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란 부제를 단 <삐딱하게 보기>(김소연 옮김, 시각과언어 펴냄, 1995)가 필두였고,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펴냄, 2002)이 전환점이었으며, <지젝이 만난 레닌>(정영목 옮김, 교양인 펴냄, 2008)이 새로운 영감이었다. 우리에게 소개된 순서를 따르자면 그렇다.
사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괴물' 철학자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을 통해서 영어권 지식 사회에 등장했을 때, 그가 우리 시대의 가장 문제적인 철학자이자 '가장 위험한 철학자'가 되리라고 점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의 일원으로 지젝을 처음 소개하면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조차도 "포스트 마르크시즘적 시대에 사회 민주주의적 정치 프로젝트를 구축하는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필독서가 되리라고 데뷔작의 의의를 한정했었다.
▲ 슬라보예 지젝. ⓒwww.amazon.com |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 대한 이러한 열광을 낳는 것일까? 개인적으론 그를 통해서 비로소 헤겔의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해 진지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 걸로 이유를 대신할 수 있지만, 애초에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지젝이 목표로 한 바이기도 하다. 그는 이데올로기 이론에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 외에 라캉 정신분석의 기본 개념에 대한 개설을 제공하는 것과 '헤겔로의 회귀'를 목표로 내세웠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서로 연계돼 있다는 점이다. 그는 '헤겔을 구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라캉을 경유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이러한 라캉적 독법과 헤겔의 유산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판단한다. 비록 "민주주의는 모든 가능한 체제들 중에서 최악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것도 그보다 낫진 않다는 것이다"라는 처칠의 주장을 반복하던 초기의 입장은 곧 철회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 탈(脫)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색은 그가 줄곧 견지하고 있는 과제다.
▲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펴냄). ⓒ인간사랑 |
하지만 라캉을 따라서 '메타 언어'는 없다고 주장하며 고상한 담론과 범속한 담론의 이분법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지젝은 그러한 비판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의 헤겔 독법에 유보할 지점이 많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헤겔의 대한 새로운 독해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라고 응수한다.
굳이 그러한 철학적 기여가 아니더라도 지난 20년간 현 세계의 다양한 정치경제적 이슈에 대해 지속적인 철학적 성찰과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제시하고 있는 철학자가 지젝 말고 더 있는지 궁금하다. 분명 손에 꼽을 정도이지 않을까. 게다가 그는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가 아닌가! 지젝은 어떤 사유와 이론을 우리에게 제시하는가?
▲ <시차적 관점>(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펴냄). ⓒ마티 |
편저 <지젝이 만난 레닌>과 공저 <레닌 재장전>(이현우 외 옮김, 마티 펴냄, 2010)을 통해서 지젝은 레닌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제안하고 촉발하고자 한다. 이 경우 레닌은 "마르크스는 괜찮아, 하지만 레닌은 뭐야?"라고 할 때의 레닌이다. 지젝은 한마디로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고 다시 따져 묻는다. 그의 기본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
"우리가 양보할 수도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레닌주의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실질적인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 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
물론 '자유민주주의'조차도 제한받고 있는 우리의 경우엔 사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지젝이 나열한 여러 주제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가 국가나 기업의 지원 하에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관용의 사례로 지젝이 들고 있는 것 한 가지는 인도에서의 맥도널드 해프닝이다. 맥도널드가 감자 칩을 동물성(소의 지방에서 나온) 기름에 튀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인도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데, 이에 대응하며 맥도널드는 바로 사실을 시인하고 인도에서 파는 모든 감자 칩은 식물성 기름으로만 튀긴다고 약속한다. 신속한 조치에 만족한 힌두교도들은 다시금 '안심하고' 감자 칩을 먹게 되었다는 얘기다.
지젝이 보기에 맥도널드의 힌두교도 '존중'은 어린아이들을 대할 때의 태도와 다를 바 없는 '생색내기'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진지하게 대하진 않더라도 그들의 환상을 굳이 깨뜨리지 않으려고 무해한 습관들을 '존중'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외부인이 어떤 마을에 가서 그곳 관습들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서투르게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인종) 차별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그런 관용적 태도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불에 태워 죽이는 힌두교의 전통에 이르면 손쉽게 '불관용'으로 바뀐다. 즉, 자유주의적 관용은 '타자'가 '진짜 타자'가 아닌 경우에만 유지되며, 이것이 언제나 타자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의 함정이다. 가령, 한국 사회에서도 성문법적으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란 합의만 유지될 수 있다면 무얼 해도 괜찮다(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원칙상으론 그렇다).
▲ <까다로운 주체>(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
이 노동자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실제로는 빨간 잉크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더라도 그의 거짓말은 '진실'을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그리고 이런 방법이야말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핵심이기도 하다. '테러와의 전쟁'이나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등의 용어들 대신에 우리를 진정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를 과연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원적 경합을 허용하며 그것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이지만,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라고 그는 주장하며,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는 정반대라고 선을 긋는다. 이러한 입장은 '좌익 소아병'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상기시키는데, 그가 보기에 정치적 극단주의 혹은 과잉 근본주의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전치 현상이다. 즉,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이자 제한으로, "끝까지 가는 것"에 대한 거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 정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그것이 정치 투쟁이 경제 영역을 참조해야만 제대로 독해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핵심적 통찰, 즉 '정치경제학'에 대한 통찰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視差)에 대한 고려라고 본다. 예컨대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데 있으며 '레닌을 반복하라!'는 지젝의 요구는 거기서 비롯된다. 경제가 핵심이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즉, 반세계화(반지구화) 운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실상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때에만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지젝은 이렇게 주장한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을 실제로 문제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 예컨대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인사이더>처럼 무자비한 이윤 추구에 몰두하는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다룬 영화들이 '반자본주의'를 표면상 내세우더라도 "대기업의 음모를 무너뜨리는 정직한 미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는 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의 견고한 중핵(민주주의) 자체는 제거할 수 없다.
지젝이 '진정한 마오주의자'라고 칭하는 알랭 바디우는 아예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이렇듯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자본주의와 함께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음으로써 지젝은 급진 민주주의라는 입장에서 조금 더 왼쪽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의 전환을 혁명적 테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더욱 강화한다.
지젝은 자코뱅의 혁명적 폭력에 대해서도 부르주아적 법과 질서의 '초석적 범죄'라고 절반쯤 정당화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을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참고한 건 엥겔스의 말이다.
"최근 들어 사회민주주의적 속물들이 다시 한 번 이 말을 듣고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좋습니다, 여러분. 이 독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까? 그럼 파리코뮌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습니다."
즉, 파리코뮌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는 것이 엥겔스의 주장인데, 지젝은 엥겔스의 말을 받아서 1892~1894년의 혁명적 폭력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함께 '신적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즉 여기서 '신적 폭력=비인간적 폭력=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등가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때 '신적 폭력'이란 말의 해석은 정확히 '백성의 소리는 신의 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고대 로마의 격언을 따른 것이다.
자코뱅의 역사적 유산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지젝은 이렇게 바꿔서 질문한다. "혁명적 폭력의 자주 탄식할 만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폭력의 이상 자체를 거부하도록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오늘날의 전혀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여 그 현실화로부터 그것의 잠재적 내용을 부활시킬 방법이 있는가?" 그의 대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지적한 대로 자코뱅의 급진적 테러는 경제 질서의 근본적 기초를 흔들어놓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거꾸로 보여주는 히스테리적인 행동화일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지젝이 보는 자코뱅의 위대함은 테러의 연출이 아니라 일상의 재조직에 관한 정치적 상상력에 두어진다.
진정한 혁명적 과정은 두 가지 계기를 구성 요소로 갖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따라서 그것을 지젝은 첫째,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 그리고 둘째 '새로운 삶의 창안'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꿈을 위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만 하고 이런 꿈들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는 과거의 현실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 요점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실패는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한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경제적 조직과 일상생활의 재조직을 겨냥했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 실행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새로운 일상의 형식을 창조하는 데는 실패한다.
사실 문화대혁명의 마지막 시기에, 마오쩌둥 자신에 의해서 소요 사태가 봉쇄되기 전에 '상하이 코뮌'이 있었다. 당의 공식 슬로건에 따라 100만 명의 노동자들이 국가의 소멸과 심지어는 당 자체의 소멸을 요구했고, 직접 코뮌적 사회를 조직하고자 시도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마오쩌둥은 군대를 동원하여 질서를 회복한다. 인민에게 '반란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독려하고 부추긴 문화대혁명의 온전한 결론 앞에서 그 자신이 후퇴한 것이다. 이렇듯 마오쩌둥이 충분히,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역설적으로 오늘날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폭발을 위한 공간을 연 것이라는 게 지젝의 시각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들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거나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는 저항을 위해 후퇴한다"라는 식의 양자택일은 거짓된 것이라는 인식이다. 지젝이 보기에 양자는 동일한 가정을 공유한다. 즉, 국가 형태는 거기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장악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뿐이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지젝은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교훈을 상기시켜준다.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 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이다.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
▲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이러한 입장을 확인해둠과 동시에 지젝이 자신의 핵심적인 테제를 끌어내고 있는 농담 한 가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몽골 지배하에 있던 15세기 러시아가 농담의 배경이다. 한 농군이 아내와 함께 시골길을 걸어가다 말을 타고 오던 몽골의 전사를 만나게 됐다. 이 전사는 농군의 아내를 강간하겠다고 이르고는 "땅에 흙먼지가 많으니 내가 네 아내를 강간할 동안 네놈이 내 고환을 받치고 있어야겠다. 거기가 더러워지면 안되니까!"라고 덧붙였다. 몽골군이 일을 마치고 떠나자 농군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아내가 어이없어 하며 뭐가 기뻐서 난리냐고 묻자 농군은 이렇게 답했다. "그놈한테 한방 먹였다고! 그놈 불알이 먼지로 뒤덮였단 말이야!"
현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반체제 인사들이 놓인 곤경을 잘 보여주는 이 농담이 지젝은 오늘날의 비판적 좌파에게도 잘 맞아떨어지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래서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한 번째 테제를 그는 이렇게 비튼다. "우리의 사회들에서 비판적 좌파는 지금까지 권력자들에게 때를 묻히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나, 진정 중요한 것은 그들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 '거세'는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20세기 좌파 정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지젝이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강조하는 그 교훈이란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다. 혁명의 과정이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몇 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다시 소환되는 것이 '공산주의적 가설'이다. 지젝의 절친한 동료이기도 한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적 가설은 여전히 올바른 가설이며 나로서는 그 외의 어떤 올바른 가설도 발견할 수 없다. 만일 이 가설이 포기되어야 한다면 집단 행동 차원의 어떤 일도 행할 가치가 없다. 공산주의의 관점 없이는, 이 이념 없이는 역사적, 정치적 미래의 어떤 것도 철학자의 흥미를 끌 만한 종류가 되지 못한다."
물론 공산주의 이념에 계속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는 어떤 적대가 내재해 있는가.
▲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창비 펴냄). ⓒ창비 |
때문에 '세계 시민성'과 '공통 관심'을 바탕으로 "시장 메커니즘을 조절하고 제압하면서 엄밀하게 공산주의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세계적 정치 조직을 창설할 필요"가 제기된다. 그것이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 이어서 그가 펴낸 두툼한 책 제목은 <종말의 시대에 살아가기(Living in the End Time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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