래상에 관한 사상적 구상은 볼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하지만 미국 리버럴의 논의가 우리나라의 진보 진영에 매우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책들이다." (정승일)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 2011) "<포스트 워 1945-2005>의 작가이자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저서다. 토니 주트가 2008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뒤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 쓴 유언적 책이다. 그는 현재 왜 우리가 불평등 사회를 사는지에 대해 20세기 역사와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와는 다른 유럽 복지 국가들을 비교하면서 복지 국가를 옹호한다. 미국과 영국이 지난 30년 동안 복지제도를 파괴하고 시장만능주의로 나아간 결과는 우리가 현재 보는 대로 처참하다. 토니 주트는 이 책에서 자신의 견해를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하듯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다. 나는 대학생들이 이 책을 반드시 읽었으면 좋겠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자면, 이 책을 '의식화 교재'로 써야 한다." (이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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