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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김구를 압도한 비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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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김구를 압도한 비결은?

[해방일기] 1946년 12월 9일

1946년 12월 9일

12월 4일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이튿날 맥아더를 만난 뒤 미국으로 떠났다. 정병준은 하지가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1947년 1월 28일)를 근거로 이승만과 맥아더의 만남을 이렇게 설명했다.

맥아더는 시간이 없다며 이승만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지만, 이승만은 동경에서 하루를 더 묵어 '눈총을 받아가면서' 맥아더를 몇 분간 만날 수 있었다. 하지의 지적처럼, 이승만은 맥아더를 잠시 만났다는 사실을 과대 포장해서 맥아더와 주한미군정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나아가 한국인들에게 주한미군정 즉 하지와 그의 정책이 본국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맥아더와의 짧은 면담을 이용했던 것이다.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636쪽)

12월 8일 워싱턴에 도착한 직후 이승만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미국에 1개월간 체재할 예정인데 나의 미국 방문 목적은 첫째로 긴급한 조선 통일 문제를 UN에서 토의되도록 하며 둘째로는 미 당국에 대하여 조선 정부를 수립 승인하도록 그 원조를 요청하는데 있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10일자)

한국 안건의 유엔 총회 제기는 미국 방문의 최대 명분이었다. 그러나 12월 13일까지 열리는 총회에 새 안건을 제기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에 이승만은 미국에 도착했고, 그는 총회가 열리는 뉴욕에 가지도 않았다. 유엔에서 로비 활동을 하던 측근들도 워싱턴으로 불러들였다.

이승만은 워싱턴 도착 후 한국위원부-한미협회의 로비스트인 스태거즈, 윌리암스, 굿펠로우 대령, 브라운 목사, 올리버, 임병직, 임영신 등으로 전략회의를 조직했다. 이승만은 이들과 함께 미 국무부에 제출할 6개항의 기본 방침을 결정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남북 통일 이전에 과도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주장한 남한 과도 정부 수립안은 다름아닌 남한 단정안이었다. (…) 이승만은 1월 중순부터 격렬해진 남한 우익 진영의 반탁 운동과 보조를 맞추어 1월 27일에 이 6개항을 국무부에 전달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 637~638쪽)

이승만은 방미 명분으로 대 유엔 외교를 내걸었지만 이승만이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도착한 12월 8일 유엔 총회는 이미 더 이상의 의제 상정이 불가능한 상태로 폐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 진영의 대 유엔 외교 활동은 의제 상정보다는 미국과 남한의 언론을 향한 선전 작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미군정의 한 보고서는 의제 상정의 불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던 이승만이 일부러 유엔 총회가 폐막될 때까지 개최지인 뉴욕에 가는 것을 피하였다고 분석했다. 유엔 외교는 출국을 위한 명분에 불과하였고, 이승만의 진정한 목표는 미국의 대한 정책 담당자들과 여론 형성자들을 향해 자신의 구상을 로비하고 선전하는 것이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정용욱 지음, 중심 펴냄), 202~203쪽)

건너갈 당시 한 달 또는 몇 주일 동안 미국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던 이승만은 그곳에 4개월간 머무르게 된다. 미국에서 그의 활동을 수시로 살펴보게 될 텐데, 그 활동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그와 미군정 사이의 관계에 대한 커밍스의 개관을 훑어보는 것이 좋다.

해방 후 첫 시기에 최대의 패배를 겪은 것은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망명에서 돌아와 보니 서울에는 보수파와 부일 협력자 집단이 미군의 지원 하에 서울을 장악하고 있었다. 평양에는 항일 경력이 그들 자신과 대등하거나 더 우월한 공산주의자와 저항 운동가들이 소련의 지지 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구 집단의 초기 반응에 그들의 좌절감이 드러난다. 3상 회담 결정 발표 뒤에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를 암살하고 헛된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은 조국에 개선해 동포의 환영을 받을 날을 기다리며 이방인의 땅에서 투쟁(보다는 더 많은 경우 단순히 '생존')해 온 역할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귀국 후 맡은 역할은 이념과 조직이 없는 운동의 말로였다. (커밍스는 송진우를 김구 일당이 암살한 것으로 확신을 갖고 추정하는데 나는 이를 납득하지 못한다. 1945년 12월 30일자 일기 참조.)

민족주의자들의 계획은 단순한 것이었다. 그들이 추구한 조선인 국가의 '광복'은 조선인의 것이라는 의미만이 분명한 것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불확실했고, 풀려나오는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해방 조선에서 경쟁의 승리는 기민하고 재빠른 자에게 돌아갔고 민족주의자들은 그런 특성을 보이지 않았다. 단독 플레이에 능란한 애국자 이승만이 그런 특성을 아쉬움 없이 보여준 자였다.

이승만이 남조선 정치를 농락한 솜씨는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 그의 존재는 민족 운동과 임정에서 두드러진 것이었으나, 그가 헌신한 운동이란 언제나 딱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이승만 운동'이었다. 형편없는 지휘자이면서 독주(獨奏)의 대가였다.

1945년 초 워싱턴 길바닥을 누비고 국무부 복도를 기웃거리던 이승만은 무명의 망명 정객이었다. 그가 '전권 대사'로서 대표한다는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실패한 정부였고, 그를 1925년에 내쫓았던 정부였다. 그런데 그해 말에는 미군정 고위층의 거점인 조선호텔 안팎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고, 수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주무르고 있었으며, 수많은 정치 지망생들 중에서 자기편을 골라잡고 있었다. 상대방의 도움을 이승만보다 절실하게 바라는 자들이었다. 이승만은 여러 파벌과 집단을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었고,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미군정 앞에서 자신이 장악한 자원을 현란하게 과시할 수 있었다.

미군정 자체가 이승만의 성공에 공헌한 최대의 자원이었다. 미국인을 이해하는 데 이승만은 어느 정치인보다 월등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그의 정치적 술수, 우익에 대한 영향력 그리고 평생을 조선 독립을 위해 바쳐온 민족주의자로서 권위를 필요로 했다.

다른 조선인이 제공할 수 없는 두 가지를 이승만은 미국인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자로서 명성과 공산주의에 대한 대항력이었다. 이승만 또한 미국인들에게 두 가지를 필요로 했다. 자신이 남조선 정계의 정상을 점령할 수 있는 조건의 제공과 좌익의 도전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 간섭도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지엽을 붙잡고 근본을 흔드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귀국하는 방식을 보든, 우익에 영향력을 넓히는 방식을 보든, 남한 단정 계획을 추진하는 방식을 보든, 이승만의 재주는 기막힌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이승만의 탁월한 점은 참을성이었다. 1946년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레너드 버치가 공들인 좌우 합작 사업을 그가 참고 견뎌낸 것은 미국의 정치적 관용이 어떤 한계를 가진 것인지 파악하고 그 한계가 좌익에 접근할수록 예민하고 불안정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도 노선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미군정과 국무부에서 이승만에게 적대적인 자유주의파도 유지될 수 없는 존재였다.

조선에서든 어디에서든 자유주의자들은 전후 어느 시기에나 공산주의자들에게 농락당한다는 비난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들은 왼쪽으로 접근할수록 발밑의 얼음이 얇아진 반면 그 반대자들은 미국인이든 조선인이든 탄탄한 땅을 딛고 있었다. 동기를 의심받을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좌익을 배제하기보다 포용하는 것이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 반대자들은 그 반대로 생각했다.

(…) 워싱턴에서도 서울에서도 국제주의 또는 자유주의 노선은 우익의 집요한 방해공작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승만과 그 동조자들은 미군정에게 제공할 건설적 공헌은 별로 없었지만 남조선에서 실질적인 거부권으로 작동할 파괴적 계책은 얼마든지 갖고 있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430~432쪽)

해방 후 몇 달 동안 수십 명의 해외 독립운동가가 환국했다. 그중 가장 큰 성망을 안고 돌아온 것이 김구, 이승만과 김두봉이었고 김일성과 김규식이 그에 버금가는 성망을 갖고 있었다. 국내 지도자로는 여운형과 박헌영이 부각되었다. 1946년이 지나는 동안 이북에서는 김두봉과 김일성의 협력 속에 김일성의 지도력이 성장했는데, 이남에서는 그에 비길 만한 지도력 성장이 없었다.

이남에서 지도력 성장이 부진한 결정적 이유는 미군정의 역할에 있었다. 이북의 소련군이 개입을 적게 하려고 애쓴 것과 달리 미군정은 이남에서 통치 주체로서 역할에 집착했다. 그래서 조선 정치가의 활동 여건은 미군정과의 관계에 크게 좌우되었다. 이승만이 미군정과의 특수관계를 배경으로 실력을 키우고 김규식이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으로 역할을 키운 반면 김구의 지도력은 침체에 빠졌다.

1946년 말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이승만의 위상은 김구, 김규식과 결정적인 차이가 없었다. 민족 지도자로서의 성망에는 김구에 비해 약점이 많았고, 미군정과의 관계에서는 김규식보다 크게 유리한 점이 없었다. 독촉국민회를 장악하고 한민당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점 정도가 두 김 씨에 대한 이승만의 강점이었다.

그런데 4개월간의 미국 체류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경쟁자들을 확연히 따돌리고 분단 건국을 통한 권력 장악을 향해 치달려가게 된다. 1947년 이승만의 득세는 무엇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던가? 1946년을 지내는 동안 지도자로서 그의 도덕성은 파탄을 드러낼 대로 드러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권력 장악이 커밍스가 탄복하는 이해력과 술수와 참을성만으로 가능한 것일까?

해방 후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만이 아니라 세태와 풍속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 이승만이라는 사실을 해방 공간을 들여다볼수록 절감하게 된다. 군정사령관 하지에게까지 정면으로 도전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위상의 이승만이 나타난다. 이제부터 이승만에게 지금까지와 다른 비중을 두고 그 움직임을 추적해 나가야겠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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