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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는 '쓰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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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는 '쓰레기'다!"

[엄기호가 사랑하는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프레시안 books'는 2012년 신년호를 '내가 사랑하는 저자'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사랑하는 저자와 만났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사랑하는 저자와 만나는 기쁨을 누리길 기대합니다.

다시 마녀 사냥이 시작되고 있다. 마치 새로운 현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국의 모든 학교를 다시 뒤지고 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를 집단으로 괴롭히는 범죄가 얼마나 만연해 있으며 극심한 피해를 주고 있는지에 대한 글이 지면마다 넘쳐난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는 더할 나위없는 악마로 그려진다. 이 괴물들을 발본색원하고 처단하기 위해 학교 구석구석마다 CCTV를 달고 형사 미성년자를 12세로 낮추어 철저하게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겠다고 한다.

사냥꾼의 사회다. '일진'과 같은 가해자들은 피해자 '왕따'들을 무자비하게 사냥한다. 돈만 뺏고 폭력만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모욕을 준다. 대구 사건에서처럼 가족사진을 보며 욕을 하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가해 학생을 이번에는 어른들과 언론이 사냥한다.

우리 학교와 사회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개탄하면서 철저히 대처할 것을 주문한다. 구경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인터넷에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가해자들의 신상을 털고 낱낱이 발가벗긴다. 사냥꾼이 사냥꾼을 사냥하고, 그 사냥꾼을 다시 다른 사냥꾼이 사냥한다. "최소한 사냥꾼의 대열에 끼어 있도록 노력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냥꾼이 사냥을 그만 둘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사냥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자기만 배제되었다는 수치심과 자기만 능력이 없다는 무력감만 느낀다. 이것이 지그문트 바우만이 <모두스 비벤디>(한상석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서 말하는 사냥꾼의 사회다.

사냥꾼이 추진하는 유일한 일은 "자루를 최대한 채워 줄 만큼 큰 사냥감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숲을 돌보지 않는다. 자신들이 마구잡이로 사냥을 하는 통에 사냥감이 말라 죽고 숲이 황폐화되면 그들은 다른 숲으로 떠날 뿐이다. 바우만은 사냥꾼으로 구성된 세계에서는 유토피아를 생각할 여지가 없다고 단언한다.

어떤가. 바로 우리 학교가, 우리 사회가 그가 말하는 이 거대한 사냥터가 되지 않았는가? 아무도 학교를, 사회를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이곳이 사냥터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냥꾼'이 아니라 '정원사'이다. 정원사는 자기가 끊임없이 보살피고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에는 질서가 없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은 가꾸는 일이다. 그러나 이 정원사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우리 모두는 사냥꾼이 되어, 주로 외롭게 홀로, 아주 가끔 무리지어 사냥감을 찾아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린다.

그러나 이 사냥꾼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광기'가 아니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모두 다 어느 날 갑자기 미쳐버려서 친구를 마녀 사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바우만이 우리에게 소개해주는 개념이 바로 한나 아렌트의 '평범한 악'이다.

잘 아는 것처럼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한 아이히만의 재판을 다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역설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개인으로서의 아이히만은 유대인에게 전혀 악의가 없었으며 한 명의 살인을 지켜볼 배짱도 없는 사람이었다.

▲ <유동하는 공포>(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산책자 펴냄). ⓒ산책자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함규진 옮김, 산책자 펴냄)에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함'을 '악의 합리성'으로 밀고 나간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생각 없음'은 근대적 이성의 예외가 아니라 근대적 이성의 결과물이다. 그에 따르면 아이히만과 같은 관료들은 생각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이 있는 존재'다. 관료의 관점에서 보자면 말이다. "정해진 목표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가장 비용이 적게 들고 가장 리스크가 적은 길을 선택하도록 이성을 활용"한다. 그는 "최고의 계산가, 도구적 이성의 가장 능숙한 활용자"여야 한다.

그 결과가 아우슈비츠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우리가 깨달아야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언제든 '빅 브라더'에 의해 납치되어 처형될 수 있다는, 그런 공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우슈비츠에서 보는 것은 우리가 적당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자발적으로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통계표에 그냥 숫자 '1'로만 기억되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까지 이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공포'이다. '네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마라'가 아니라 '네 이웃을 믿지 마라'는 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좌우명이 된다. 악은 도처에 숨어 있으며, 네 이웃이 바로 악이다. 과거 학교나 도시와 같은 '시스템' 안에 있었다면 나는 성 밖의 사람과 비교하여 안전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반대다. 오히려 이제는 '거리'가 아니라 '학교'가, 성 밖이 아니라 '도시'가 폭력과 위협의 원천이 되었다. 신뢰는 붕괴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시스템을 믿지 않는다는 것, 나아가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을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왜 학교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폭력에 희생된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내던질 때마다 우리는 무력하게 이 말을 반복했다. 말을 하지 그랬냐고. 말을 했으면 들어줬을 테고, 그랬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왜 말을 하지 않았냐고 죽은 이를 원망한다.

그러나 솔직히 생각해보자. 과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말을 했으면 진지하게 들어주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심지어 죽고 난 다음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이렇게 펄펄 뛰는 것이 현실이다. 하루 앞 당겨 서둘러 방학식을 하고 그 죽음마저 은폐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총체적인 시스템에 대한 불신에 빠져 있다. 시스템 신뢰가 0인 사회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탈락에 대한 공포가 있다. 과거에 국가의 역할은 시장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빈곤>(이수영 옮김, 천지인 펴냄)에서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 국가는 잉여, 배제, 폐기에 대비해 시민들을 보호한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여기에 근거하여 시민들에게 충성과 복종을 요구할 수 있었다. 삶의 불확실성에 맞서 시민들을 보호하고 삶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이 사회가 하는 일이었다. 그 핵심에는 일자리가 있다. 노동의 안정성을 확보함으로써 미래를 더욱 확실하게 하고 삶을 기획가능하게 하는 것이 근대 사회 국가의 야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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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빈곤>(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천지인 펴냄). ⓒ천지인
그러나 지금 국가의 가장 큰 역할은 시민이 아니라 시장을 보호하는 것이다. 시장의 불확실성에 의해 폐기처분된 인간들을 효과적으로 처분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 이것이 <쓰레기가 된 삶들>(정일준 옮김, 새물결 펴냄)과 <새로운 빈곤>에서 일관되게 바우만이 주장하고 있는 근대 국가의 변모이다. 잉여를 재교육하여 노동으로 재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에게 네가 왜 쓰레기 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큰 역할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언제 내가 쓰레기 취급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왕따, 이들이야말로 쓰레기로 취급당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바우만이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이라고 '잉여'를 정의하는 것처럼 왕따 역시 '버려져도 무방한 존재니까 버려진 존재'다. 아무도 그가 정말 왕따가 되어야했는가를 따져 묻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선언할 뿐이다.

왜 그런가? 우리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바로 그가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왕따가 된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끊임없이 왕따를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에 그가 왕따로 지목'된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 쓸모없는 삶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를 왕따로 만들어 쓰레기 취급을 함으로써 지금의 체제와 그 행위에 가담한 자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닌 그가 지금 쓰레기라고 한다면, 나는 아직은 쓰레기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유례없는 공포와 불안이다. 바우만은 거의 저작 전부를 관통하여 근대성을 '유동성'이라고 정의한다. 학교와 같은 곳이 더 이상 '삶의 터전'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근대의 특징인 '유동성'에서 유래한다. 한 마디로 말해 공간에 대한 시간의 승리다.

<액체 근대>(이일수 옮김, 강 펴냄)에서 바우만이 말하는 바대로 한다면 액체 근대 시대에 지배 게임은 '더 큰 것'과 '더 작은 것' 사이의 게임이 아니라 '더 빠른 것과 더 느린 것' 사이의 게임이다. 적을 잡을 수 없는 속도를 내는 자가 지배한다. 따라서 공간에 묶인 자가 가장 큰 패배자이다.

글로벌 엘리트들은 언제나 관광객이 되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든다. 반면 패배자들은 도둑처럼 국경을 넘어야한다. 이들은 땅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땅에 묶인 자들이다. 저 이주 노동자들을 보라.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한국이라는 공간에 묶여 있다. 저 왕따들을 보라. 저들은 학급이라는 나라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교실이라는 공간에 묶여 있지 않는가? 도망갈 수도 없이.

유동성이 지배적인 삶의 양식이 되면서 당연히 사람과 사람을 묶어주는 유대 관계 자체가 유동적인 것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관계'를 갈망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양적으로는 많지만 질적으로는 얄팍하기 그지없는 관계다. 그 관계의 망이 '네트워크'다.

<공각기동대>에서 "네트는 광활하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그 네트워크를 부유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학교 폭력에 희생된 아이들도 내 옆에 있는 친구, 부모, 교사에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 보다는 밤마다 네트워크를 떠돌며 자신의 마음을 흩어 놓았으리라.

그러나 이 왕따는 한국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독립적이고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눈을 돌려 지구를 바라보자. 지구 자체가 왕따, 잉여를 생산하는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다.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 전환하면서 소비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는 모두가 다 잉여가 된다. 내가 이 사회에서 능력 있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템'이다.

노스페이스를 '득템'할 수 있는 소비력 말이다. 만일 그 소비력이 없다면 완력으로라도 빼앗아야 한다. 뺏긴 자는 억울해 할 수 없다. 그가 뺏긴 것은 뺏길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뺏긴 것 자체, 그것이 바로 뺏긴 이유가 된다. 바우만의 말을 빌린다면 왕따가 현대의 쓰레기라면 일진은 '찬미 받지 않는 쓰레기 수거인'들이다. 이들이 왕따와 아직 왕따가 아닌 존재 사이를 끊임없이 감시하며 부지런히 선을 긋는다. 이게 신자유주의 세계화라고 부르는 전 지구적 시스템의 특징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겠는가?

바우만에게 감탄하는 이유는 그의 책이 우리 삶을 직접적으로 설명해주는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지금까지 왕따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책 서너 권을 리뷰하였지만 이것을 대학생 혹은 청춘들이 왜 자신을 '잉여'라고 부르고 '병맛 만화'에 열광하는지로 돌려보더라도 대단한 현실 적합성을 보여준다.

잉여를 체계적으로 생산하고 정당화하는 사회의 논리로서의 '노동의 미학화'는 왜 우리 사회가 그토록 창의성과 창의 교육 그리고 열정와 꿈이라는 단어를 강박적으로 반복하는지를 잘 설명한다. 그게 자본이 노동을 배제하고 착취하는 도덕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우만의 책은 이처럼 앵글을 돌리면 돌릴수록 이주 노동자의, 왕따의, 청년들의 혹은 또 다른 무수한 삶의 현상태를 설명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해할 수 없는 현란하고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쉬운' 언어로 말이다.

물론 그의 글에도 맹점이 있다. 그가 말하는 근대가 누구의 근대인가?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근대의 경험은 당연하게도 서구 그리고 남성의 경험이다. 노동이 쓰레기가 되고 국가가 시민이 아니라 시장을 보호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서구의 사회 국가에 대한 경험과 역사가 전제되어 있다.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비서구 국가에서 노동은 이미 쓰레기 혹은 일회용 취급을 받지 않았던가. 브라질의 아마존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혹은 동남아시아의 거대한 성산업에 팔려간 소년소녀들 말이다. 따라서 바우만에 대한 불만을 경청해야 한다. 그것은 바우만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어떤 글을 써야할 것인지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바우만을 좋아하고 그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그의 글은 한 젊은 민중신학자가 누군가에게 한 비평의 말을 빌리면 "그의 모든 비평은 문체에 있어선 너무나 윤리적이며, 방법론에 있어선 너무나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 말과 같이 말이다.

자유방임처럼 죄 많은 것도 없다. 인간의 불행을 평상심으로 지켜보면서 '더 이상 대안이 없다'라는 주문을 외우며 양심의 가책을 달래는 것은 그 불행에 공범이라는 뜻이다. 자발적으로 혹은 태만으로 인해 인간이 이루어온,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우발적이고도 변경 가능한 사회 질서, 특히 불행에 책임이 있는 그런 종류의 질서의 속성을 은닉하거나 더 나쁘게는 부정하는 데 참여하는 사람은 위험에 처한 한 인간을 돕기를 거절했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유죄다. (<액체 근대>,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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