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포럼(공동이사장 임동원·백낙청)은 13일 서울 서교동 세교연구소에서 '남북당국회담 수석대표의 격: 역사,쟁점,대안' 이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가졌다.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정부가 제시한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갈 수 있는 총리급 회담을 비롯해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협상 철학이 아닌 전투 철학이 현 정부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협상이라는 것은 밀고 당기는 것이 기본이다.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어느 정도를 주고 무엇을 얻을 것인지가 중요한데 지금 너무 임전무퇴식의 발언을 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토론회에는 김창수 전 NSC 국장이 '격' 문제에 대한 쟁점과 대안을 주제로 공동 발제를 맡았다. 패널로는 고경빈 전 통일부 정책홍보본부장, 김연철 인제대 교수, 장용훈 <연합뉴스> 북한 전문기자, 정현곤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이 참석했다.
▲ 9일 10시 15분경에 시작된 남북 실무접촉은 다음날인 10일 오전 3시가 되어서야 종료됐다. 천해성(왼쪽) 남한 수석대표와 김성해 북한 수석대표는 종결회의를 하며 악수했지만 남북은 이날 합의문도 도출하지 못했다. 남북 당국회담 무산은 이때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 아니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통일부 |
통전부장, 통일부 장관의 카운터파트인가
이날 토론에서는 정부에서 제기한 장관급회담의 '격'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이유부터 거론됐다. 이종석 전 장관은 양국의 정치권력구조 차이에서 이 문제가 발생한다고 진단했다. 이 전 장관은 "북한의 내각에는 남북관계를 실행할 수 있는, 통일부와 격이 맞는 파트너가 없다"며 "넓은 의미로 보면 조평통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가 통일부의 상대라고 주장하고 있는 통일전선부(통전부)는 카운터파트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통전부는 통일부와 국정원의 업무 일부를 함께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 장관은 그러면서 "우리가 과거에는 통전부와 대화를 꺼리기도 했다. 통전부가 적화공작의 총본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통일부의 카운터파트로 통전부를 삼고 싶다면 통일부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높이거나, 아니면 통일부의 실질적인 역할을 지금보다 더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런 조건들이 성립돼야 통전부장 나오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인 문제를 제기하려면 우리도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는 주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창수 전 NSC 국장 역시 통전부장의 직급은 우리로 따지면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국정원의 대북 및 해외담당 업무, 통일부 장관 등을 포괄하는 부총리급 이라고 지적하면서 지금의 통일부장관의 상대방으로는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양건 통전부장이 노무현 정부 때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때 김 부장의 역할은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특사"였다며 통일부장관의 카운터파트로 통전부장이 나온 적은 없다고 설명했다.
조평통은 어떤 곳? 서기국 국장은 어떤 급?
통일부의 카운터파트로 적합한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 북한 대남기구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위상에 대한 문제도 제기됐다. 김창수 전 국장은 조평통을 단순히 조선노동당의 외곽기구라고 보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용순 대남비서가 통전부장을 겸임하고 있을 때 조평통 부위원장의 역할을 맡았다"며 조평통이 단순한 외곽기구가 아닌, 노동당의 특별기구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장용훈 북한 전문기자는 조평통이 통전부보다 훨씬 먼저 생긴 조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조평통은 남한에서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북한이 '남한을 적화통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민간단체까지 모두 망라해서 1961년에 만든 조직"이라면서 이후 대남정책을 조금 더 정밀하게 관리할 필요가 생겨 1978년에 통전부가 당 내에 설치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시대상황이 바뀌는 데 따른 북한의 변화를 우리가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남북 당국회담의 '격' 논란에서는 조평통이라는 기관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뿐만 아니라 북한이 당국회담 단장으로 내보낸 강지영 조평통 서기국 국장이 남한의 통일부 장관과 '격'이 맞느냐는 논란도 있었다. 이에 대해 김 전 국장은 "조평통 서기국장이 부위원장 하급직책이라고 보고 이에 따라서 차관급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의 조평통과 통전부에서 대남업무를 담당했던 안경호, 강관주, 한시해, 윤기복, 최우진 등의 경력을 분석해보면 대부분 서기국장과 부위원장 임무를 불규칙적으로 수행했다며 "조평통이 위원장-부위원장-서기국장 으로 서열화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전 국장은 그러면서 "북한이 협상대표를 선발할 때 당성이 강한 자, 정치투쟁에 능한 자, 신임이 두터운 자, 해당 협상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자 등을 우선시한다. 회담을 잘하는 사람을 회담일꾼으로 내세우고 수행원 가운데 실세가 회담을 통제하는 방식"이라며 "이런 북한의 협상전술을 파악하고 잘 대처하는 것이 북한 협상대표의 급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부, 전략은 세워놓고 일 벌였나
실무접촉에서 남북 당국회담 무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정부는 전략적 허술함을 너무 많이 노출했다. 장관급 회담을 먼저 제의해놓고도 이를 위한 실무접촉도 제의하지 않은 것이 전략이 부재함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정부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통일부 고경빈 전 정책홍보본부장은 "회담의 격식은 물론 중요하지만 남북관계의 현재 상황과 특성상 이를 결정적인 부분으로 인식하면 스스로 발목이 잡힐 가능성이 높다"며 "어떤 회담이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국력이다. 현재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협상에서 양측 대표가 '격'을 맞춘다고 대등한 협상이 되겠나"라고 반문했다.
▲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6일 오후 정부 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오는 12일 서울에서 남북 장관급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 제안 이후 따라와야 할 실무접촉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전략 부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례였다. ⓒ뉴시스 |
장 기자는 정부의 '격' 문제제기가 지난 정부와 다른 모습을 보이려는 의도의 연장선에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일정도 예전과 다르게 1박 2일로 잡았고 세부 일정 역시 회담의 연속이다. 참관이나 기타 행사 일정이 없다. 왜 북한인사들을 데려다가 밥을 먹고 참관을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인사들을 데려다가 남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북한 고위인사들에 대한 심리전 적인 요소가 있었다며 "전략적 목표 없이 (전 정부와) 다르게 하려고만 하다보니 굉장히 이상한 형태로 회담을 끌고 가려는 모양새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수석대표의 격 문제도 다르게 하려고만 했지, 다르게 해서 무엇을 어떻게 얻고자 하는 데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어서 파행을 겪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면서 '격' 문제를 제기한 청와대가 오히려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고 말했던 인사는 차관급이다. 그런데 통일부 장관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한다. 차관급이면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권한의 크기가 더 큰 것인데, 본인 스스로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접촉해야 VS 지금은 만나도 불신만 쌓여
남북당국회담이 무산되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종석 전 장관은 남북 총리급 회담을 제안했다. 그는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해 만든 조율기구가 남북 장관급 회담인데, 10.4선언에서는 이를 총리회담으로 격상시켰다"며 장관급 회담은 지금 이대로라면 수석대표 급 이야기하다가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전 장관은 "장관급 이하 당국회담 하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도 '격' 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을 풀려면 장관급 보다 상위회담에서 풀어야 하는데 당장 정상회담을 할 수 없지 않느냐"면서 격 이야기가 따로 필요없는 총리회담을 해야한다고 주문했다. 이 전 장관은 "총리회담은 새로운 형태가 아니라 기존에 남북이 갖고 있던 자산"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고경빈 전 본부장은 10.4 선언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총리급 회담이 열려야 하지만 총리급 회담이 사전 준비단계가 굉장히 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현재의 상황을 인정하고 미세한 부분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회담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 전 본부장이 제시한 미세 조정 방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회담 대표가 각각 최고지도자의 신임장을 소지해서 이를 교환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누가 오든 최고지도자의 뜻이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회담의 '격'을 따지는 명분으로 삼았던 '권한있고 책임있는 당국자'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난 9일에 열렸던 장관급 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을 재개하는 것이다. 고 전 본부장은 "북한이 개성공단이나 이산가족 문제를 먼저 제기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는 상태에서 의제 별로 별도 회담을 하기도 힘들다면, 지난번 실무접촉에서 어긋났던 사안들에 대한 대안을 들고 다시 만나는 게 좋다"며 한중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남북관계를 복구해야 남한이 주도적으로 중국을 설득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지금 대화를 재개해봐야 서로 불신만 쌓일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장용훈 기자는 "지금은 (대화의)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한데 남북이 접촉하면 불신만 더 쌓이는 것 같다. 이번 실무접촉에서 '격'도 합의하지 못했다. 그런데 의제가 합의 될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오히려 국제관계가 변하는 것을 보고 (양국이) 회담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방식으로 가야한다. 당분간 냉각기를 갖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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