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2012년 신년호를 내가 사랑하는 저자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사랑하는 저자와 만났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사랑하는 저자와 만나는 기쁨을 누리길 기대합니다. |
경계 위를 걷기
배수아의 등장은 한국 문학에 있어 낯선 것이었다. 소설뿐 아니라 배수아라는 사람 자체가 그랬다. (한국) 문학에 대한 어떤 존경심도 없어보였고, 직업은 공무원이었으며, 습작 기간도 문학 수업을 받은 적도 없었다. 흔히 사람들이 문학가에게 기대하는 것과 거리가 먼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끔 인터뷰에서 털어놓는 말은 마침 유행하던 신세대 담론과 어울리게 독특하고 파격적이었다.
쓰는 소설도 이런 자신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푸른 사과가 놓인 국도>(고려원 펴냄), <심야통신>(해냄 펴냄), <부주의한 사랑>(문학동네 펴냄) 등의 초창기 소설은 도시적인 삭막한 감수성과 자유 연상기법에 가까운 서술 방식이 결합되어 다른 작가들과 구분되는 배수아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내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어떤 억압도 꾸밈도 없이 자신의 안에 꿈처럼 쌓여 있는 기억들을 불러내어 기록했다는 인상을 주는 특유의 글쓰기 스타일은 초창기부터 형성되어서 에세이적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는 현재까지도 진화/변주되면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초기에는 이런 무의식적이고, 비 억압적인 서술 방식이 강하게 나타나서 평단과 독자로부터 극단적으로 양분된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문법은 존중되지 않으며, 시간의 순서 또한 고려 대상이 아니고, 심지어 화자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런 초창기 배수아 소설의 매력은 (나는 배수아의 작품 세계를 <이바나>(이마고 펴냄)가 쓰인 시기를 기점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려고 한다)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꿈과 같이 몽환적인 분위기와 도시적인 삭막한 정서가 뒤섞인 특유의 독특한 공기다. 이 공기는 기본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특유의 서술 기법으로 인해 발생된 효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편, 당시 한국의 시대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스스로 전혀 참고하지 않고 있다고 밝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은 사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쓰인 많은 문학 작품에서 포착되는데, 나는 그것을 정치적인 것의 소멸과 동시에 그 정치적인 것의 공백이 가져다준 빈자리를 자본의 풍요로움이 빠르게 메워가던 시대적인 상황에 있어서 하루키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일본의 1980년대와 한국의 1990년대가 구조적으로 닮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정치와 자본이 자리바꿈을 하는 바로 그 순간, 정치 투쟁이 상품 소비로 변환되는 시절의 한가운데에 있던 자가 느끼는 무력감과 그 무력감을 이제 사적이고 내밀한 방식으로밖에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된 자가 갖게 되는 또 한 겹의 무력감은 이런 시기에 청춘을 맞이한 예민한 젊은이들이 어쩔 수 없이 공유하게 되는 공통감각이 아닐까.
초창기 배수아 소설의 또 하나의 매력은 예민한 사춘기 소녀적 감수성이다. 이 시기 배수아의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조숙한 사춘기 소년소녀들이다. 그들은 세계의 부조리를 모두 간파하고 있을 정도로 충분히 똑똑하다. 그래서 거기에 거리를 두고 바깥으로 빙빙 돌며 주류적인 가치들을 무시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거기엔 언제나 불안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시하고 있는 그 세계가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사춘기적 탈주는 불완전하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탈주가 실패하고 사회와 타협을 이룰까봐, 혹은 탈주에 진짜로 성공하여 존재 자체가 잊힐까봐(고속도로에서 사과를 파는 여자가 되면 어쩌나) 불안에 떤다. 성장하느냐(타락하느냐), 도망치느냐(지워지느냐). 수치스러운 것은 둘 다 마찬가지다.
이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배수아의 초창기 소설들은 낯설고 독특한 스타일이 매력적이지만 그 세계관 자체는 평범함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지는 않다. 내용보다 스타일이 부각된, 중간 계급 젊은이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독특한 스타일리스트 정도로 여겨지던 배수아가 지금처럼 한국 문학에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된 것은 이 사춘기적인 방황을 급진화하는 방식을 택하면서부터였다. 이 급진화는 그녀의 삶과 글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그녀는 직장을 휴직하고 베를린에 잠시 체류했던 것을 계기로 번역가이자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하게 된다. 예민한 소년소녀들이 일기장을 상자에 넣고 사회에 편입하는 것을 완료하는 시점에 그녀는 정반대의 길로 뛰어든 것이다.
▲ <이바나>(배수아 지음, 이마고 펴냄). ⓒ이마고 |
물론 이 전에 나온 <그 사람의 첫사랑>(생각의나무 펴냄)에서 이미 배수아의 변화를 느낄 수가 있다. 이 소설집에는 그때까지 나온 배수아의 소설 가운데 가장 배수아답지 않은, 전통적 기준에서 봐도 손색이 없는 잘 쓰인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비문은 억제되어 있고, 비교적 선명한 플롯 구조를 가지며, 묘사는 사실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특유의 스타일을 전면적으로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녀의 변화에 대해서 살펴볼 때는 그것이 단절적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세계관을 바꾼 적이 없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을 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특유의 안개 같던 풍경은 초점이 선명한 풍경이 되었으며, 더 이상 그녀의 글은 비문이 매력인 독특한 신세대 글이 아니게 되었다.
이 급진화의 시기 배수아의 삶과 작품 세계를 바꾸어놓은 투쟁은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투쟁이었다. 그랬기에 더 급진적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시기에 대해서 말하면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내적 혁명이 뭐였는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 위에 적었듯이 소설 <이바나>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 자체가 배수아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행하는 시간 속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이 책에 어떤 힘이 혹은 불온함이 있다면 이 책이 한 명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자가 실제로 이뤄낸 정신적 변혁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수아가 현실에서 안정된 서울의 공무원의 삶을 버리고 낯선 베를린으로 간 것처럼 소설 속의 주인공도 자신이 살아온 도시를 버리고 중고차 이바나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그 여행은 흔한 여행이 아니다. 무료한 삶을 견디는 중간 계급에게 보답으로서 주어지는 여가로서의 여행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어져온 자신의 삶을 끊어버리고 스스로를 추방자의 운명으로 내모는 여행이다. 이렇게 배수아는 <이바나>를 통해서 자신의 토대인 메트로폴리스 서울과 결별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한 때의 치기어린 일탈이 아니다. 그녀는 고향을 잃는 자의 공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지배하는 정서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는 자의 설렘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자의 불안과 공포의 정서이다. 물론 그것은 불면에 시달리는 대도시의 소시민들이 매일 밤 꾸는 달콤한 꿈이기도 하다. 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영원히 떠나는 것.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배수아의 주요 독자는 불면과 우울에 시달리는 서울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다. 마치 책에서 여행을 가지 않는 자들이 여행기를 읽듯이 그들은 배수아를 읽는다. 자신이 내리지 못한 무모한 결단을 내린 한 고집 센 인간을 부러워하며.)
이 시기를 지나 배수아의 소설은 점차로 에세이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아예 제목에 에세이라는 말을 넣은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펴냄), 배수아 본인의 독서 노트에 가까운 <당나귀들>(자음과모음 펴냄)을 거쳐 단편집 <올빼미의 없음>(창비 펴냄)에 오면 심지어 소설 속에 배수아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에세이에 가까워지는 그녀의 소설은 다시 초창기 소설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스타일, 다시 말해 문장이 전면에 부각된다.
그런데 이렇게 에세이적 소설 쓰기를 시도하게 된 계기로 그녀가 좋아한다는 빈프리트 게오르그 제발트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발트의 글쓰기와 배수아의 글쓰기가 갈라지는 지점은 히스테리의 유무이고, 그것이 제발트보다 배수아의 글이 더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히스테리가 없는 제발트의 글쓰기는 유려하지만, 균열이 없고 매끈하게 봉합되어 있다. 하지만 배수아의 글쓰기는 균질적이지 않고 과잉되어 있다. 그래서 제발트의 글쓰기가 꿈처럼 독자들을 마비시킨다면, 배수아의 히스테릭한 글쓰기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
이런,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과잉은 한국과 독일을 오가면서 이중 언어의 현실에 놓이게 된 작가가 언어에 대해 갖게 되는 히스테리 때문이다. (물론 제발트도 이중 언어 환경에 놓여 있긴 하지만, 독어와 영어는 상대적으로 비슷한 계열의 언어이며, 제발트는 젊어서 영국에 건너가 양쪽 언어 모두에 익숙한 바이링구얼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에, 배수아와는 상황이 다르다.)
두 언어의 사이에서, 비로소 언어의 인위성(혹은 물질성)이 선명해지고, 언어 자체의 존재감이 팽창한다. 작가에게 그런 상황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자칫하면 언어 자체에 사로잡혀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나 사무엘 베케트 같은 20세기 모더니스트 작가들이 생의 후기에 바로 이런 곤경에 빠졌다. 그것은 회화의 물질성에 사로잡힌 현대 회화가 처한 곤경과 같은 것이다. 언어의 물질성에 사로잡힌 모더니스트들은 언어를 언어의 경계로, 다시 말해 침묵으로 밀어붙이게 되는데 물론 언제나 침묵에 닿는 데는 실패하게 된다. 말은 침묵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올빼미의 없음>(배수아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그리고 책의 끝에 수록된, 배수아 본인이 아낀다는 '밤이 염세적이다'는 위에 적었던 것처럼 20세기의 모더니스트들이 생의 후기에 도달했던, 곤경의 지점을 포착한다. 언어와 언어가 아닌 것의 경계. 말하기와 침묵하기 사이의 경계. 배수아는 바로 거기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곳에서 문장은 해체되고, 단어는 부서지고, 결국 쉼표와 구두점만이 남게 된다. 이 언어와 비언어 사이의 경계, 즉 말과 침묵의 경계에서 부상하게 되는 것은 목소리다. 왜냐하면 목소리야말로 침묵과 대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사라진 뒤에도 목소리는 존재할 수 있다. 아니 순수한 목소리는 언어의 끝과 침묵의 시작, 그 좁은 틈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침묵의 가장 직전이다.
배수아 소설의 최신 경향은 이렇게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목소리로서의 언어에의 강조, 내용의 측면에서는 에세이적 글쓰기에서 꿈에 대한 글쓰기로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처음 배수아의 소설이 소설과 에세이 사이를 가로지르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사적 현실이 속한 세계(베를린)와 그녀의 독자가 속한 세계(한국) 사이의 거대한 틈을 메우기 위한 시도였다고 한다면, 이제 에세이에서 다시 꿈의 세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비타협적인 고립주의가 그녀의 사적인 현실을 포함하여 현실 전체에 등을 돌린 징후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수아의 꿈의 세계는 배수아의 억압된 현실 세계를 투사하는, 굴절된 거울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제발트가 유럽의 종말적 풍경에 압도되어 보르헤스적인 꿈의 세계를 어슬렁거렸던 것처럼, 카프카가 자신의 현실의 곤경을 재료삼아 관료들로 이루어진 악몽의 세계를 설계했던 것처럼. 배수아는 굳게 닫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현실의 압력을 재료 삼아 길을 잃은 목소리들이 떠다니는 꿈의 세계를 짓고 있다.
그 세계는 경계 위에 지어진, 경계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언어 없는 목소리가 침묵과 함께 떠돌며, 현실과 꿈이 서로를 향해 녹아드는. 그곳은 막다른 골목이며, 배수아는 그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대신 그 골목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택했다. 이런 시도는 배수아를, 배수아의 글을 어디에 이르게 할 것인가. 예측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향하는 곳은 우리가 한 번도 닿아본 적이 없는 곳일 것 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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