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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류중일만 '초보 감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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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삼성 류중일만 '초보 감독'인가?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또 다른 초보 감독 김정남

언론에서 발표하는 계약 기간은 분명 계약서에 씌어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계약서와 프로 야구 감독의 계약서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난 1년간 프로 야구계에서는 계약 발표와 상관없이 감독직을 물러나고, 새로운 감독이 임명되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금년 순위 7, 8위 팀만 원래 감독이 자리를 지켰을 뿐 1위부터 6위까지의 팀들이 모두 감독이 바뀌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2011년도 시즌에 처음으로 감독직에 오른 삼성 라이온즈(삼성)의 류중일 감독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시기에 선동렬 감독을 퇴진시킨 삼성의 후임 감독으로 취임하여 4강이 힘들 것이라는 예상 속에 시즌을 맞이했지만 초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삼성을 5년 만에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고려대학교 감독을 거쳐 롯데 자이언트(롯데) 감독에 취임한 양승호 감독은 롯데가 제자리를 잡지 못한 시즌 초에 별의 별 욕을 다 얻어 먹어가면서도 꿋꿋하게 감독 자리를 지키며 결과적으로 페넌트 레이스 2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올렸습니다.

김성근 감독이 갑자기 자리를 떠난 후 경기장에서 팬들이 현수막을 내거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겨우 팀을 추슬러 페넌트레이스 3위로 한국 시리즈에 진출한 SK 와이번스도 초보인 이만수 감독(엄밀히는 감독 대행)의 지도력이 있었기에 그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다 보니 "초보 감독의 전성시대"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구관이 명관인지, 초보 같지 않은 초보가 더 잘하는 것인지는 결과를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에 돌이켜 보면 '그 사람이 초보였다고?' 하는 질문을 자아내게 하는 훌륭한 초보 감독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습니다.

국가 대표 팀을 맡은 30대 초반의 감독 대행

스스로 축구팬이라 자처하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축구팬이 아니라 국가 대표 축구팀의 팬인 경우가 꽤 많이 있는 듯합니다. 제 주변에서는 K리그 팀들의 경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도 국가 대표 축구팀 감독을 선임할 때가 되면 하마평에 오른 이들을 놓고 누가 더 나을 것인가를 토론하는 경우를 여러 차례 볼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한 번도 감독 경험이 없는 사람이 국가 대표 팀 감독 후보로 거론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제가 던진 이 질문에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국가 대표 팀 감독이 어떤 자린데" 하는 대답을 들은 바 있습니다만, 한국 축구 국가 대표 팀 감독 중에는 평생 처음 맡는 감독을 국가 대표 팀에서 시작한 분이 있습니다.

현재 한국프로축구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울산, 부천의 전신인 유공 등에서 감독을 지낸 김정남 감독이 그 주인공입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국가 대표 팀 수비수로 명성을 날린 후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을 앞둔 1974년 말에 함흥철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발탁된 김정남 코치는 1943년생이니 지금의 이동국보다도 젊은 나이였습니다.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 탈락 후 잠시 국가 대표 팀을 떠났다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앞두고 최정민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직을 맡은 그는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지던 2차 예선에서 이란에게 본선 진출권을 내주는 것이 확실해진 시점에서 최정민 감독이 사의를 표하는 바람에 감독 대행으로 대표 팀을 지휘해야 했습니다.

월드컵이 끝난 후 개최된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함흥철 감독을 보좌하여 북한과 공동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쿠웨이트에서 열린 1980년 아시안컵 대회에서도 코치로 선임되었다가 적당한 감독을 찾지 못한 대한축구협회의 고민을 해결해 주려는 듯 감독을 대행했습니다.

예선에서 3대 0으로 이긴 주최국 쿠웨이트에 결승에서 3대 0으로 패한 것이 아쉬움이긴 했지만 그로부터 10년간 한국 축구를 이끈 최순호가 스타로 등장하는 등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코치 역할을 한 트레이너 김호곤은 2년 전 아시안게임에서 주장으로 시상대에 오른 바 있습니다.

코치로 강등(?)된 감독

은퇴 후 강산이 한 번 변할 시간을 보내는 동안 국가 대표 팀 코치를 맡았다 그만두기를 반복하며 감독 대행만 두 차례 역임한 김정남 감독은 소속팀을 가지지 못한 상태로 40줄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축구 월드컵 대회에 아시아에서는 단 한 팀밖에 출전하지 못하던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서 2위를 차지하는 바람에 이란에게 월드컵 출전권을 내주기는 했지만 이란이 불참한 아시안게임에서는 우승을 차지하는 등 나름대로 전성기를 보낸 한국 축구를 대표할 만한 선수들은 프로 축구가 없던 우리나라를 떠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야했습니다.

차범근과 김진국은 독일로, 허정무가 네덜란드로, 김황호와 조영증이 미국으로, 박종원은 벨기에로, 그 외 몇몇 선수들이 홍콩으로 진출하는 등 여러 주축 선수들이 국가 대표 팀을 떠나고 1982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는 낯익은 선수들 대신 여러 신예 선수들이 대표 팀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1980년 아시안컵 우승을 통해 전성기를 구가하던 쿠웨이트는 1981년에 열린 스페인 월드컵 예선을 유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월드컵 진출권이 걸린 최종 경기에서 1대 0으로 뒤지고 있던 후반 30분, 이태엽이 헤딩골을 터뜨렸으나 이유 없이 파울을 선언한 심판의 농간 속에 다시 한 번 쿠웨이트에 패배를 기록해야 했고, 쿠웨이트는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뒤를 이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감독 대행이 아닌 정식 감독으로 데뷔를 하게 된 김정남 감독은 그 때까지 어떤 팀에서도 감독을 역임하지 못했으니 최초로 맡은 감독이 바로 대표 팀 감독입니다. 많은 우수한 선수들을 해외에 내보낸 축구 대표 팀은 전 대회 공동 우승국이라는 명예에 먹칠을 하며 예선 탈락이라는 참담한 성적으로 마쳐야했고, 훗날 지도자로서 한국 축구 발전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 김정남 감독, 김호곤 코치의 데뷔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프로팀이라곤 할렐루야 한 팀뿐이라 정기적인 경기조차 열리고 있지 않던 상태에서 1983년에 유공이 창단되었습니다. 코치진은 박세학 감독, 김정남 코치로 구성되었으며, 김정남 감독은 대표 팀을 들락거린 지 10여 년 만에 직장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1983년에 프로 두 팀, 아마추어 세 팀으로 구성된 수퍼 리그가 축구 팬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자 1984년에 네 개의 프로팀이 더 생겨나면서 한국 축구의 프로화가 한층 촉진되었습니다. 대신 프로팀에 몸을 담고 있는 코칭스태프는 아무도 대표 팀을 맡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1984년이 끝나갈 무렵 개최된 아시안컵 대회에서는 코치 없이 문정식 감독 혼자 팀을 이끌었으며, 코칭스태프 구성은 김우중 전 회장으로부터 막 대한축구협회장을 물려받은 정몽준 회장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가 되었습니다. 1985년,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대한축구협회에서 삼고초려 끝에 찾아낸 인물이 대표 팀 은퇴 후 10여 년간 국가 대표 팀 코치와 감독대행을 거쳐 잠시나마 감독을 맡은 적도 있는 김정남이었습니다.

▲ 김정남 감독. ⓒ뉴시스

한국 축구의 역사를 바꾼 김정남 감독

말레이시아, 네팔과 1차 예선을 치르게 된 우리나라는 쉽게 1차 예선을 통과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말레이시아 원정 경기에서 우세한 경기를 벌이고도 0대 1로 패하면서 본선 진출 전망이 어두워졌습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진출한 후 월드컵 축구 대회는 방안에서 텔레비전으로만 지켜보아야만 했던 축구 팬들에게 있어서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라는 아주 익숙한 뉴스는 4년 만에 또 되풀이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는 국가 대표 팀을 맡아 고군분투하던 문정식 감독은 결국 사임을 했고, 대한축구협회는 다시 한 번 감독 구하기라는 어려운 숙제를 받아들어야 했습니다. 프로 축구 출범 이후 대표 팀 감독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당시 대표 팀 감독이나 코치의 수당이 프로팀의 반도 채 안 되던 시기였으므로 월급은 팀에서 받고, 팀에 도움은 안 되는 지도자가 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의 희망이 1차 예선 탈락이라는 처참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 예상되는 가운데 김정남 코치는 다시 한 번 감독 대행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다행히 말레이시아가 네팔 원정 경기에서 예상외로 무승부를 기록하는 바람에 우리나라와의 마지막 경기를 앞둔 상태에서 2승 1무를 기록하고 있었고, 우리나라는 2승 1패를 기록한 상태에서 말레이시아와의 홈경기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말레이시아를 2대 0으로 물리치며 기사회생한 대표 팀은 김정남 감독 대행이 감독을 맡고, 김호곤 코치를 영입하면서 팀을 정비하여 인도네시아와의 2차 예선과 일본과의 3차 예선을 무사히 통과하며 32년 만의 본선 진출권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한 김정남 감독은 초보 감독이면서도 한국 축구 대표 팀의 숙원을 풀면서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보여 주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열린 1986년 월드컵에서 마라도나가 이끈 아르헨티나에 뚜렷한 실력 차를 보여 주며 3대 1로 패하기는 했지만 박창선 주장이 월드컵 참가 역사상 첫 골을 기록했고,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는 김종부가 동점골을 터뜨리며 월드컵 참가 역사상 첫 승점을 올렸습니다.

이탈리아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1대 0으로 뒤진 상태에서 5년 전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이탈리아 킬러로 떠오른 최순호가 그 대회 베스트 10골의 하나로 선정된 중거리 슛을 성공시키는 등 3대 2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벌이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월드컵에서의 선전 후 서울 아시안게임에 나선 축구 대표 팀은 결승전에서 역시 월드컵 출전 팀인 사우디아라비아를 2대 0으로 물리치고 8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아시안게임에서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속 팀보다 국가 대표 팀 감독을 먼저 맡은 김정남 감독은 월드컵 출전을 앞둔 1985년 말에 박세학 감독 후임으로 유공 감독에 임명됨으로써 대표 팀이 아닌 소속팀에서도 감독을 맡게 되었고, 이로부터 6년간 유공 팀 감독을 지냈습니다.

처음 맡은 감독이 국가 대표 팀이었던 박항서

한편, 히딩크 감독이 뚜렷한 족적을 남긴 2002년 월드컵 대표 팀은 히딩크가 떠난 후 후임 감독 선임이 매끄럽지 못한 가운데 부산 아시안게임을 맞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히딩크를 보좌한 박항서 코치가 감독을 맡게 되었는데 이 또한 박항서 감독으로서는 첫 번째 감독 자리였습니다.

청소년 대표 주장 출신으로 한양대 주장, 국가 대표 2진인 충무 주장, LG 치타스(안양 LG의 전신) 주장 등을 맡으면서 주장 전문 선수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는 안양 LG와 수원 삼성 코치를 역임한 바 있으며, 허정무 코치와 함께 김호 감독이 이끌던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표 팀의 코치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히딩크 감독 부임 후 수석 코치를 지낸 그는 히딩크 감독이 한국을 떠난 후 "히딩크를 계승할 준비된 감독"이라며 국가 대표 팀을 맡았으나 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패하면서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감독 대행일 뿐 감독은 아니었다"는 말 뒤집기와 함께 급여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대한축구협회의 횡포에 의해 국가 대표 감독직에서 도중 하차해야만 했으나 경남 FC와 전남 드래곤즈 감독을 맡으며 감독 경력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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