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주당이 11월 15일 기자단 회견에서 발표한 담화문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북조선에서 거행된 선거 상황을 보면 공산 계열의 각 단체 대표로 조직된 선거 위원들이 도 혹은 군과는 인연이 먼 사람을 입후보자로 인정하고 선거 전에 청년 부녀 학생들을 총동원하여 입후보자에게 찬성 투표하라 권유하고 선거장에는 백 흑 양 상자 중 하나를 투표케 하였다. 이러한 부자연한 투표에서 공평한 인물이 나올 리 없고 공산계 인물만이 독점할 것은 동구주 소련군 점령지의 선거와 마찬가지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16일자)
11월 1일자 한민당 담화문을 7일자 일기에 소개했다. 입법 의원 선거가 "대체로 민의를 반영했다 할 수 있"으며 "조선 민족은 확실히 금반 선거에 있어서 그 자치 능력을 확인"했다는 담화였다. 입법 의원 선거를 이렇게 긍정하면서 이북 선거를 비판하는 것이 마치 제 눈에 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에 티는 잘 보는 것 같다.
오늘은 인민위원회 선거에 집중할 터이므로 입법 의원 선거의 문제는 눈감아두겠다. 한민당의 "부자연한 투표"라는 비판 내용을 먼저 살펴본다. "선거 전에 청년 부녀 학생들을 총동원하여 입후보자에게 찬성 투표하라 권유"하고 "선거장에 백 흑 양 상자 중 하나를 투표케 한" 두 가지 사실이 지적되어 있다.
엊그제 일기에 소개한 스트롱의 기행문 '북한, 1947년 여름'에 이 투표에 관한 한 여성 광부와의 대화가 들어 있다. 광부가 이렇게 말한 대목이 있다.
"정당은 우리 광산과 공장에서 모임을 주최하였고 인민들의 기호를 알아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함께 가장 적절한 사람을 추천하였던 것입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511쪽)
선거 전에 모임을 가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한민당 주장은 공산계에서 미리 정해놓은 후보를 지지하도록 이 모임에서 권유했다는 것이고, 이 광부의 주장은 이 모임을 통해 적절한 후보가 선택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한민당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볼 근거가 내게는 없다. 선거를 관리하는 쪽에서 미리 내정한 후보를 밀고 나간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 원칙으로는 주민들이 모임을 통해 원하는 후보를 찾아내도록 하는 것이 선거의 효과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관리하는 쪽에서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리고 지난 9개월간 임시인민위원회(임시인위)가 가동되어 왔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임시인위 담당자들은 인민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노력해 왔고, 많은 경우 이 선거는 그 담당자들에 대한 '재신임'의 의미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임시인위 체제가 재신임을 받아 정식 인민위원회로 발전하는 것이 이 선거의 목적이었다.
요즘 우리 정치계에서 '전략 공천'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에서 지도 집단이 강력히 필요로 하는 인물들을 낙하산으로 내려 보낸 경우가 없지 않을 듯도 하다. 그러나 인민이 선거에 만족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이 광부처럼 주민들이 알고 좋아하는 인물이 많이 후보에 올라야 했다. 낙하산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임시인위 체제를 통해 잠재적 후보자들이 충분한 검증을 받고 있었을 테니까.
후보 하나하나에 대한 찬부를 투표하는 '흑백함' 투표는 어릴 때부터 반공 선전에서 많이 듣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니 반공 선전 내용과는 많이 다르다. 흑백함 사용 자체가 비밀 선거 원리를 어기는 것처럼 얘기했는데, 그 점에서 아무 문제없는 것이었다.
흑백함 투표가 여러 명의 대표를 뽑는 데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스트롱의 기행문에서 알게 되었다. 1947년 2월 하순의 리-동 단위 선거 때의 이야기로 보인다.
부락 선거에서도 대단히 흥미 있는 방식으로 검은 상자와 흰 상자가 사용되었다. 한 마을에서는 12명의 후보 가운데서 부락위원회 위원 5명을 뽑게 되어 있었다. 각 투표자에게 12장의 투표 용지가 주어졌는데 그 용지에는 후보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투표자는 지지하는 후보자의 이름이 적힌 용지는 흰 상자 속에 넣었고 지지하지 않는 후보자 용지는 검은 상자 속에 넣었다.
"용지 전부를 흰 상자 속에 넣는 것을 어떻게 방지합니까?"라고 내가 물었다.
"방지할 방법은 없죠. 그러나 그런 경우 그 투표자는 자신의 뜻에 반해 투표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던진 표들은 어느 후보가 다른 후보보다 앞서게 하지는 못하니까요. 그는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만큼 흰 상자에 넣어도 되고 검은 상자에 넣어도 되며, 원한다면 찬성 투표든 반대 투표든 하지 않은 채 용지 몇 장을 집에 가져가도 됩니다. 만일 그가 어느 한 후보를 강력하게 지지한다면 그 한 사람에게는 찬성표를 던지고 나머지 후보들에게는 반대표를 던지게 되겠죠. (…) 투표 총수가 계산되고 흰 상자의 표와 검은 상자의 표를 점검하면 우리는 마을 주민의 의사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512쪽)
정말 흥미로운 방법이다. 민의 표출을 참 쉬우면서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12매의 투표용지를 구분할 독해력을 못 가진 투표자는 한꺼번에 두어 장씩 갖고 여러 차례 투표소에 들어가는 것도 허용되었다고 한다. 선거를 처음 해 보는 투표자들에게 참 친절한 투표 방법이다.
인민위원회 선거를 주관한 공식 주체는 임시인위였는데, 도-시-군 단위 선거의 후보 추천에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민전)이 나섰다. 여러 정당-단체들이 북민전 안에서 논의하여 단일 후보를 내고 찬반 투표에 붙였는데, 충분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복수 후보를 낸 곳도 있었다고 한다(<북한 50년사 1>(임영태 지음, 들녘 펴냄), 124쪽).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인 북로당도 정파적 입장의 전략 공천은 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선거 결과도 "이러한 부자연한 투표에서 공평한 인물이 나올 리 없고 공산계 인물만이 독점할 것"이라는 한민당의 짐작과 거리가 있었다. 1947년 2월 20일에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37명 중 북로당원은 86명(36퍼센트)이었고, 민주당과 청우당이 30명씩, 그리고 무소속이 91명이었다. 무소속 중 다수는 정치와 관계없는 현장 일꾼으로서 북로당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단독 후보 찬반 투표를 이북 주민들이 만족스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랑스러워 한 것으로 스트롱은 전한다. 단독 후보가 아니었던 리-동 단위 선거가 더 만족스러운 선거일 것이라고 스트롱 자신은 생각했는데, 주민들 생각은 다르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마을 선거에 호기심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 선거는 유권자의 선택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를 나눠본 한국인들은 이 방식을 상당히 원시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들에게는 정당 간의 합의에 따라 세워져서 인민들에 의해 인준되거나 거부되는 단일 후보 방식(single slate)이 보다 '발전된 방식'이었다. 그들은 단일 후보 방식에서는 후보들이 대중 집회에서 먼저 광범위하게 거론되고 최종적으로 추천되기 전에 모든 정당 지도자들의 심사를 받게 되므로 이 방식이 최선의 대표를 확보하는 데 보다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512쪽)
그저께도 얘기했듯 스트롱의 서술을 읽는 데는 그의 정치 성향과 북로당 측의 선전 효과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다수 이북 주민이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충분한 만족을 얻은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선출된 인민위원회는 임시인위와 다른 차원의 정통성과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소련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는 달랐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 소련군 사령부의 지도를 받거나 승인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성립을 계기로 소련군 사령부에 의한 인민 정권에 대한 지도와 감독은 사라졌고 행정권은 북한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북조선인민위원회에 관한 규정'에도 반영되어 나타났다. 이 규정의 제1조는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북조선 인민 정권의 최고집행 기관이다"라고 규정했으며 제12조는 "각 국장 및 부장은 북조선인민위원회에 복종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소련군 사령부의 인민 정권에 대한 간섭을 소멸시켰다. (김주환, '해방 후 북한의 인민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311쪽)
1947년 초까지 소련군을 완전히 뒷전으로 돌려보내는 이북에서의 변화와 군정청의 부속기구로 입법 의원을 겨우 만드는 이남에서의 변화를 대비해 보며 한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 입법 의원이나마 선거 같지도 않은 선거로 뽑은 '민선' 45명 의원에 '관선' 45명을 합쳐 구성한 것이었으니. 이제는 정치 발전에 있어서 남북의 격차 자체가 통일 건국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남의 정치 발전 지체는 미군정의 정책 등 이남 사정에 1차적으로 따른 것이었지만, 이북 사정에 영향을 받은 점도 적지 않다. 친일파와 지주층을 대거 남쪽으로 내려가게 함으로써 이남의 반동 세력을 강화시키는 등 일방적 '개혁' 조치가 이남 사정을 악화시켰고, 이북 좌익의 역량 강화가 이남 좌익의 진로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 점과 관련해 이른바 '민주 기지 노선'이 당시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남식은 '해방 전후 북한 현대사의 재인식'에서 민주 기지 노선에 대한 확고한 입장이 1948년 3월 북로당 2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의 보고에 나타났다고 한다.
8·15 해방 직후 우리 당은 소련 군대가 진주하고 있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오직 북조선에서 민주주의적 근거지를 튼튼히 하여 전 조선 민족을 완전히 해방하여 조선을 부강한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 기지를 닦아 놓아야 되리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였습니다. 북조선에 민주주의적 근거지를 튼튼히 닦으려면 오직 우리 당이 더욱 튼튼하고 강력한 대중적 정당으로 발전하여 광대한 인민 대중을 우리 당 주위에 결속·단결하여야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당은 북조선 각지에 산만하고 조직 체계가 서지 않은 각도 지방당들을 결속하여 북조선의 모든 유리한 조건과 환경들을 리용하여 적당한 정치적 임무들을 수행할 수 있는 강유력한 중앙 조직 기관이 북조선에 필요함을 인정하고 1945년 10월 중순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중앙국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15~16쪽에서 재인용)
김남식은 이 인용문에 이은 설명에서 "조선공산당 분국이 설립되면서 민주 개혁들을 착수해나간 것 자체가 이미 북한 지역을 혁명 기지화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1945년 10월 중순의 서북5도 당 대회에서 민주 기지 노선이 채택되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에 수긍한다. 그리고 "남한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은 민주 기지 노선에 대한 인식을 거의 가지지 못함으로써 북한의 민주 기지 역량을 과소평가할뿐더러 그를 부정 또는 격하시켜 남한의 혁명 세력 중심의 모험주의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고 비판했다.
이 방면의 내 공부가 얕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민주 기지 노선을 당시의 정답이었던 것처럼 내놓는 관점에는 불만을 느낀다.
김일성이 위의 보고를 행한 1948년 3월에는 이남 지역 사정이 민주주의 도입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낙착되고 있었지만, 1947년 초여름의 제2차 미소공위 때까지는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이남 사정을 완전히 비관하고 이북의 민주 기지 건설에 일방적으로 매진하는 데는 이북 지도층 내에서도 상당한 저항이 있었을 것 같다.
그 단계에서는 민주 기지 노선이 경합하는 여러 경향의 하나일 뿐이었다가 1948년 들어 북로당 노선으로 확립된 것이 아닐까. 앞으로 더 유의해서 살펴봐야겠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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