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담 : "오랫동안 해외 생활에서 국내 사정을 잘 모르고 있다가 지난 1년 동안의 국내 생활에서 체험하고 느낀 바를 간단히 요약해서 말한다면, 40년간의 노예 생활에서 전례 없는 심각한 민족적 고난과 비애를 경험한 우리 민족이 아직도 민족적 자각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남의 덕분에 무엇이 되리라고 헛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지난 1년 동안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중한 시간만 허송한 것이다. 지금 세계의 각 대국들은 약소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들을 원조 육성하려고 하는 고마운 뜻을 보이고 있으나 우리 민족은 불행하게도 그 뜻과 반대의 것, 즉 괴로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보라 단일 민족인 우리가 천만요외로 38선이란 압축대로 인하여 질식하고 있지 않는가? 북조선에서 남조선에 대한 정책을 본다든지 또 현재 남조선에서 북조선에 대한 정책을 보라. 비근한 예를 들면 최근 법령 127호로 발포된 대북 조선 미곡 수출 금지령 같은 것은 실로 외국에 대한 법령과 같은 것이다.
이남에 있는 자제가 이북에 있는 부모를 공양할 수 없게 되니 부모와 형제가 아사해도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어야 할 것이란 말인가? 우리는 새해를 맞아서 국제 공약에서 해결해 줄 것만을 고대치 말고 우리의 힘으로 해야 되겠다는 자각을 다시 새롭게 해야 될 것이다. 우리는 거족적인 자각이 있은 후에라야 우리에게 서광이 비쳐 올 것이라는 것을 좀 더 통절히 느껴야 한다." (<조선일보> 1946년 1월 1일자)
김규식 담 : "(…) 미소양군의 조선에 대한 분할 통치는 실제에 있어서 우리의 국토를 소위 38선으로 분단하였고 정치·경제·문화 각 방면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통일적 생활을 여지없이 파괴하였고 우리 민족 내부에 직접 간접으로 반영되는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차단은 더욱 더 심각화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남북에 있어서 친일파, 민족반역분자, 악질모리배 등의 발호는 심하여 민생은 극도의 도탄에 빠지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는 비애국자의 진영으로서 계획적으로 남한에 있어서 공전의 소요사건을 양출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국제적 급 국내적 정세 하에서 과거 1년간 우리 민족 내부의 정치 운동은 자주적 민족 입장을 망각한 편파한 노선을 걸어오게 되었습니다. 즉, 일부 노선은 국제에 있어서 친소 급 반미의 행동을 취하는 동시에 국내에 있어서 자기네의 독립 정권의 수립을 기도하였다고 평하는 이가 있으며 또 일부 노선은 국제에 있어서 친미반소의 행동을 취하는 동시에 국내에 있어서 일부 독점 정권의 수립을 몽상한다고 비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 훈련과 각성이 부족한 우리 민중은 이들 편파한 지도하에서 서로 편을 가르고 민족상잔의 투쟁을 계속하여 왔습니다. 이 두 노선은 그 주관적 의도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적 입장을 망각한 것이며 민족적 통일 단결을 파괴하는 것이며 좌우 양익의 협조에 의한 민주주의 임시 정부의 수립을 저지하는 것이며 미소 양국의 조선 문제에 관한 진정한 협조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편파한 노선이 있다면 이를 철저히 청산하는 데서 비로소 민족적 자주 독립을 목표로 한 민주 단결 노선을 확립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금일 우익이 좌익을 배척하거나 좌익이 우익을 공격하는 것은 일종 변태적 행동이며 독립을 지연시키는 민족적 범죄 행위가 될 것입니다. 나는 몸이 비록 우익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좌익 동지들과 합작할 필요를 느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합작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오직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좌우합작위원회에 임하였으며 또 남북 통일의 임시 정부 수립이 실현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만 우리 민족 각층 각계의 강고한 민주 단결이 형성되는 날 우리의 완전한 독립과 진정한 해방이 도래할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신년의 새로운 결심과 용기로써 다 같이 분투하기를 바랍니다." (<조선일보> 1947년 1월 4일자)
김구와 김규식 두 사람의 신년사를 비교해 본다. 김규식의 신년사는 좌우 합작에 대한 구체적 주장을 담고 있다. 반면 김구의 신년사는 훨씬 짧고 민족주의의 원론적 입장만을 보여준다. 김구가 현실 정치에 힘 있는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김구가 어떤 비서진의 보좌를 받고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환국 당시부터 연설문을 써드리고 조사 활동을 벌이는 등 장준하의 역할이 컸는데, 장준하는 이 무렵 김구 곁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광복군 지대장이던 이범석이 1946년 6월 귀국, 군정청의 후원 아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조직하면서 장준하를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저는 경교장 일에 바쁘게 매인 몸입니다. 주석을 모시고 말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다른 사람이라도 할 수가 있지. 그러나 이 일은 장 동지 같은 사람이 없이는 안 돼. 내가 백범 선생께 말씀드릴 테니 이리로 오도록 하시오. 주석께서도 쾌히 승낙하실 게요."
이범석에게서 물러나온 장준하는 한동안 고뇌에 빠졌다. 자기로서는 족청과 같은 사회단체가 체질에 맞고 그와 같이 일사불란한 일에 신명을 바치고 싶었다. 경교장의 그 정치 싸움과 당략에 영일이 없는 분위기가 도무지 역겨워 견딜 수가 없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김구에게서 몸을 빼 나오느냐는 것이었다.
(…) 마침내 장준하는 김구 앞에 가서 고뇌를 털어놓았다. 그런 장준하의 성품과 속사정을 모를 리 없는 김구는 즉석에서 양해한다.
"철기(이범석)가 장 목사를 탐내는 거야 당연하지. 본디 중경에서도 임정의 정치판이 싫다고 뛰쳐나갔다가 서안으로 철기를 따라가지 않았나. 가서 열심히 도와주시오."
이렇게 해서 경교장을 나온 장준하는 30세가 되는 1947년에 민족청년단의 교무처장직을 맡는다. 그러나 이 또한 오래 가지는 못한다. 족청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단장 이범석은 지난날 광복군의 서안 지대장 이범석 장군이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사이엔가 그에게서도 한 정파의 영수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언행에서는 자꾸 계략과 술수가 비쳐 나오는 것만 같았다.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펴냄), 225~226쪽)
장준하가 경교장 떠난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보지 못했으나 경교장의 "정치 싸움과 당략에 영일이 없는" 분위기는 대충 짐작이 간다. 귀국한 지 몇 주일 안 되어 김원봉, 성주식 등 임정 요인 중 비주류가 이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잔류파의 행태도 장준하에게 그리 고무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당이 한독당과 합당한 뒤 안재홍이 한독당 토박이들의 이기적 독단에 불만을 표한 일이 있는데(<민세 안재홍 선집 2>, 438~440쪽), 그것이 청년 장준하의 눈에 어떻게 보였겠는가.
무엇보다 신익희의 행보가 장준하의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신익희는 중경에 있을 때 내무부장 자리를 이용해 '경위대'란 이름으로 자기 세력을 키우려 획책함으로써 장준하 등의 분노를 샀던 인물이다(<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 166~168쪽). 그런 신익희가 1946년 6월부터는 독촉국민회를 통해 이승만과 밀착해 있었다. 후에 신익희가 이승만에 대항하는 정치 세력을 규합하려고 획책할 때 유림이 그를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한 사람"으로 몰아붙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1946년 8월 2일자 일기). 몇 주일 전 김구가 담화문에서 "모 신문에서 나를 해 신문 고문이라고 선전하는 것"에 반박한 것도(1946년 11월 23일자 일기) <자유신문> 사장이 된 신익희와 거리를 두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장준하는 민족주의 진영의 뛰어난 인재였다. 그런데 김구의 1947년 신년사는 이미 장준하의 작품이 아닌 느낌을 준다. 그런 참모를 왜 놓쳤을까. 김구 자신의 문제와 주변 조건의 문제가 각각 어떤 비중이었는지 명쾌하게 판단할 근거는 찾지 못했지만, 그런 참모를 놓친다는 사실 자체는 김구의 정치력 퇴화를 보여준다.
1월 1일자 <조선일보>에는 새해를 맞는 각 당의 입장도 실려 있다. 한국민주당(한민당) 담화는 이런 내용이었다.
한민당 함상훈 담 : "원래 38선의 설정은 1945년 2월 얄타 협정에서 미소 양군이 일본군을 항복시키기 위한 작전적 필요로써 그 군사적 담당 구역을 작정한 데 불과하였거니와 그 후 1945년 12월 막부 삼상 결정에 의하여 소련의 발언권이 극도로 강화하였다. 소련은 조선의 독립을 규정한 카이로 선언에 참가한 나라도 아니요 포츠담 회담에 직접 참가하던 국가도 아니다. 추후 포츠담 선언에 참가하여 일본에 선전함으로써 조선의 독립도 동의한 나라이거니와 소련이 최초부터 조선에 호의를 가졌던 미·영·중에다 비하면 조선으로서는 한 걸음 먼 인연을 가졌다고 않을 수 없다. 실제 일본과 전쟁한 일수로 보더라도 수삼 일에 불과했던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미·영·중이 소련으로 하여금 미소를 대등하게 발언권을 인정한 것은 착각이라 않을 수 없다. 과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은 신탁반대자를 임정 수립하는 협의회에 참가치 말게 하자 주장하였고 그것이 불용되매 귀환하고 말았다.
금후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는 기약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미소는 삼상 결정의 해석에 대하여 의견의 상위를 본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사 미소공위가 속개된다 할지라도 삼상 결정에 대한 해석 상위, 정부에 참가시킬 정당 급 단체의 의견 상위 등으로 원만한 해결을 볼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선의 독립은 미·영·소 삼상 결정의 신탁 조항에 관한 수정과 얄타 협정의 파기가 없이는 완전을 기하기 난하며 38선의 철폐와 남북의 통일도 가능할 것이다. 나는 삼상 결정에 있는 신탁 통치를 찬성하는 여부를 인민 투표에 문하여 결정하는 시기가 있을 것을 예상한다. 그리하여 즉시 독립을 희망하는 민의가 승리하면 그 결과에 의하여 삼상 결정이 수정되고 남북을 통한 통일정부가 수립될 날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한민당은 3상 결정의 수정과 얄타 협정 파기를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승리에 대한 소련의 공헌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독일과 일본 두 적국 중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중심 역할을 맡은 나라였다. 그래서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유지하고 있었고, 일본 문제를 다루는 카이로 회담 대신 그 며칠 후의 테헤란 회담에만 참석했던 것이다. 독일 항복 후 일정기간 후에 일본과의 전쟁에도 참여하기로 다른 연합국들과 약속했고, 그 약속대로 참전했는데, 그 며칠 후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려놓은 채 카이로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고 일본과의 전쟁 기간이 짧았다는 이유로 소련 입장을 무시하자는 한민당 주장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격이다. 대전 승리의 주역이 미국과 소련 두 나라라는 것은 전 세계인의 상식이었다. 미국만을 받들며 이 상식에 역행하는 한민당의 주장은 조선 독립이 국제 협력을 통해 이뤄질 길을 틀어막아 분단 건국에 공헌했다.
한국독립당(한독당)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서는 이런 담화가 나왔다. 남로당 담화는 좌익의 일반적 입장이 되풀이된 것이고, 한독당 담화는 김구의 신년사와 마찬가지로 원론적 민족주의 입장만 밝힐 뿐, 현실 문제를 구체화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준다.
한독당 엄우룡 담 : "한민족의 완전 해방과 완전 자주 독립을 중심으로 민족 통일은 한민족의 절대적 임무이다. 이 민족적 임무를 위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달성하여야 할 것이다.
국제적 제약으로 부득이 38선이란 철벽이 있으나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 스스로가 장벽을 지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 국제적 장벽을 우리 민족의 일치단결로써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민족적 일치단결이란 결코 38 이남만으로나 38 이북만으로의 의미로 인식하던지 또 인식할 수도 없는 일이요 남북의 완전통일을 말하는 것이다.
남북 통일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모든 개인의 주의 사상을 떠나 또는 정당 정파의 이해를 떠나 전 민족적 이해에서 소이를 버리고 대동하여야 할 것이다. 쓸데없는 감정론이나 과거의 공죄론은 절대의 금물이요 오직 독립 전취와 국가 완성을 위하여 일체의 자아를 방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신봉하는 정치 이념이나 주의주장도 모두 독립 국가 완성이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것은 이론보다도 세계적 현실로나 우리의 지나간 산 경험으로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슬로건으로 급속히 남북이 회동하여 의견을 소통하고 호양화협(互讓和協)하면 반드시 민족 통일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감정을 초월하자.
2) 정치적 이념이나 주의주장을 잠시 일소하자.
3) 정치적 방략보다는 민족적 양심을 가지자."
남로당 김계림 담 :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행정, 경제, 교통 등 전반에 긍하여 일원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지 않고서는 38선은 철폐될 수 없고 진실한 남북 통일은 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38선을 폐하고 남북을 통일하는 의미에서도 남조선의 군정의 강화 내지 연장을 재래하는 입법의원과 같은 일체의 정치적 기도에 대해서 절대로 반대하는 바이다.
더구나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의 음모와 같은 것은 영구히 남북을 양단하고 실질에 있어서 38선을 견지하려는 배족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따라서 연합국은 이 결정을 완전히 신속히 이행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다시 요약해 말하면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당과 사회 단체의 확대 강화에 의하여 또 그것을 기초로 하여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여야만 남북통일은 완전히 될 수 있고 따라서 38선 문제도 자연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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