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1월 1일자 <조선일보>에 조그만 기사 하나가 실렸다.
목포에서 폭동이 일어나서 1일 광주로부터 무장 경관 50명이 파견되었다 한다. 한편, 경찰서도 점령을 당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월 31일의 이 사건과 관련된 김대중의 회고가 있다.
목포에서도 파출소가 습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내가 그 화를 입었다. 사건이 났을 때 나는 처가에 있었다. 만삭인 아내가 해산을 하려고 친정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딸을 낳았다. 하늘의 귀한 선물이었다. 나도 아내도 무척 기뻤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우익 단체 사람들이 들이닥쳐 그들의 아지트 같은 곳으로 나를 끌고 갔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나에게 그들은 다짜고짜 파출소 습격 주모자라며 겁박을 했다.
(…) 나는 무참히 두들겨 맞았다. 멍 자국이 전신에 구렁이를 감아놓은 듯했다. 없던 일을 자백하라니 미칠 일이었다. 그날은 처갓집에 있었기에 처가 식구들이 다 알고, 산파도 증언할 수 있음을 누누이 설명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매질뿐이었다. 그렇게 사나흘 동안 매타작을 당하다 경찰서로 넘겨졌다. 그러자 장인이 경찰서로 찾아왔다. 장인은 피투성이가 된 채 구석에 처박혀 있는 사위의 몰골을 보고는 펄펄 뛰었다. 장인이 고함을 질렀다.
"내 집에서, 내 눈앞에 앉아 있었는데 무슨 짓들이오? 이럴 수 있는 거요?"
그러자 경찰들도 어쩔 수 없었는지 풀어주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내게 앞으로 처신 잘하라고 훈계를 했다. 데려다 죽도록 두들겨 패고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풀어주면서 또 윽박질렀다. 하기야 그때는 기가 막힌 세상이었다. 재판도 없이 아무나 그냥 끌고 가서 아무 데서나 죽였다. 죽은 자들만 불쌍했다. (<김대중 자서전 1>(삼인 펴냄), 63~64쪽)
1924년생 김대중의 22세 때의 일이었다. 혈기방장한 나이에 해방을 맞은 김대중은 그때 이미 정치에 뜻이 있어서 조선신민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신민당이 좌우 합작 노선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6년 상반기의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신민당을 떠난 것은 당내의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날, 당원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물론 공산주의 성향의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당시에는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우리 조국이라고, 적기를 우리 국기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나는 그걸 믿지 않았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호통을 쳤다.
"어떤 놈들이든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고, 붉은 깃발을 우리 깃발이라고 하는 놈은 때려죽여야 한다."
지금 생각해도 좀 격한 말이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나를 노려보고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성향의 당원들은 "해방의 은인한테 그럴 수 있느냐"고 거품을 물었다. 나는 다시 큰 소리로 반박했다.
"은인은 은인이고 민족은 민족이지 않은가. 그렇게 말한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내뱉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대중 자서전 1>, 62쪽)
좌익 경력 시비에 오랫동안 시달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와 선을 그은 일이 회고 중에서도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파출소 습격 사건 때 그를 빼내준 장인 차보륜은 인쇄소를 소유한 재력가로 한국민주당 목포 지부 부지부장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 신분이라면 사위가 실제로 자기 집에 있지 않았더라도 "내 눈앞에 앉아 있었"다고 큰소리치며 빼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장인의 보호를 받으면서 김대중도 지역 사회에서 우익 인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몇 년 후 전쟁 때는 인민위원회에 연행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연행되었을 때 혐의는 '밀고'였다.
목포경찰서에서 인민군 정치보위부 장교의 취조를 받았다. 그는 인근 산악 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유명한 산사람 출신 김성수였다. 그는 대뜸 "우리 동지들을 몇 명이나 밀고했냐"고 물었다. 그런 일 없다고 대답하자 내 뺨을 때렸다.
"우리는 네가 우리 애국자를 밀고할까 봐 얼마나 신경 쓴 줄 아냐? 그런데도 아직 바른말을 안 하는 걸 보니 반성을 안 했구만. 당장 가둬버려!"
나는 목포형무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심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냥 버려두다시피 했다. 그들은 나를 조사가 필요 없는 악질 반동으로 여기는 듯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네에게 협력할 의향이 있느냐, 의용군에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내게는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김대중 자서전 1>, 76~77쪽)
밀고를 추궁했다는 것은 좌익 내부 사정을 알고 있으리라고 추정했다는 것이다. 김대중의 회고 중에도 그런 추정을 할 만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좌익 정당인 신민당에 가입한 일이 있을 뿐 아니라 건준에 가입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후에도 인민위원회에서 계속 활동했다.
목포 지부는 처음 이남규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했지만 곧 공산주의자들이 점차 조직을 장악해 나갔다. 공산주의자들은 일제 시대 독립 투쟁을 주도적으로 전개했고, 투옥된 애국지사들 중 상당수가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던 만큼 해방 공간에서 그들의 입지는 넓었다. 당시 청년층 대부분은 공산주의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고, 일부에서는 일제 시대 때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운동을 하였다고 하여 호감을 나타내는 경향도 있었다.
나 또한 공산당에 특별한 거부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솔직히 일제라는 암흑시대를 겪고 난 후 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오직 새 나라에 대한 희망과 내 나라에 대한 열정으로 건준에 참여했다. 나는 목포 지부의 선전부 과장을 맡아 기쁘게 일했다. 조국 재건에 청춘을 바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벅찬 일이었다. 이보다 보람찬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 얼마 후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고 나자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바뀌었고, 목포 지부도 인민위원회 목포 지부가 되었다. 이남규 목사는 순수한 뜻이 훼손되었다며 조직에서 탈퇴했다. 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격문을 쓰고 벽보와 전단지를 제작하거나 신문 발표용 보도문을 작성했다. (<김대중 자서전 1>, 59~60쪽)
인민위원회 일을 언제 그만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 파출소 습격 사건으로 체포당할 때 그만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때까지 인민위원회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담 혐의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우익 유력 인사인 장인의 보호 아래 들어갔기 때문에 인민위원회 내부 사정을 우익 쪽으로 누설한 것이 아닌지 몇 해 후에는 좌익 쪽으로부터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김대중은 30세 때 국회의원 출마를 기점으로 평생 직업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한국 정치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상은 밝혀질 만큼 밝혀져 왔다. 굳이 자신의 회고가 아니더라도 청년기의 그가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을지는 대충 짐작할 만한 일이다.
해방 직후의 조선에서 공산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청년이라도 민족의 장래에 대한 희망을 좌익 방면에서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좌우 대립의 심화에 따라 중도적 입장의 막연한 희망은 설 땅을 잃게 되었다. 1946년 10월 대구에서 시작된 전국적 소요 사태는 대립 격화의 큰 분수령이었다.
<위키백과>에는 "1947년, 김대중은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민당 목포 지부에 입당하여 시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하는 대목이 있다. 자서전에는 없는 내용이다. 근거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럴싸한 일로 생각된다. 1946년 10월 이후의 남조선에서는 정치에 의지를 가진 청년이라도 희망이 아닌 필요에 의해 정당을 선택해야 할 상황이 되었으니까.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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