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프레시안>에 기고한 한 활동가의 말처럼 '역사적인 순간'이다. 이토록 많은 성소수자들이 입법 기관을 점거하고 '법' 앞에 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활동가의 말처럼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라'는 명령이기 때문에 그 명령에 거스르기 위해서는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 그것은 법 이전의 삶 혹은 법 바깥의 삶을 말한다. 서구나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한국에서 성소수자는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삶이었다. 군대를 제외하고는 법에 의해 처벌받지도, 인정받지도 않은 삶이다. 규정되지 않은 삶. 어찌 보면 이것은 가장 자유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출발했을 때 '꼰대' 중에서 몇몇은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괜히 인권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통에 사는 게 도리어 불편해졌다고 말이다.
이들이 법 앞에 섰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왜 그런가? 서울시의 학생 인권 조례 때문이다. 위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 청원의 형식으로 아래로부터 준비되어 겨우겨우 법의 문턱까지 온 학생 인권 조례에서 성소수자들과 관련된 조항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의 반대 때문에 삭제될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학교에서 동성애를 허용하고 권장하라는 말이냐는 말로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다. 시의원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문자 폭탄을 돌리는 덕분에 몇몇 우호적이던 시의원들조차도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법 앞에 집단적으로 섰다. 역사상 처음으로 말이다.
진부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성(sexuality)이 이렇게 정치적인 때가 있었던가? 좀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부시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동성애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른바 낙태) 문제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간당간당하던 그는 이 두 문제를 들고 나와 보수주의자들을 결집시켰고 재선에 성공했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도 걸핏하면 동성애 인권과 관련된 논란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로 쳐다보기조차 싫어하는 바티칸과 이슬람 국가들이 연대하여 결혼의 신성함을 외친다.
그러다 보니 진보주의자들의 일각에서는 '짜증'을 내는 경우도 많다. 지금 양극화와 실업 그리고 경제 위기와 같은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들이 산적한 이때에 이런 '사소한' 성 문제에 걸려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이 화가 나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이 <프레시안>에도 한 노동 운동가가 진보 정당에서 주로 다루는 문제가 노동 문제가 아니라 동성애자의 인권 문제와 같은 것이라고 짜증을 낸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를 먼저 풀기 위해서 이 문제는 일단 뒤로 제치고 나가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번 서울시 학생 인권 조례도 그랬다. 이 문제 때문에 진도가 안 나갈 것을 알고 준비한 측에서 미리 빼기도 했다. 그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일단 학생 인권이 너무 중요하니 통과시키고 보자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반성'하고 번복하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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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
마르크스는 증기 기관차에서 자본주의가 나왔다고 보았지만 저자 페데리치는 오히려 마녀 사냥과 식민지의 노예제로부터 자본주의가 태동했다고 반박한다. 여성과 노예에 대한 착취가 없었다면 근대 (남성) 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는 태어나지도 못했다. 그리고 나아가 이것은 자본주의 초창기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내장된 만성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란 노동의 착취에 근거한 체제이다.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노동의 재생산이다. 집에서 밥 먹고 똥 싸고 쉬고 섹스하고 자식을 낳고 하는 것이 노동의 재생산이다. 이 노동의 재생산을 가장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필요에 따라 인구를 늘이거나 줄여야 했다.
종교 개혁가 루터는 여성이 인류를 늘이는데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 '여성이 온갖 단점이 있음에도 그 단점을 만회하는 단 하나의 덕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자궁을 가지고 출산을 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기 위해서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가장 원초적인 '기구'인 여성의 자궁을 통제해야했다.
저자는 16~17세기에 유럽에서 자행된 마녀 사냥을 이런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지금까지 이 시기의 마녀 사냥이란 사라져가는 중세의 마지막 반동적 발악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시기의 마녀 사냥은 오히려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자본의 '시원적 축적'이라고 말한다.
노동력의 원천인 출산을 통제하기 위해 모든 형태의 피임과 출산과 무관한 성행위를 악마시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마녀 사냥인 것이다. 일례로 1556년 프랑스 국왕은 여성은 임신할 때마다 등록해야 하고 비밀리에 출산하였다가 아이가 세례 전에 죽게 되면 산모를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중세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러저러한 약초를 사용해 낙태를 할 수도 있었다. 이런 대다수의 지식은 여성들 내부에서 공유되고 전승되었다. 때로는 극심한 경제적 가난에 의해 결혼을 미루거나 여성들끼리 모여 사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재생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동자의 재생산은 가족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터와 공유지에서 집단적으로 일어났다. 여성의 노동 또한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의 분할을 따르지 않았다. 모두가 생산 노동에 종사하였고 종종 여성의 노동에 의존하여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시원적 축적과 더불어 사라졌다. 토지 사유화와 공유지의 파괴를 통해 여성들의 생산 노동의 물적인 토대가 급속히 사라졌다. (물론 책을 보면 이 과정에서의 농민들과 여성들의 필사적인 투쟁이 있었다.) 공유지에 대한 공격은 단지 생계 수단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들이 가진 모든 형태의 집단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놀이와 축제 등과 같은 집단 유희가 불법화되었다. 여가 시간을 좀 더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도록 설교되었다. 노동 인구 재생산이 탈사회화 탈집단화된 것이다.
그 결과 여성들은 집안으로 '유폐'되었고 남성들의 재산이 되어갔다. 여성은 남성 노동자가 상실한 토지의 대체물이 되었다. 시장에 대한 대응물, 사회 관계의 사유화를 위한 도구, 자본주의적 규율과 가부장적 지배의 보급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족이 등장하였다. 여성의 노동은 재생산 노동으로 급속히 축소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 내부를 성별에 의해 성공적으로 분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 계급은 여성을 탄압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훨씬 효과적으로 억눌렀다. 이미 토지를 빼앗겨 빈곤해지고 범죄자로 몰린 남성들이 자신의 불행을 거세의 힘을 가진 마녀의 탓으로 돌리게 했다. 여성의 자궁은 국가와 남성이 지배하는 공공영역이 되었고 출산은 자본주의의 축적이라는 목적에 직접적으로 봉사하기 된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은 출산 노예와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도 잘 드러내고 있다시피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여성은 이 이후에도 줄곧 생산 노동에 참여하였다. 다만 그 생산 노동을 재생산 노동의 보조수단으로 여겼다. 당연히 여성의 노동은 남성 노동에 비해 잉여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고 보다 싸게 혹은 거의 공짜로 착취할 수 있었다. 여성이 재생산 노동에만 종사한다는 것은 부르주아 중산층의 판타지를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도 덧씌운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남성 노동자는 돈도 잃고 힘도 잃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부인의 노동과 임금의 덕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매춘부를 살 수 있었으며, 이 당시에 매춘부는 성만 파는 것이 아니라 남성 노동자 옆에서 요리나 빨래도 하는 부인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식민지 노예 노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예 노동은 자본주의의 잔여 범주가 아니다. 식민지에서의 플랜테이션 체제는 엄청난 잉여 노동의 축적으로 산업 혁명에 불을 지폈다. 유럽의 임금 노동은 노예제의 대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노예제에 의존하였다.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설탕이나 면화와 같은 것은 빵과 더불어 유럽의 노동 인구 재생산에 가장 중요한 것들이었다. 식민지 노예 노동은 유럽의 대도시 노동 인구의 생산 및 재생산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었다. 더구나 현재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세계화 혹은 전 지구적 분업 체제의 모범이기도 하다. 유럽의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재화의 생산비를 낮추는 세계적인 조립 라인이 이 당시에 이미 결성된 것이다. 글로벌 분업을 넘어 노동 계급을 분할하는 글로벌 카스트 제도의 등장이었다.
이처럼 성과 인종은 자본과 권력의 변두리 테마가 아니다. 심심풀이 땅콩처럼 할 이야기가 없거나 공연히 종교가 자기 존재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의 대립이 아니다. 오히려 성은 자본이 축적되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통제하고 길들여야했던 가장 첨예한 전투의 현상이었다. 노동 없이 생존할 수 없지만, 노동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것이 자본이고 성이란 바로 그 노동의 생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는 성에 대한 야만적 착취와 폭력을 통해서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계약적인' 근대 임금 노동을 수립할 수 있었다. 야만은 자본주의의 바깥이 아니라 가장 내밀한 곳에 위치한 자본 축적의 심장이다.
책이 내용을 요약하고 소개하는 것은 이쯤에서 그만하기로 하자. 무엇보다 이 책이 우리를 일깨우는 것은 자본주의 합리성과 '건강함'에 대한 착각에서 깨어나라는 조언이다. 중국을 바라보면서도 가지는 가장 근거 없는 낙관론이 자본주의가 일정하게 발달하면 민주화는 반드시 따라오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필연적으로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민주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발가벗겨 추방하고 굶어죽게 만든 야만적인 자본의 시원적 축적은 자본주의 초창기의 일이며 자본이 안정화되면 필연적으로 합리적인 계약 관계로 전환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당장 주변을 돌아보라. 사람을 공유지에서,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고 그를 통해 자본 축적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여러 곳에서 목격하고 있다. 당장 용산 참사가 그렇지 않았던가? 두리반 투쟁은 또 어떠했는가. 대규모 정리 해고야 말로 우리 시대의 인클로저 운동인지도 모른다. 자본가들에게야 공장이 자본을 축적하는 공간에 지나지 않겠지만 노동자들에게는 그곳이 회합을 하는 곳이고, 자신의 삶을 재생산하는 곳이고, 사회화하는 곳이지 않은가. 그 공장에서 정리 해고를 통해 노동자를 쫓아내는 것이 인클로저 운동이 아니면 무엇이 인클로저 운동인가?
마녀 사냥 시기에 식민지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일은 여전히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국제 연대 운동을 한 나의 경험으로만 보더라도 저개발국에서 일어나는 생존 투쟁의 절대 다수는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시원 축적기에 유럽이 그러했듯이 여성들이 주도하고 여성들이 앞장서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원주민들이 산림 파괴에 대항하여 일으키는 나무 안기 운동과 같은 것이 있다. 필리핀 마닐라나 케냐의 나이로비에 있는 슬럼가를 찾아가 보면 생계를 담당하는 노동을 수행하는 것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남자들은 주로 놀고 빈둥거리고 술 마시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막상 인종 분규와 같은 것이 터지면 맨 먼저 마녀 사냥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여성들이다. 그들은 이 책에서 잘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성적으로 너무 활달하다고 강간당하고, 때로는 다른 부족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강간당한다. 여성들이 애써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에 노략질 당하지만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다. 더구나 평시에도 여성들은 남성들의 폭력에 시달린다. 돈 벌어온다고 어디서 남자 앞에서 자랑질이냐고 말이다.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이들의 노동은 한 달 만에 밖에 나가 몇 푼 벌어오는 남편의 노동보다 더 열등하고 종속된 것으로 평가된다. 사실은 그 남자들이 이들에게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생계를 담당하면서도 언제든 폭력에 시달리는 이들의 상태는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과 판박이다.
소위 근대화된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성(sexuality)에 대한 유례없는 관심의 증가와 통제에 대한 압박을 경험하고 있다. 이 글의 처음에 예시한 동성애자들을 악마시하고 그들에 대한 마녀 사냥이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인구 감소를 우려한다면서 몇 년 전부터 낙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려고 하는 것도 한 예가 될 것이다. 과거에는 그렇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하더니, 이제는 자본주의의 초창기처럼 출산과 관련 없는 성행위를 비난하고 처벌하려고 한다. 성소수자와 여성주의자, 그리고 '비행' 청소년에 대한 대대적인 마녀 사냥이 자행되고 있다. 심지어 여기에는 진보주의자들의 일각도 동조하고 있다. '생명'의 이름으로 말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정리 해고, 공장 폐쇄, 뉴타운과 같은 대규모 삶의 터전 파괴 등과 같은 21세기의 인클로저 운동과 생명을 전면에 내세우며 성에 대해 공동체적 가치를 부르짖는 현재의 모습이 결코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는 점 말이다. 그 연결고리는 그때 그랬듯이 아마 '노동'과 '노동의 재생산'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노동의 생산과 재생산이 현재 자본의 축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장처럼 우리가 노동이 쓰레기가 되어 노동 없는 자본 축적의 시대로 접어든 것인지 아니면 네그리의 주장처럼 인지 노동의 시대로 접어들어 새로운 노동 생산/재생산/분할 전략으로 넘어간 것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도저도 아니면 여전히 자본주의는 산업 노동의 착취에 기반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살펴봐야한다.
의문은 이런 것이다. 만약 노동 없는 축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면 왜 갑자기 동성애나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등 노동력 재생산과 상관없는 성이 왜 이토록 정치화되었느냐는 점이다. 이것은 노동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도덕 정치의 문제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가 노동과 거의 아무런 상관도 없어져버린 기묘한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것이 되고 만다. 정치는 삶의 문제와 상관이 없는 허구가 된다. 이 뜨거운 도덕적 논쟁과 적대는 단지 정치의 불필요함과 무력함을 감추는 알리바이에 불과한 것이 된다.
반대로 노동이 여전히 자본 축적이 필수적인 것이라면 그것이 여전히 '숫자'의 문제인지 아니면 질적으로 다른 문제인지를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여성의 자궁을 통제하려던 일차적인 목적(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지만)이 노동의 숫자를 통제하려는 의도였다. 여성의 권력을 박탈하고 남성에 종속시킴으로써 재생산 노동을 부불 노동화하고 생산 노동에 투여된 여성의 노동을 잉여화하여 싼 가격에 착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성에 따른 계서제를 도입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분할하여 저항을 그들 내부의 착취와 적대로 돌려버리는 전략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정리해고와 성에 대한 정치화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떻게 분할되고 있으며 그 결과 어떤 새로운 계서제가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봐야한다.
마지막으로 여성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논쟁을 통해서 그 가치와 한계를 드러낼 수 있는 분이 이 책의 서평을 한 번 더 써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이 가진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이것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내 역량 바깥이라 건드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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