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미군 사령관은 1월 4일 주둔군 사령관의 책임과 권한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의 직접 목적은 지난 연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 입의)의 위상을 밝히는 것인데, 16개월 전 진주 당시의 예상보다 점령이 길어져 3년차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점령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의미도 있는 것이었다. 성명 앞부분에서 조선 독립을 지원하려는 미국 입장을 밝힌 후 사령관과 입법의원의 관계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조선과 연합국에 준 공약을 이행하기 위하여 미국 정부는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켜 그 주둔 사령관이 광범위의 권리를 가지고 미국 정부를 대행하도록 한 것이다.
사령관은 미 주둔군을 통솔하는 책임 외에 통일된 조선에 임시 정부를 세우기까지 미 점령 지역에 행정권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최고 군사 급 행정 책임자인 사령관은 군정장관을 보좌관으로 임명하여 민정을 통괄케 하였다.
무지로 인함인지 혹은 민중을 기만하려는 악질의 의도인지 모르나 어떤 분자는
(1) 미국은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을 찬동하여 맹활동을 하고 있다.
(2)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이 단독 정권의 전초적인 한 개의 완전 독립 기관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상 두 가지의 억측은 전연 근거가 없는 부정확하고 위험을 초래할 성질의 것으로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킨 미국과 기타 연합국이 공약한 근본방침에 상반되는 바이다.
(…) 입법의원은 임시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중대한 정치, 경제, 사회적 개혁의 법규를 작성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명백히 하여야 할 것은 입법의원은 정부 내의 정부도 아니요 남조선을 통치하는 기관도 아니다. 그 기관의 명칭 자체가 명시하는 바와 같이 과도 입법의원으로 모스크바 협정에 의하여 임시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입법의 권리를 가지고 행정 부문을 통하여 시행할 법규를 제정하며 민의에 의하여 남조선 정부를 운영해 가는 데 행정 부문을 보좌하는 임무를 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7년 1월 5일자)
사령관이 점령 지역에서 "최고 군사 급 행정 책임자"이며 입법의원의 임무는 "민의에 의하여 남조선 정부를 운영해 가는데 행정 부문을 보좌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입법의원이 "보좌"하는 대상은? 물론 주둔군 사령관이다.
이 성명은 항간의 억측 두 가지를 부정한다고 했는데, 그중 (1)은 좌익 측 선전 내용이다. 모스크바 3상 결정에 입각한 독립은 좌익뿐 아니라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모든 일반인이 바라는 길이었다. 그런데 한민당(한국민주당)과 독촉(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극우파에서 얼마 전부터 3상 결정 수정과 얄타 체제 파괴를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 순조로운 국제 협력의 길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의구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의구심에 미군정의 갖가지 실정에 대한 실망이 겹쳐져 '미국의 의도'에 대한 의심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고, 입법의원 설치의 조급한 방식이 이 의심을 더욱 키워주었다. 미군정에 대항하는 '신전술'을 택한 박헌영 계 좌익은 이 의심을 선전 재료로 삼아 입법의원 보이콧 작전을 폈다. 하지가 지적한 억측 (1)은 남로당과 민전 등 박헌영 계 좌익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런데 억측 (2)의 내용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하나는 (A) 입법의원이 완전 독립 기관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B) 그것이 단독 정권 수립의 전초 단계라는 것이다. (A)는 한민당과 독촉 등 입법의원에서 다수를 점한 극우파의 주장이었고, (B)는 극우파와 극좌파 양쪽에 아울러 퍼져 있던 생각이었다.
이 성명에 대한 민전(<서울신문> 1947년 1월 7일자), 민통(<경향신문> 1947년 1월 7일자)과 한민당(<동아일보> 1947년 1월 11일자)의 담화문이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보이는데, 민전은 극좌파, 민통(민족통일총본부)과 한민당은 극우파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다만 한민당의 담화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입법의원에서 행정권의 이양을 결의한 데 대하여 하지 중장은 입의는 군정의 보좌 기관이며 임정 수립까지는 행정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이양하겠다고 성명하였다. 하지 중장은 이에 작년 10월 행정권의 이양을 언명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성명을 함은 일종의 식언이며 2000만 남조선 민중의 의사를 대표하는 입법의원의 결의를 무시함은 민권 무시요 군정의 연장밖에는 될 것이 없다."
하지의 "식언"이란 과격한 말을 쓴 점이 눈에 띄는 것이다. 하지가 지적하는 바 입법의원을 "완전 독립 기구"로 관점에서 한민당은 하지가 "행정권의 이양"을 약속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도 물론 중요하지만, 하지를 공박하는 데 이렇게 모욕적인 표현을 쓴다는 사실이 놀랍다. 입법의원 선거의 일부 무효화와 관선의원 임명에서 중도파의 대거 등용 등 한민당의 요구가 거절당한 데 대한 분노가 엿보인다.
단순한 분노만이 아니라 하지의 권한이 어떤 한계를 가진 것인지 극우파가 꿰뚫어보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 이승만은 미국에서 '반탁-모스크바 결정 폐기-단정' 선전을 넘어 '반 하지-반 군정'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우남 이승만 연구>(정병준 지음, 돌베개 펴냄), 632~635쪽) 극우파가 힘이 미약할 때는 하지에게 업혀서 힘을 키웠지만, 전국적 소요 사태 앞에서도 경찰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는 사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제 하지는 현상 유지를 위해서도 극우파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승만의 사조직 성격을 가진 민통의 담화에도 미군까지 포함한 군정을 비하, 비난하는 대목이 보인다.
"하지 중장의 성명에 의하면 미소공동위원회가 조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하였다. 미소 양측이 이렇게 주장하면서 무료히 1년을 안연히 허송할 때에 조선 인민은 일제 시대 이상의 불안과 도탄 속에서 신음하였다. 미국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를 주장하고 소련이 또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를 주장할 때에 민주주의의 해석까지 달라졌고 또한 공위는 기한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우리들의 총의를 끄는 바이다. 그들은 흥미를 가지고 우리를 대하기 때문에 그 기한이 연장될수록 그 흥미가 연장될 것이로되 죽느냐 사느냐에 당면한 우리는 제3자에게 흥미를 제공하기에는 너무 현실이 절박하여 있다."
오히려 민전 담화에 하지의 입장을 옹호하는 대목이 보인다.
"입의의 단독 정부화가 중장의 언명대로 미국의 의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래전부터 단독 정부 수립을 획책해 오던 일체 반동 정객들을 중심으로 해서 실현된 것임은 엄폐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장은 입의의 단독 정부화의 억측을 공격하기 전에 일체의 집요한 단독 정부 실현의 음모를 공격 분쇄해야 할 것이다."
입법의원의 위상에 대한 하지의 주장에는 나이브하달까, 구조적인 약점이 있다. 권한과 책임은 함께 가야 하는 것인데, 하지는 입법의원에게 아무 권한도 부여하지 않으면서 "민의에 의하여 남조선 정부를 운영해 가는 데 행정 부문을 보좌하는 임무"만을 요구한 것이다.
입법의원의 어떤 결정사항도 군정장관과 사령관의 승인 없이는 효과를 갖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우여곡절 끝에 1947년 7월 2일 입법의원을 통과하고도 군정장관의 서명을 받지 못해 사문화하고 만다. (<우남 김규식 생애와 사상 1 : 항일 독립 투쟁과 좌우 합작>(강만길·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276-281쪽)
요컨대 하지는 입법의원이 "민의에 의하여" 군정을 보좌함으로써 미군정이 민의를 존중했다는 '면피' 역할을 해주기 바라면서 민의에 구속되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좌익 탄압과 소요 사태 속에 강행된 선거가 민의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하는 문제에도 개의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한민당 등 극우 세력은 엉터리 선거 덕분에 잡은 입법의원의 우세를 자기네 세력 근거로 확보하기 위해 입법의원에의 "행정권 이양"을 고집한 것이다.
입법의원을 이끄는 역할을 맡은 김규식은 그 위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우사(김규식)는 (1947년 1월 19일 브라운 소장을 만난 자리에서) 하지의 1월 11일자 성명이 마치 입법의원이 군정의 종속기관인 것 같은 인상을 주므로 그 성격을 분명히 해줄 것과 미소공위에서 발언권을 보장할 것, 그리고 탁치 문제는 임정이 수립된 다음 논의될 문제라는 것 등을 다시 성명으로 발표해줄 것을 요구했다. 우사는 이와 같은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여 군정 측에 전달했는데, 입법의원 비서처는 1월 30일 우사의 편지 전문을 공개했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1>, 262쪽)
하지가 미소공위 속개에 관해 치스챠코프 소련군 사령관과 주고받은 서한 내용을 공개한 1월 11일자 발표문은 1월 12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는데 그 기사에는 입법의원의 위상과 관계된 내용이 없다. 1월 6일자 성명서와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기사에서는 생략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비서처에서 1월 30일 공개한 편지 내용에서는 아래 대목이 입법의원의 위상과 관련된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1월 31일자)
"입법기관은 군정청 행정부면 제반 사의(事宜)를 보좌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의견을 달리한 것 같다. 생각건대 보좌라는 말보다 차라리 협조한다는 말을 썼더라면 더 적절하였을 것 같다. 여하간 민주정체의 입법 사법 급 행정의 3기관은 이 3기관이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다 같이 봉사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개별적으로 또는 전반적으로 3자가 상호협력 보좌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보좌라는 말은 종속적인 의미에서 보좌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협력의 의미를 말한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하지가 이렇게 발표하기 바란다고 김규식이 써준 것이다. 하지에게 직접 전하지 못하고 "군정 측에 전달"했고, 열흘이 지난 후 보낸 쪽에서 공개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지가 입법의원의 위상을 이렇게 본다고 밝혀줄 것을 김규식은 입법의원 의장 입장에서 요청했는데 하지는 그에 따르지 않았다. 김규식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힘으로써 하지가 어떻게 보든 자신은 입법의원의 위상을 이렇게 본다고 공표한 것이다.
김규식은 입법의원이 미군정을 "보좌"하는 미군정의 부속기구가 아니라 미군정과 "협조"하는 조선인의 기구로 본 것이다. 아무리 미군정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기구라 하더라도 '조선인의 기구'라는 사실 자체로 인해 미군정에 종속되지 않는 측면을 가진 것으로 김규식은 본 것이다.
하지는 이것도 입법의원을 "완전 독립 기구"로 보는, 미군정과 별개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김규식의 권유를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명색이 '입법기구'인데, 사령관과 군정장관으로부터 독립된 아무런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보좌'의 기능만 요구하다니, 하지의 민주주의 이해는 '군대 민주주의'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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