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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하는 민족, 박해받는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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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하는 민족, 박해받는 민족

[해방일기] 1946년 11월 4일

1946년 11월 4일

11월 6일자 <조선일보>와 <자유신문>에는 [상해 3일 UP발 조선]의 바이라인 아래 이런 기사가 실렸다.

"중국인을 약탈하였나? - 조선서 귀국하여 피약탈(被掠奪)을 호소" (<자유신문> 제목)

이번 조선으로부터 귀국한 81명의 중국인은 신문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다.
"조선의 화교들은 차별 대우와 박해를 받고 있다. 일본이 항복한 이래 중국인에게 대한 약탈 살해 습격 등의 사건은 200여 건에 달한다. 중국에 살던 조선인이 고국에 돌아간 뒤로 중국인에게 대한 조선인의 감정은 악화되었다. 우리 귀환민 대표단은 인천 서울에 있는 중국상무회의 진정서를 가지고 오는 주일에 南京을 방문하고 정부에 대하여 화교의 보호를 요구할 예정이다. 현재 조선에는 중국의 영사관이 없으므로 사태는 더욱 곤란하다."

해방 후 조선, 중국, 일본 등 어느 나라에도 치안 불안과 물자 부족 등 어려운 문제들이 쌓여 있었다. 불안과 불만에 휩싸인 사회에서는 민족 간의 갈등이 격화되기 쉽다. 어려움을 타 민족에게 전가하려는 경향, 타 민족의 박해를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경향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일본에는 약 200만, 중국에는 약 300만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중국 중 만주에 약 200만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농민으로 정착해 있었다. 그래서 만주의 조선인은 절반가량 귀국하고 절반가량은 남아서 조선족 사회를 유지했다. 반면 만주 이외의 중국 내지에 있던 조선인은 절대다수가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만주로부터의 귀환은 관청이나 군대의 도움 없이 각자 알아서 한 것이고, 중국 내지로부터도 집계되지 않은 각자 귀환이 많았던 것 같다. 단, 1946년 3월부터 6월 사이에는 군정청의 주선으로 한꺼번에 수천 명씩 귀환선을 타고 들어온 동포들이 수만 명 있었다. 이때 중국 사정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민전의 6월 1일 담화가 눈길을 끈다.

"최근 중국으로부터 귀국하는 우리 동포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조선 교민의 일체 재산을 중국 관리가 몰수하고 공수로 돌려보냄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우리 동포의 대다수는 일제의 학정으로 인하여 국내에서 생활 근거를 잃고 생활의 방도를 찾아 중국으로 간 것이며 그리하여 각고면려로서 축재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재산을 몰수함은 인도상으로도 본 민전은 범죄자 친일파를 제외한 조선 동포의 일체 재산을 접수치 말 것이며 이미 접수한 것은 엄밀히 조사하여 반환하기를 요망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6년 6월 2일자)

국민당 정권 하의 중국 정부는 귀환 조선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방침을 많이 시행했다. 만주에서도 국민당 정권은 지역 토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조선인 박해 정책을 씀으로써 조선인 사회의 민심을 공산당으로 쏠리게 했는데, 대중의 인기를 끌기 위한 조선인 박해 정책은 내지에서도 많이 채용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사태를 살피는 데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도 필요하다. 민전 담화에서 재중 동포의 입장을 "일제의 학정으로 인하여 국내에서 생활 근거를 잃고 생활의 방도를 찾아 중국으로 간 것이며 그리하여 각고면려로서 축재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조선에 와서 해방 때까지 살고 있던 일본인 중에도 그와 비슷한 입장이 많지 않았을까? 당시 조선인은 일본인 개개인의 사정을 따지지 않고 일본인 재산은 모두 몰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식민 통치자의 권력에 기대어 '탈취'한 재산이지, '각고면려'의 결과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재중 조선인의 재산을 어떻게 보았을까? 만주에는 "일제의 학정으로 인하여 국내에서 생활 근거를 잃고 생활의 방도를 찾아 중국으로 간" 조선인이 많았다. 반면 중국 내지로 간 조선인은 일본의 침략에 편승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 중에는 '일본 국민'으로 현지 중국인들보다 우월한 입장을 누린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아마 많은 중국인의 눈에는 조선인이 침략자 일본인의 일부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조선인의 재산을 '각고면려'의 결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조선에서 중국인의 처지는 어땠을까. 1946년 가을 중국으로 돌아가 조선에서의 "차별 대우와 박해"를 호소한 81명의 중국인들은 조선에서 살기 어렵기 때문에 돌아갔을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부족한 물자를 중국에서 들여오는 밀무역이 성행하고 있었다. 조선은 중국 상인들에게 좋은 사업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는데도 조선을 떠나는 중국인들이 많았던 것이다.

아직 대외 무역이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10월 1개월 동안 인천에 중국에서만 들어온 물자는 홍콩을 비롯하여 각종 부식 물자가 도합 50여만 근에나 달한다. 이 가격을 헐케 보아 매 근에 평균 50원씩 치더라도 2500여만 원으로 계산되어야 한다는데 이것은 당국의 검사를 경유한 것이고 이외에 당국의 눈을 속여가면서 수입되는 것을 합치면 실로 놀라운 액에 달할 것인데 (…) 조선인 모리배에 단호한 단속과 처단이 있어야 함은 물론 중국 밀무역자들도 이때에 강력한 법의 힘으로 엄밀히 단속하여야 할 것으로 논의되고 있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30일자)

남조선과 일본은 같은 맥아더 사령부의 관할이었기 때문에 조선인과 일본인의 귀환이 순조로웠다. 남조선에 있던 일본인은 1946년 9월까지 300명가량만이 남아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반면 1946년 9월 4일자 <서울신문>에는 130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에서 귀환했지만 아직 64만7000명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일본인보다 조선인의 귀환이 더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 일본이 맥아더 사령부의 직할지였기 때문에 일본인의 귀환을 미군이 더 중시했다. 둘째, 일본인은 침략자로서 보복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귀환에 최선을 다한 반면 일본의 조선인에게는 그런 염려가 없었다. 셋째, 조선의 열악한 사정 때문에 귀환을 꺼리고 일본에 잡아 놓은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조선인이 많았다.

1946년 여름 들어 일본에서 돌아온 조선인이 다시 일본으로 밀항하는 '역류' 현상이 늘어난 사실을 9월 2일자 일기에 적었다. 6월까지 1000명 선이던 조선인 밀항자 체포가 7월부터 1만 명대로 늘어난 것이다. 재일 동포의 열악한 지위 문제는 지금까지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고, 1946년 상황이라 해서 특별히 일본인의 환영을 받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많은 귀환자가 체포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을 향한 것은 미군정 치하 조선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한 것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10월 들어 일본 밀항이 더욱 늘어났으리라는 것은 증거 없이도 확언할 수 있는 일이다. 패전 국민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있던 일본인들 중에는 미군의 횡포에는 항거하지 못하면서 전에 열등한 존재로 여기던 조선인의 위상이 바뀐 데 분통을 터뜨린 자들도 있었다.

[동경 5일발 공립] 일본 진보당의 한 의원이 조선인에 관하여 발언한 건에 대하여 재일조선인연맹 중앙총본부에서는 그 발언의 취소와 진사를 요구하는 강경한 태도로 진보당과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작일 진보당에서는 총무회장 犬養 기타 간부가 동 연맹대표와 회견하고 대강 다음과 같은 회담을 하였다.

'의회 각파의 의향으로서 중의원 내에서의 언론은 각국의 통례와 같이 이것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것과는 별개로 조선인과의 감정을 일으킨 사정이 일어난 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요 국제 관계 특히 동아 제 민족 간의 관계를 저해하는 것이므로 또다시 이런 불상사가 나지 않도록 선처하겠다. 일본재주의 조선 국민은 여러 가지로 살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 듯하다. 우리는 자진해서 동아민족의 일원으로서 협력하겠다'고 하여 이 문제에 대한 진사의 뜻을 표하였다. 재일본조선인연맹에서는 이것을 양해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7일자)


문제가 된 樵態三郞(椎熊이라고 한 신문기사도 있음) 의원의 의회 연설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 종전 당시까지 일본에 재주하여 일본인으로서 생활하고 있었던 대만인, 조선인 등이 종전과 동시에 흡사히 전승 국민과 같은 태도를 하고 방약무인의 행동을 감행해 왔던 것은 실로 아등이 취시할 수 없는 바이다. (박수)

최근에 이르러 한번 귀국하였던 그들이 특히 조선인에 있어서는 혹종의 조직력을 가지고 재차 일본에 밀항 잠입하려는 자가 축일 증가하여 九州 山陰 방면에 있어서 그 수 실로 수만에 달한다고 듣는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 경찰력의 미약함을 틈타서 흉기를 가지고 도당을 짜고서 놀랄만한 흉악성을 발휘하여 당해 주민의 생활을 위협하는 것은 실로 언어에 절하는 감이 있다고 듣는다. (박수)

지금 아직 내지에 있어 외국인이란 특수한 지위를 악용하여 경찰력의 무력화에 틈타서 모든 불법을 감행하는 자가 다수 있다는 것은 이미 제군도 양지할 것이다. 우리는 유감하나마 패전 국민이기는 하지만 종전의 순간까지 동포로서 같이 이 나라의 질서 밑에서 생활한 자로 갑자기 변해서 흡사히 전승국민과 같이 게다가 (…) 그 행동은 패전의 고통에 신음하고 온 우리에게 있어서 참말 전신에 혈조가 역류하는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다. (박수)

그래서 그들은 특수한 입장에 서서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서는 암취인을 하고 있어 일본의 상업 암취인의 근원은 바로 금일 이 불령 조선인 등이 중심이 되고 (…) 혹은 금제품을 대로상에서 밀매하고 혹은 노천을 점거하고 경찰력을 모멸하면서 백주 공공연하게 취인하고 (…) 만약 이 문제를 이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바로 남방방면에 있어서의 화교의 세력과 같이 일본의 중소 상업권이라는 것은 그들의 수중에 장악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있다. (박수) (…) 현재 神戶, 大阪같은 데는 노천상, 음식점의 전부가 대만인, 조선인으로서 장악되고 있다는 사실은 내무당국은 어떻게 보는가?"


물자 부족은 어디나 마찬가지였지만, 치안은 일본 쪽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조선인은 상대적인 행동의 자유와 조직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가에게 묻다>(김효순 지음, 서해문집 펴냄) 127~129쪽에서 알아볼 수 있다. 좌익 활동에 대한 서술이지만, 그런 자유와 조직력이 먹고 사는 일에도 활용되었기 때문에 분통을 터뜨리는 일본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1945년) 10월 10일 후추 형무소에서 사상범들이 풀려났을 때 환영 인파의 다수는 조선인이었다. 태극기를 든 조선인들이 형무소 앞으로 몰려와 김천해 등 공산당 지도자가 나오자 환호성을 올렸다. (…) 조선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일본의 혁신 진보 세력이 일제의 군국주의 통치 아래서 거의 궤멸 상태에 빠져 전후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상당한 진통을 겪었음을 뜻한다.

(…) 정치범 석방 운동의 주역을 조선인이 담당했다는 것은 전후 일본의 정세 흐름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재일 조선인들은 일제 강점기에 공산당과 일본인 공산주의자 노동 운동가들을 해방 투쟁의 원군으로 생각하고 동지적 유대감을 가졌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노동자와 연대해 혁명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정서가 전후에도 이어져 일본 공산당의 재건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하부 조직에 많이 참여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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