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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 惡? '인간 본성' 따위는 없다!

[프레시안 books] 닐 레비의 <신경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은 선인가 악인가?

인간의 본성이 선인지 악인지에 대한 논쟁은 역사와 문화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면서 수천 년을 이어왔지만 아직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애초 이 논쟁은 고대 중국에서 현실 정치의 필요에 의해 제기되었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 그것이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동아시아 특히 조선에서는 대체로 맹자의 성선설이 우세하여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性)을 선(善)이라 했다. 여기서는 남의 불행을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었다. 이 마음은, 물건을 훔치러 남의 집에 들어간 도둑일지라도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는 순간 뛰어가서 구할 마음이 생긴다는 이야기로 잘 설명된다.

서양의 기독교 전통에서도 신의 자비와 이웃 사랑이 강조되지만 맥락은 많이 다르다. 착한 사마리아 인의 설화가 그렇다. 여기서는 이웃을 도우려는 '마음'보다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강도를 당해 상처 입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행위'가 강조된다. 여기서 칭찬받는 것은 이타적 본성이 아니라 이기적 본성을 억누르는 의지와 그 결과인 선행이다.

물론 서양인에게 사람들끼리 고통을 나누는 본능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이 그 중요성을 무시했던 것도 아니다. 동양인이라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남을 속이는 사람들의 속성을 몰랐을 리 없다. 인간의 이해 타산적 본성을 간파한 법가의 한비자는 선행인 것처럼 보이는 행위가 실은 이기적 목적에 복무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손이 질서를 잡아준다고 주장한 애덤 스미스는 역설적이게도 연민과 동정을 강조한 도덕철학자이기도 했다.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과 주장은 위험한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제시한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의 원리는 적자생존 또는 약육강식으로 둔갑하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흉기가 되었다. 자연 선택을 인공 선택으로 변조한 뒤 인간에 적용한 우생학은 수백만 명의 무고한 인명을 절멸시키는데 활용된 이념적 대량 살상 무기였다.

이와 같은 심각한 남용에도 불구하고 현대 유전학과 결합한 진화 생물학은 생물학의 모든 분야에 적용 가능한 설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생물학에서는 그 어떤 것도 진화에 비추어보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의 선언이 나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진화 생물학의 논리를 모든 사회 현상에까지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나왔다. 이는 인간의 다양한 심리 현상을 자연 선택의 원리로 설명하려는 진화 심리학으로 발전했고, 그렇게 선택된 적응의 결과를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활용하려는 진화 윤리학도 나왔다.

여기서는 인간의 신체적 형질뿐 아니라 생각의 방향이나 느낌 그리고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까지도 자연 선택을 통한 적응의 결과로 본다. 물론 실제의 논의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증거 자료로 뒷받침되지만, 대중에 전달되는 메시지는 무척 단순하다.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진화를 유전자의 이기적 행동에 의해 추동되는 과정으로 설명하지만 또한 그런 유전자에 대항해 협동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책을 읽은 시대를 앞서가는 지식인마저도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임을 주장하는 책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세상과 인간을 선과 악, 이기와 이타, 본성과 양육 등 이분법으로 이해하려는 진화적으로 뿌리 깊은 인지적 성향 때문이다.

이분법이 무너지다

그러나 주로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뇌 과학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이런 이분법적 이해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함을 일깨워주기 시작했다. 마음이 몸의 주인이고 인간은 자유 의지를 지닌 주체로서 자신의 모든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상식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과거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던 신경 손상 환자들의 인지와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도구를 가지게 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사고로 뇌의 전두엽에 손상을 입은 환자가 있다. 합리적 사유 능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아주 작은 충동도 억제하지 못해 이 환자의 대인 관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면 그를 도덕적 주체로 볼 수 있을까? 뇌졸중으로 신체의 한쪽이 마비된 환자가 자신의 몸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그 부분을 움직이지 않는('못하는'이 아닌) 엉뚱한 이유를 둘러대거나(질병 인식 불능증), 잘려나가 없는 손끝에서 계속 통증을 느끼는 현상(환상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몽유병 환자가 자신의 행위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고통스런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울 수 있다면 그 기술을 사용해도 좋은가?

신경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 <신경 윤리학이란 무엇인가>(닐 레비 지음, 신경인문학연구회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닐 레비의 <신경 윤리학이란 무엇인가>(신경인문학연구회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위와 같은 신경 과학의 사례로부터 인간 존재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들을 찾아낸다. 이 모든 질문들은 우리가 세상을 알며 살아간다고 할 때 그 앎과 삶이 뇌 신경계를 통해 매개된다는 생물학적 사실에서 비롯된다.

과거의 사회 생물학에서 진화한 진화 심리학과 진화 윤리학은 우리 앎과 삶의 보편적 경향성을 생존과 번식에 유리해서 살아남은 형질 즉 적응의 결과로 이해한다. 남자의 바람기와 여자의 상대적 조신함은 남성과 여성이 각각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퍼뜨릴 수 있도록 적응한 삶의 경향성이라는 식이다. 신경 윤리학도 크게 보면 진화의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과 번식의 극대화를 위한 일차 본능 외에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본능 그리고 사태를 객관화하는 이차 본능 또는 합리적 사유를 담당하는 커다란 대뇌피질을 진화시켰다. 이에 따라 진화의 법칙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만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뇌의 각 부위는 특정 기능에 특화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간에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하위 모듈(sub-personal module)들이 경쟁적으로 생물학적 자원들을 취하며 만들어내는 역동적으로 변하는 신경의 활성화 패턴이 나를 구성한다.

"우리는 개인의 하위 메커니즘의 집합일 뿐이며,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성은 단지 이 우둔한 메커니즘들의 성공적인 결합의 산물일 뿐이다. 그것들이 우리이다." (364쪽)

우리의 인지 구조가 사회적 환경과 문화에 크게 의존한다는 경험적 증거도 많아지고 있다. 우리의 뇌는 태어날 때 배선이 끝난 폐쇄계가 아니라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여 끊임없이 새로운 배선을 만들어내는 개방계라는 것이다. 이런 증거들은 우리의 삶을 유전자의 펼쳐짐과 생존과 번식의 극대화라는 기본 구도 속에서 이해하려 했던 과거의 사회생물학과는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확장된 마음

사회생물학이 사회를 생물학적 진화의 법칙이 관철되는 공간으로 보았다면, 레비의 신경 윤리학은 사회와 환경을 인지 구조 속에 포섭한다. 사회와 환경을 역사가 담긴 마음의 한 속성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뇌 속에 새겨진 생물학적 마음과 그것들이 만들어낸 사회 문화적·자연적 환경이 서로 교통하는 것을 '확장된 마음'이라 한다. 뇌 신경계와 인간이 만든 사회 환경의 통합이다.

"우리는 인지와 외부 도구를 쉽게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을 적응적 성공을 통해서 소유하게 된 동물이다." (67쪽)

우리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와 같은 도구뿐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공동체로도 마음을 확장할 수 있다. 유전자가 인간의 본성을 포함한 모든 정보를 간직한 블랙박스가 아니듯이 뇌 또한 마음의 블랙박스는 아니다. 마음은 "뇌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해 있는 역동적인 환경에 의존해 있는 것"(6쪽)이며 그렇게 보았을 때 우리가 처한 윤리적 문제를 보다 잘 다룰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어렸을 때 학대를 당했던 경험 때문에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가 있다고 하자. 신경 과학 기술로 그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할까? 아직은 과학 소설(SF)에나 등장하는 요원한 기술이지만 원리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레비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전에 확장된 마음이라는 틀 속에서 문제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확장된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뇌 속의 특정 부위나 신경 전달 물질을 조작하여 원하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은 사회적 환경을 변화시켜 동등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에 비해 훨씬 낯설고 비효율적이며 위험할 수도 있다. 마음이 다른 사람과 환경으로 확장되어 있다고 본다면, 과학기술로 기억을 지우는 것과 사회 환경의 변화를 통해 그 기억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동등하다(동등성 원리). 레비의 신경 윤리학이 과학기술을 현실에 적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는 응용 윤리를 넘어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 의지는 없다?

신경 윤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 중 하나가 자유 의지의 문제다. 어떤 '행위'를 일으키는 신경 세포가 그 행위의 '의도'를 부호화한 신경세포보다 먼저 발화한다는 벤저민 리벳의 실험은 인간이 과연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비약했다. 그러나 이런 비약은 신경 조직을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행위의 원인과 결과에는 분명 인과 관계가 존재하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이 직선적이고 기계적인 인과 관계일 필요는 없다. 생물학에서 수많은 되먹임 고리가 있는 복잡한 인과 관계는 예외가 아닌 법칙이다. 확장된 마음에서는 개인의 자유 의지조차 이렇게 복잡한 되먹임 고리들 속에서 탄생한 일종의 개념적 허구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신경계의 조정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인형이란 말은 아니다. 내가 저지른 범죄는 나의 뇌가 시켜서 한 행동이므로 나는 책임이 없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확장된 마음 이론은 자유 의지를 부인하기보다는 자유 의지라는 것을 상정해야만 했던 우리의 인식구조를 문제 삼는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인간의 본성이 선인지 악인지의 논쟁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 논쟁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블랙박스로 상정한다. 어느 경우에나 몸과 마음은 유전자나 뇌 속에 있으며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 선인지 악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확장된 몸과 마음 이론에서는 유전자와 뇌를 열어 세포와 조직과 기관과 몸 그리고 환경과 섞어놓는다. '나'라는 고립된 성(城)은 없다. 나의 의지라는 것도 내 속에 있는 어떤 유령의 명령이 아니라 나의 유전자와 신경 세포가 다양한 체내 환경과 사회 문화적 환경 속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어떤 경향성이다. 도덕이란 몸의 조성과 살아온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자연과 사회에서 만들어 온 공통의 경향성을 체계화한 것이다.

옳고 그름과 좋고 싫음의 윤리

신경 과학에서 보고되고 있는 다양한 임상 사례들은 변치 않는 자아라는 전통적 관념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동일한 신체 속에도 다양한 정체성이 있을 수 있다고 해석되는 사례는 무척 많다.

마비된 자신의 반쪽이 멀쩡하게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질병 인식 불능증과 거꾸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남의 것으로 인식하여 계속해서 몸에서 제거하려고 하는 신체 통합 정체성 장애도 있다. 나의 믿음이 객관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정치인도 많다.

신경 윤리학은 우리들 속에 우리를 그렇게 인지 부조화와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게 만드는 진화적 계기와 신경학적 메커니즘이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옳고 그름(善惡)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좋고 싫음(好惡)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일단 좋고 싫음의 감정이 발생하면 그 느낌에 따라 옳고 그름의 판단을 덧붙이는 식이다.

정치적 좌파는 대개 선악의 기준에 호소하고 우파는 호오의 감정을 자극한다. 이번 선거에서 횡행한 네거티브가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이미 자기편인 사람들을 확실히 묶어두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선거 막판에 뜬금없이 색깔론을 들고 나오는 우파의 비열한 행태를 절대로 옹호하거나 용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전략이 유효할 수 있는 근거는 분명히 있다. 그것은 냉전 시대에 형성된 안보 지상주의의 인지 구조를 자극하여 옳고 그름의 판단을 좋고 싫음의 구도에 묶어버린다.

다시 확장된 마음으로

좋고 싫음은 단기적 생존에 유리한 본능이지만 옳고 그름은 장기적 전망에서만 성립하는 합리적 기준이다. 신경 윤리학은 수십 명이 모여 살던 석기 시대에 형성된 생존의 본능을 수천만 명이 함께 사는 문명 시대의 공동선과 조화시키는 사명을 가진 새로운 학문이다.

신경 윤리학은 사회생물학(진화 윤리학)처럼 생존과 번식의 유·불리에 따라 선택된 경향성들을 윤리의 기준선으로 삼지만 자연 선택의 법칙마저 초월할 수 있는 신경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것과 구분된다. 석기 시대에 형성된 심리적·윤리적 경향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극복할 잠재력을 가진 신경계 그리고 그것을 사회 문화 현상과 연결시켜 확장된 마음을 만들어내는 진정한 통학문적(通學問的, trans-disciplinary) 담론인 것이다.

이 책은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꼭 필요한 국내에 소개된 최초의 저작물 중 하나다. 하지만 결코 읽기가 쉽지 않다. 영미의 분석 철학과 대륙 철학을 모두 공부한 저자 레비가 첨단 신경 과학의 최신 지견을 철학적 사유의 재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내가 이 글에서 그랬듯이 나름대로의 독서법으로 나름대로의 의미와 메시지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변치 않는 본성이 없듯이 책 속에도 불변의 메시지는 없다.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이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일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바로 확장된 마음의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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