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에 첫 회의를 가진 조미공동 소요대책위원회(조미공위)는 임시로 만들어진 비공식 기구였다. (11월 2일자 일기) 좌우합작위원회(합작위)의 제안을 미군정이 받아들여 만든 것이었다.
미군은 진주 이래 조선 남반부의 통치권을 쥐고 있었다. 어떤 통치자든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피통치자의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 '효과적인 통치'라 함은 피통치자의 복리만이 아니라 통치자의 이익을 위한 뜻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통치가 어느 수준에 오른 뒤에 그것이 피통치자를 더 위하는 것이냐 통치자 스스로만을 위한 것이냐 따질 여지가 있는 것이지, 수준 미달의 통치는 양측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다.
조선인의 의견 수렴에서 미군정은 수준 미달이었다. 진주 직후 구성한 고문단은 미국 유학자와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유산 계층만을 대변하는 구성이었다. 온건 좌익인 여운형조차 몸담을 수 없는 구성이었다. 이 고문단이 조금 확장된 것이 1946년 2월 구성된 민주 의원이었다. 미군정에 협조적 태도로 일관한 안재홍마저 "고궁에서 한담만 하는" 존재라고 탄식한 민주의원이었다.
반면 이북에서 소련군은 통치자 역할을 아예 사양하고 조선인들에게 가급적 많은 것을 맡겼다. 최소한의 개입과 협력을 통해 조선 사회의 흐름을 소련의 국익에 맞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1947년 여름 이북 지역을 방문한 안나 스트롱의 설명이 단순명쾌하다.
러시아인들은 좌익 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좌익 정부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석방하면서 의미심장하게 "돌아가서 자유로이 조직하시오"라고 말하기만 하면 됐다. 일제 치하에서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일본에 봉사하거나 아니면 감옥으로 가야 했다. 친일파들이 사라지자 과거의 죄수들은 고향 마을의 영웅이 되었다. 그들 중에는 수많은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급진주의자들이 있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505쪽)
11월 18일자 일기에서 해방 조선의 상황이 사회주의에 적합하다고 본 미국의 배상위원회 대사 에드윈 폴리의 견해를 소개했다. 그 견해를 놓고 잠깐 생각해 보니, 조선만이 아니라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어느 사회나 다 그랬을 것 같았다. 자본주의의 속성 때문이다.
시장 경제는 오랫동안 인간 사회에 존재해 온 것이다. 그런데 시장 경제의 원리를 사회 조직의 주축으로 삼는 자본주의는 근대 들어서야 광범위하게 시행되기 시작했다.
무슨 까닭일까? 자본주의 체제는 낭비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다. 경쟁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비용이 많이 들어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런데 산업 혁명 덕분에 자원 공급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가 꽤 오래 지속될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강력하게 추진한 나라들은 산업 혁명의 혜택을 집중적으로 받은 나라들이었다. 기술과 자원이 빈약한 주변국은 자본주의를 억지로 시행할 경우 인민 대다수가 비참한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마련이다. 조선은 그런 나라의 하나였다. 그래서 보수적 우익 인사들도 대개 상당 수준 사회주의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조선의 미군정이 민의를 수렴하러 나선들 자본주의를 전제로 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재홍 같은 대표적 우익 이데올로그도 해방 직후 발표한 글에서 '신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사회주의 성향의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15~60쪽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민족'이나 '인민'을 염두에 두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만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환영하거나 환영하는 시늉을 했고, 미군정 당국자들의 조선인 접촉은 이 사람들 범위를 잘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점령이 1년 가까이 계속되면서 더 넓은 범위의 민의를 수렴할 필요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법 의원 설립을 추진하면서는 전처럼 친미 극우파에게만 맡기지 않고 합작위를 통해 중도파의 협조를 청하게 되었다. 그런 참에 10월의 전국적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점령 초기에는 반감을 별로 보이지 않던 민중이 이제 저처럼 들고 일어나는 것은 1년간의 점령이 잘못되었다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였다. 겉으로는 좌익의 선동이라고 둘러대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심각한 반성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요 사태 앞에서 미군정은 중도파의 비판과 조언을 전과 달리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조미공위가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경찰 문제, 인사 문제를 비롯해 꽤 중요한 문제들이 다뤄지게 되었다. 합작위 위원들은 첫 번째로 경찰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 경찰 문제에 관한 조미공위 발표가 11월 18일 군정청을 통해 나오게 된 것이다. (11월 2일자 일기)
그러나 미군정의 반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장 상황이 급박하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시늉은 했지만, 지금까지의 관행을 바꿀 만큼 심각한 반성은 없었다. 바로 이튿날 군정장관 대리 헬믹 준장('준장'을 당시에는 '대장(代將)'이라고 했다.)의 기자 회견에서 알아볼 수 있다. 헬믹 준장은 며칠 전부터 러치 군정장관이 수술 받으러 일본 간 동안 대리를 맡고 있었다. (러치가 이 시점에서 자리 뜬 것도 조미공위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문) 경찰의 민주화를 점진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이번 남조선 소요 사건에 감하여 일제 시대의 악질 경찰 관리는 속히 일소할 것이며 질적으로 우수한 자라도 경찰 책임자(경위급 이상) 에는 등용치 말고 부득이한 기술부면에만 존치함이 여하?
(답) 이 제안은 우리도 원하는 바이나 제안대로 실천할 수 없다. 우리는 공평정대하기를 강조하고 있다. 일제 시대의 경관 전부를 축출하는 것은 미군정하에서 훌륭하게 근무하고 있는 경관에 대하여 불공평한 일이다. 나는 우리가 취하고 있는 방법 즉 민주주의 경찰의 이념을 채용치 않거나 또는 일제 시대에 평판이 나쁘던 경관을 개인적으로 면직시키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기의 경위급의 경관을 일시에 전부 면직시키면 우리가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많은 지장이 생길 것이며 면직당한 경관들은 미군정을 불신임케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의 산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관들은 그들이 경험이 풍부하니만큼 대단히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제 시대의 경관 전부에 대하여 무차별하고 불공평한 해직을 시킨다면 그들은 미군정을 반대할 모든 이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20일자)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경찰 숙청에 반대하는 것이다. (1) 훌륭하게 근무하고 있는 경관들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다. (2) 법과 질서 유지에 일제 시대 이래의 경관들이 필요하다. (3) 그들을 내쫓을 경우 실력을 가진 그들이 반대 세력으로 들어갈 것이다.
(1) 경찰 전체를 놓고 볼 때 근무를 얼마나 훌륭하게 해 와서 소요 사태가 일어났나? 진짜로 훌륭하게 일해 온 사람들은 찾아내서 남기더라도 그 집단 자체는 바꿔야 할 것 아닌가? 조미공위의 문제 제기를 완전히 묵살하는 태도다.
(2) 이북에서는 일제 시대 경관들 남기지 않고도 법과 질서 잘만 유지하는데, 이남에서만 유독 그들 없이는 안 된다는 까닭이 뭔가? 당시 사람들이 경찰을 법과 질서의 옹호자가 아니라 파괴자로 인식하고 있던 사실을 헬믹은 전혀 몰랐는가?
(3) 반대 세력이라면 좌익을 가리키는 것일 텐데, 일제 시대 경찰을 군정청이 받아주지 않으면 좌익에 가담할 것이라고 헬믹이 정말 걱정했을까? 헬믹은 좌익과 식민지 경찰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전혀 모르는 채 군정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단 말인가?
조병옥과 장택상의 경찰 현상 유지 주장을 헬믹은 앵무새처럼 따라 한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저런 멍청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이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당시 군정관들의 자질과 태도를 비판한 어느 전직 군정관의 글이 소개된 것이 있다.
미국 태평양협회이사회에서 발행하는 극동전망 최신호에는 전 동경·서울·마닐라의 미국 군정관을 역임하고 현재 뉴욕 주 검사보인 버트람 사리탄의 조선 내 미군 당국을 비판한 논문이 게재되어 있는데 그 내용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 내의 높은 지위를 점령하고 있는 무능한 관리는 너무나 많다. 그들 중에는 조선인의 배경과 심리를 적당히 이해 평가하지 못하는 자가 너무나 많다. 미국 군사 당국은 미곡 정세 취급에 과오를 범하였으며 이것이 원만한 지역적 정권을 수립하지 못하게 된 주요한 원인의 하나인 것이다. 이미 선전된 민주주의적 방식은 때로는 조선인 자체보다 그를 창도하는 편이 잘못 이해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특히 조선 신문과의 관련에 있어서 현저하였다.
군정청은 중립적 태도를 취하였으나 그가 우익을 지지하였으며 우익 정당이 강력한 인민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을 희망한 것은 기지의 사실이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20일자)
뉴욕 주 검사보로 근무하고 있다니 변호사 자격을 갖고 군 복무를 한 사람이었던가 보다. 그런데 종전 후 1년 남짓 기간 동안 세 군데 군정관을 역임하고 지금 자리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보면 동료와 상관들을 너무 잘 비평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사리탄의 비판은 통렬하다. 미곡 정책의 과오 정도야 누구나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민주주의적 방식'에 대한 군정 당국자들의 이해 부족까지 짚다니. 사실 미군정의 신문 관계 조치는 1945년 11월의 <매일신문> 정간과 개편에서 1946년 9월의 좌익계 신문 무더기 폐·정간까지, 민주주의의 기초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아래 기사에 소개된 '로버트 J. 올리버'는 아마 '로버트 T. 올리버'의 오기일 것이다. 올리버는 이승만의 측근으로 나중에 그의 공보 고문을 지내고 그의 전기까지 쓰게 되는 인물이다. 1946년 6월에 서울에 왔던 것으로 보인다. (<우남 이승만 연구>(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541쪽)
서울 고려대학에 잠시 강의를 담당하고 있던 로버트 J. 올리버는 최근 당지 시라큐스 대학에 귀임하였는데 동 대학에서 조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선 주둔 미군은 일종 기이한 비능률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아세아적 각국은 세계에서 가장 학대를 받아온 국가인데 조선인은 현재도 행정 기구 부서에 재보치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주둔 미군에 대한 반란 폭동 공격은 평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남조선 주둔 미군 3만 명 중 2000명은 불량분자인데 동양 각지에 있어서의 미군에 대한 호감정은 점차 감소되고 있는 현상이며 이것은 실로 우려할 바가 있다. 한편 북조선 주둔 소군 역시 문제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17일자)
이 시점에서 이승만의 측근 인물로부터 나온 조선 미군정에 대한 이처럼 비판적인 발언이 눈길을 끈다. 하지는 1945년 10월 맥아더 앞에서 이승만을 만난 후 몇 달 동안 그를 더할 수 없이 극진하게 모셨다. 그러나 1946년 3월 '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물러날 때는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고 있었다. (1946년 3월 15일자 일기) 미소공위 개막을 앞두고 이승만 노선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가 퇴진시킨 것으로 흔히 해석된다.
입법의원 구성을 놓고 하지와 이승만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극우파의 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입법의원을 바로 장악하고 싶어 했다. 반면 하지는 합작위의 중도파에게 관선의원 추천을 맡겨 보다 균형 잡힌 구성이 되기를 원했다. 12월 초순 이승만의 미국행은 하지의 태도에 더 이상 기대를 걸지 못하게 된 결과였다.
올리버의 미군정 비판 발언이 11월 중순에 보도된 것은 하지-이승만 관계의 한계를 측근들까지 이미 감지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올리버가 생각한 남조선 주둔 미군 중 불량분자 2000명에 누구누구가 포함되었을까. 하지? 러치? 헬믹?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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