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시는 2010년부터 주민 참여 예산제를 도입하여 현재 부천시의회에 상정되어 있는 2012년 부천시 예산(안)은 주민 참여 예산으로 작성되었다.
주민 참여 예산은 그 자체로만 보면 시장의 고유 권한이었던 약 1조800억 원에 이르는 부천시 예산의 편성권(법적으로 예산의 편성권은 시장에게, 예산의 심의·의결권은 시의회에 나누어져있다)을 시민들과 나누겠다는 획기적인 일이다. 그런데 시민의 입장에서는 '주민 참여 예산'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고, "시장이 독점하던 권한을 시민과 나누겠다"니 좋은 일이지만 구체적으로 시민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참여해야할지 막연한 것도 사실이다.
주민 참여 예산을 알기 위해 먼저 탄생 배경부터 살짝 들여다보자.
외국에서는 참여 예산(Participatory Budget)으로 불리는 주민 참여 예산은 1988년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탄생한 제도이다. 1988년 선거에서 집권한 노동자당 시장 올리비오 두트라는 평소 "시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치보다 시민의(of the people) 정치가 더 본질적이고,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정작 시장이 되어 보니 (전임 시장이 선거 기간에 공무원의 임금을 대폭 인상해서) 신임 시장이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전체 예산의 2퍼센트밖에 안 되는 상황을 맞는다. 그러니 "쓸데는 많고, 규모는 작은 예산을 어떻게 하나?" 고민 끝에 찾아낸 (너무나 당연하지만 아무도 안하는) 묘책이 바로 이것이었다. "한정된 예산을 어디에 쓸지 시민들에게 물어보고, 시민들이 선택하게 하자!"
그래서 시민들이 참여한 왁자지껄한 토론회가 곳곳에서 개최되고, 때로는 격렬한 논쟁과 대립이 생기기도 하지만 적은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시민들의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획기적으로 높이게 된다. 그러니 행정의 비효율, 관료주의, 행정 낭비, 행정 독점에 환멸을 느끼던 많은 사람들이 포르토 알레그레의 사례에 환호하게 되고, 참여 예산은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고, 유엔에 의해 "예산을 인간 개발에 우선순위를 두는 방향으로 재조정하고, 행정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가장 혁신적인 방법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 참여 예산이 우리나라에는 2003년 '주민 참여 예산'이라는 이름으로 광주광역시 북구에서 처음 도입되고, 2004년 울산 동구, 울산 북구로 확산되더니 2010년에는 102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된다. 2011년 3월에는 국회에서 '지방재정법'이 개정되어 올해 9월부터는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민 참여 예산제가 의무화되었다.
이것 역시 정말 한국적인(?) 상황이다. 주민 참여 예산제는 매우 혁신적인 제도로, 전문가들은 2010년 주민 참여 예산이 시행되는 102개 지방자치단체 중 실질적으로 주민 참여 예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4~5곳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선진국에서 진행되는 참여 예산은 조례보다는 정책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조례가 없으면 정책을 시행할 수 없다고 하니 주민 참여 예산제가 새롭게 도입되는 지방자치단체마다 (시행해 보지도 않고, 눈 넘어 사례나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는) 주민 참여 예산 조례(안)의 몇몇 문구를 놓고 행정, 시의회, 시민 사회 간에 날선 공방이 이루어지기 일쑤이다. 그러다보니 정작 거버넌스의 주된 수단인 주민 참여 예산제가 초기부터 갈등의 소재로 작동하는 것이다.
사실 주민 참여 예산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권한의 일부를 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시장의 강력한 의지,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시민, 건강한 토론 문화, 자신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집단적인 조절 능력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요구된다. 나처럼 주민 참여 예산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사람도 생활 속에서 느끼는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다양한 아이디어가 지방자치단체 예산에 실질적으로 반영될 경우 시민들의 삶의 질(Quality of Life)이 개선될 것이라는 열려있는 가능성에 집중할 뿐 무관심이 팽배한 사회 문화 속에서 주민 참여 예산의 성공 여부는 아직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눈에 훑어보는 부천시 주민 참여 예산
2010년 10월 부천시 주민 참여 예산제 운영 조례가 제정되고, 2011년 3월말 37개 동에 2729명(동별 약 74명)의 동 주민회의 구성, 4월 8일 연구회 구성, 4월 19일 100명(비영리민간 단체에서 추천된 26명, 37개 동에서 각 2명씩 74명)의 시민위원회 구성, 6월 2일 시민위원회 6개 분과(자치행정, 경제문화, 사회복지, 도시개발, 환경청소, 교통도로)가 구성되면서 주민 참여 예산제의 기본 조직이 완비되었다.
그 밖에 시청 1층 로비에 주민 참여 예산 시민 토론방이 만들어져 부천시 예산에 대한 정보를 누구나 자유롭게 제공받을 수 있고, 부천시 재정 홈페이지에는 부천시 재정 정보, 시민 제안(상상무한도전), 예산 낭비 신고 등을 통해 홈페이지 상에서 예산에 대한 시민 참여의 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공무원, 시민위원회 위원, 동 주민회의 위원을 대상으로 한 주민 참여 예산 교육이 10여 차례 개최되었다.
ⓒ김기현 |
이 과정을 그림으로 살펴보면, 3월말 구성된 동 주민 회의는 8월 중순까지 동 주민 편익과 관련된 사업(5000만 원~1억 원)을 선정하고, 부천시 예산 전반과 우선순위에 대한 의견을 제기한다. 4월 중순 구성된 시민위원회는 10월까지 동에서 제기된 주민 편익 사업과 홈페이지 등을 통해 시민들이 제안한 예산안에 대하여 조정(특별한 낭비 요인이 없는 한 동 주민회의 의견을 존중)하고, 각 분과위원회별로 쟁점이 되는 예산에 대하여 시민 의견을 수렴한다.
이렇게 수렴되고, 모아진 예산안을 10월말 시민위원회에서 선정하고 나면 11월초 시민위원회 대표들과 시 집행부가 참여하는 참여예산조정위원회에서 확정된다. 이렇게 확정된 부천시 2012년 예산안은 11월 20일경 부천시의회에 상정되고, 주민 참여 예산의 전 과정은 연구회에 의해 평가되어 그 결과가 2012년 활동에 반영된다.
마을 자치의 가능성을 살짝 엿보다
부천시 주민 참여 예산제의 가장 큰 특징은 '동 주민 회의'를 100명으로 조직하고, 참가인원이 100명을 넘을 경우 추첨으로 선출하도록 한 점이다. 이것은 참여를 원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개방하자는 시민 사회의 입장과 그래도 일정 규모의 조직되고, 공식적인 구조가 필요하다는 행정의 입장이 타협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각 동별 100명으로 구성되는 동 주민 회의는 정치적 오해에 대한 우려를 받아들여 1년 활동 후 해산하는 '비상설 회의체'로 운영하기로 했다.
사실 동 주민 회의는 주민 참여 예산의 꽃이다. 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실생활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이 정책과 예산에 반영되는 것이 주민 참여 예산의 목적인데 그러한 목적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의 터전인 동 단위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하지만 부천시 37개 동에서 주민 회의가 조직되고, 운영된 결과는 천차만별이었다.
동별 평균 74명 정도로 구성된 주민 회의는 주민자치위원회, 국민운동단체 등 기존 조직 회원이 약 70퍼센트, 시민 단체, 일반 시민 등 새로운 참가자가 약 30퍼센트 정도로 참여하였는데 기존 주민자치위원회 회의와 같이 틀에 박히고 딱딱하게 진행된 곳도 있었지만 동네한바퀴 등 새로운 참여 방식을 도입하고, 소수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자유로운 토론이 진행된 곳도 상당수 있었다.
많은 동에서 동 주민 회의 의장과 부의장, 시민위원회에 참가할 시민위원 2인을 민주적으로 선출하고, 5000만~1억 원 범위의 주민 편익 사업이 찬반 토론과 직접 투표로 선정되었다. 몇몇 동에서는 먼저 5~6개 과제를 추린 후, 우선순위에 대한 의견과 시민 의견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스티커 붙이기 등으로 진행하기도 하였다.
▲ 스티커 투표로 주민 편익 사업을 선정하는 시민들. ⓒ김기현 |
내가 참여했던 중1동의 경우 주민 회의 의장과 부의장은 주민자치위원 중에서 선정되었지만 시민위원으로 3명이 추천되어 자기 소개와 소신을 밝히고, 직접 투표로 2명을 선출하였다. 주민회의 위원들은 토요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우리 동네 문제를 모니터링하고, 개선 요구 사항을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반상회 등을 통하여 주민들의 의견을 제안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1동 주민 편익 사업으로 최종 상정된 것이 걷기 좋고, 쾌적한 길을 만들기 위한 '아파트 사잇길 생태 도로 만들기'와 아파트 단지 앞 도로에 노점상이 상주하여 사고가 빈발한 2곳의 아파트 단지 앞에 '안전을 위한 CCTV와 펜스 설치'였다. 이 두개의 제안을 놓고, 제안한 시민들이 제안 설명과 질의 응답을 하고, 전체 토론을 통해 찬반 의견을 나누고, 스티커 투표를 통해 최종 결정('아파트 사잇길 생태 도로 만들기')되는 과정은 모두가 승복하고, 격려하는 참여의 마당이었다. 참고로 스티커 투표는 굳이 (지나치게 시간이 소요되고, 딱딱한) 비밀 투표를 할 필요는 없고, 거수 투표보다는 약간의 익명성이 보장되면서 재미도 있고, 활동적이라는 판단으로 도입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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