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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王'을 죽인 '침묵의 살인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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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王'을 죽인 '침묵의 살인자'는 누구인가?

[안종주의 '위험사회'] 박태준은 석면의 희생자다

'철강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여든넷의 나이로 13일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철강 왕국'을 향한 그의 집념과 성공, 정치적 도전과 좌절 등 영욕이 교차하는 그의 삶을 다룬 방송과 신문 뉴스가 17일 치러지는 사회장을 앞두고 연일 대문짝만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어떤 이유로 생을 마감했는지에 대해서는 사망 당일 잠깐 언급되더니 뉴스 초점에서 벗어나 있다.

사망 소식이 전해진 하루 뒤인 14일 환경보건시민센터,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포항환경운동연합, 광양환경운동연합, 전국건설노동조합 등 5개 단체가 성명서를 내 "고(故) 박 회장의 사망 원인은 석면 노출에 의한 폐 질환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포스코가 오랫동안 사용해 온 석면 함유 사문석과 각종 석면 제품에 노출된 게 원인일 것"이라는 주장을 해 눈길을 끌고 있다.

▲ 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뉴시스
박 회장의 사인을 처음 언급한 것은 사망 당일 고인의 주치의인 장준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교수(호흡기내과)가 기자 회견에서 "박 회장은 (석면과 관련이 있을 수 있는) 흉막섬유종 수술을 2001년 미국에서 받았고, 최근 호흡 곤란이 와 세브란스병원에서 폐 절제 수술을 받았지만 급성 폐 손상으로 사망했다"고 설명하면서 그의 폐에서 석면과 규폐가 발견됐다는 발표에서였다.

산업의학 전문의이며 석면 질환 전문가인 백도명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장은 이를 토대로 "고인의 병변은 흉막의 섬유화와 석면 섬유 등이 보이는 조직 소견을 보이고 있다"며 "이는 전형적인 석면 관련 흉막반 등의 진단과 부합하는 소견"이라고 말했다.

흉막은 폐를 둘러싸고 있는, 윤활액이 가득 들어 있는 이중 막으로 이것이 딱딱하게 굳는 흉막반은 석면 노출에 의해 생길 수 있는 질환 또는 증상이다. 일본에서는 석면 노출자 가운데 미만성 흉막반이 발견되면 석면 질환으로 인정해 피해 보상을 해주고 있다.

올해 1월부터 석면피해구제법이 시행돼 원발성 석면 폐암, 원발성 악성중피종, 석면폐증 등에 대해 피해 보상을 해주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2012년부터 이 흉막반에 대해서도 피해 보상을 해주는 방안을 정부가 적극 검토하고 있다.

박 회장의 석면 질환 여부는 의학적으로 확실히 진단된 것은 아니지만 만약 병원에서 떼어낸 폐 조직과 흉막(늑막) 조직을 검사해 석면 함유량 따위를 분석한다면 확실히 알 수 있다. 하지만 병원이나 유가족 쪽에서 이를 원하거나 진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 그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지나갈 가능성이 크다.

조선소와 더불어 철강 회사에서도 석면은 다양한 형태로 노동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고로 등을 만들 때 석면 내화재를 다량 사용할 수 있고 뜨거운 열에 견디고 쇳물 등에 사고 등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100퍼센트 석면 섬유로 짠 장갑과 옷 등을 사용한다. 또 열에 견딜 수 있도록 전선 피복 등도 석면포로 감싸고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석면이 들어있을 수 있는 사문석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실제 포스코는 1980년부터 30년간 상당한 양의 석면이 함유된 사문석을 부원료로 엄청나게 사용해온 것으로 지난 2월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추적 조사로 드러난 바 있다. 박 회장은 경영자였지만 포스코 건설에서부터 가동 그리고 운영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그의 석면 노출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석면 질환의 특징은 긴 잠복기이다. 석면 노출 시작으로부터 10~50년의 잠복기를 거쳐 질병이 나타나는데 대개 30~40년의 잠복기를 보인다. 박 회장은 1970~1980년대 포스코에서 현장을 지휘했으므로 호흡기 질환이 발생한 2001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20~40년의 잠복기를 가진 셈이다.

어떤 질병이든지 유명인이나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물이 그 질병에 걸리면 해당 질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된다. 1985년 미국의 미남 유명 배우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사망하고 프로 농구 스타 매직 존슨이 감염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에이즈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 씨가 2002년 폐암에 걸려 숨지자 금연 열풍이 당시 불기도 했다.

석면의 경우 1980년 <빠삐용>, <대탈주>, <타워링> 등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한 유명 배우 스티브 맥퀸이 석면 암인 악성중피종(흉막 암)으로 숨져 미국인들이 석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1930년생인 그는 17살 때인 1947년 해군(해병대원)에 입대해 1950년까지 복무하면서 석면이 가득한 군함 기관실에서 근무했고 그 뒤 배우로 활동하면서 30~40대 때 석면복을 입고서는 각종 자동차 경기에 카레이서로 나선 것이 석면암에 걸린 원인으로 알려졌다.

맥퀸과 더불어 석면 암에 걸린 유명 인사로는 미국 해군 제독 엘모 줌왈트(Elmo Zumwalt),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ven Jay Gould), 미네소타 주 출신 하원의원 브루스 벤토(Bruce Vento)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줌왈트는 독성 물질과 관련해 정말 아이러니한 경력 때문에 눈길을 사로잡는 인물이다.

줌왈트가 해군 제독으로 있으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였던 1970년대 공식 통계로만 해마다 2500명이 넘는 조선소 배 건조 및 수리 노동자가 석면 관련 질환으로 숨졌다. 물론 이 때는 석면의 위험성이 확실히 알려진 이후였다. 그는 또 베트남 전쟁 때인 1968년부터 1970년까지 그곳의 미국 해군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메콩 강 삼각주 일대에 고엽제인 오렌지 에이전트를 살포토록 명령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석면 산업계에서 그토록 안전하다고 주장했던 석면이 폐에 일으킨 암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음에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침내 1999년 의사는 그의 왼쪽 폐에서 악성중피종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그는 기관지 절제술을 받아 말을 못하게 됐으며 투병 끝에 몇 달 뒤 숨졌다.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석면 질환에 대해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그는 영원히 침묵하고 말았다.

줌왈트 제독의 죽음을 되새겨보면서 만약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던 10년 전에 박태준 회장의 질환이 석면 때문이었고 이를 박 회장이 알고 석면 추방 운동을 벌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20세기 가장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가운데 한 명이며 고생물학자, 과학사학자임과 동시에 대중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유명 과학 저술가였다. 그는 일생동안 수많은 과학상을 받았으며 1999~2000년에는 미국과학진흥협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41세 때인 1982년 악성중피종의 일종인 복막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20년 뒤인 2002년 만 60세의 나이에 숨졌는데 악성중피종이 아니라 다른 암이 생겨 이 암이 뇌까지 침범해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악성중피종을 극복하고 무려 20년 넘게 살아 이 분야 최장수 기록을 지닌 인물이 됐다. 그가 저술한 책 가운데 <풀 하우스>, <다윈 이후>, <판다의 엄지> 등 10권 가까이가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판됐다.

벤토는 1977년부터 2000년까지 24년간 미네소타 주 출신의 민주당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던 중 2000년 10월 악성중피종으로 숨졌다. 그는 청년 시절 노동자로 일했는데 이 때 석면에 노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벤토 역시 굴드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 미국에서는 환경 수호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석면 암으로 의회를 떠나기 직전까지 미국 국립공원, 휴양 및 공공 토지 소위원회 위원장으로 봉사했다. 그는 공기 중 유독 물질에 관한 엄격한 기준 등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수백 개의 입법에 관여하기도 했다.

석면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석면을 캐내는 광부나 이를 석면 제품으로 만드는 노동자 또는 석면 함유 물질이 있는 곳에서 생활하거나 일하던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그렇다. 또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등 개발도상국가나 저개발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때론 환경성 석면 피해를 입거나 젊었을 때 노출된 일 때문에 나이가 들어 석면 질환에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앞에서 소개한 인물들이 그 좋은 사례들이다.

박태준 회장의 경우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보아도 석면의 희생자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가 석면 희생자라면 이는 몸을 사리지 않고 산업 현장에서 노동자가 한 몸이 되어 일했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유가족이나 그를 기리는 많은 사람들이 굳이 그의 석면 관련성을 부인하려거나 외면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970년대와 1980년대 그와 더불어 고락을 같이 하다 지금은 현장을 떠났을 많은 포스코 노동자들의 은퇴 후 건강은 어떠한지를 다시금 살펴보고 지금의 노동자들의 건강과 작업환경을 점검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환경·노동단체의 목소리가 매우 반갑게 들린다.

나는 <침묵의 살인자, 석면>(한울 펴냄)에서 스티브 맥퀸을 '석면 위험 세계 홍보 대사'로 지칭한 바 있다. 박태준 회장에 대해서는 이 순간부터 '석면 위험 한국 홍보 대사'로 부르고 싶다. 아마 자신은 잘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오랫동안 석면을 폐 속에 가득 안고 고통을 겪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붙인 이런 칭호가 '세계 철강왕 박태준'을 우리가 더욱 가슴 속 깊이 새기는데 보탬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고인의 명복을 삼가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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