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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독식 사회, 제대로 사는 방법은…

[철학자의 서재] 마르틴 하이데거의 <숲길>

우리가 누군가의 책을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누군가가 그들이 삶을 살았던 당대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질문을 던지는 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년)는 당대의 현실에 제대로 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을 중요한 철학적 과제로 생각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인기를 얻은 <존재와 시간>에 대한 창조적 오해로 인해 현실 변화에 무관심한 실존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또 한편으로 그는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에 취임했던 당시의 일련의 행적들로 인해 평생 나치 부역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된다.

그런가 하면 그는 대학에서 은퇴 후 영면하기 전까지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에서 방문객을 제한하고 고독하게 생을 살다간 덕에 은둔의 철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이러한 일련의 이름표들 뒤에, 현대 자본주의의 부의 독점화 현상과 그러한 독점을 가속화시키기 위한 전쟁이 성립하는 이유에 대한 치열한 질문을 담고 있다. 그의 주요한 질문거리는 서구 근대 사회에서 이러한 기괴한 현실을 가능하게 한 서구 형이상학적 사유에 관한 것이다.

<숲길>(신상희 옮김, 나남출판 펴냄)에 실린 강연문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1943년)과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1946년)는 서구 근대 사회에서 존재자 전체가 교환 가치로 환원되고 국가가 자원 약탈의 전쟁을 일삼는 당시 유럽 현실에 대한 한 지성인의 물음을 담고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당시 유럽의 이러한 현실에는 서구 사유가 전제하는 형이상학의 안경이 자리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대 자본주의의 근저에는 자본주의와 전쟁 혹은 국가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형이상학적 사유 방식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근대 형이상학의 안경

▲ <숲길>(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신상희 옮김, 나남출판 펴냄). ⓒ나남출판

하이데거가 그의 저술 시기 60여 년 동안 시종일관 물어온 것은 존재 물음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전통 형이상학의 역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말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전통 형이상학이 존재를 망각했다는 하이데거의 언급을 전통 형이상학이 존재를 그 무엇으로도 규정하지 않은 것처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전체 서구 형이상학은 끊임없이 존재를 무엇인가로 규정하고 해석해 왔다.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를 원인으로 해석해 왔으며, 존재자를 원인으로부터 야기되어진 것으로 이해해 왔다. 고대와 중세 형이상학이 존재를 최고의 원인으로서의 신으로 이해하고, 신을 세계 만물의 제작자로서 이해했을 때, 나머지 존재자들은 이러한 제작자로부터 야기되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존재가 원인으로 이해될 때, 그리고 존재자가 원인으로부터 야기된 것으로 이해될 때 존재자가 갖는 그 자체로서의 존재자다움은 그것을 있게 하는 원인에로 환원된다. 존재를 원인으로 존재자를 그로부터 야기되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존재 해석은 다시 존재자들의 세계를 세속적 세계로 그리고 존재의 세계를 세속적 세계를 초월해 있는 초감성적 세계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낳는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안경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 전체는 신 혹은 이데아가 감성적 세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전개된 결과가 된다. 그렇기에 하이데거에 의하면 서구 사회에서 초감성적 세계는 그 자체 진리이며 가치의 중심이 된다. 그런데 모든 가치와 진리의 원천이 원인으로서의 신이자 초감성 세계에로 귀결될 때 현실 세계에서의 삶은 긍정될 수 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세속적 세계는 피안에 있는 영원한 행복의 산과는 구별되는 슬픔의 골짜기이다." (322쪽)

근대 서구인들은 구체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세계관을 이제 더 이상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추앙하지 않으며, 인간 스스로가 신으로 대변되던 진리의 자리를 대체하기에 이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서구 근대 일군의 학자들은 한 목소리로 '신의 죽음'을 선언한다.

젊은 헤겔이 '믿음과 앎'(1802년)에서 "근대의 종교 속에 깃들어 있는 심정은 신 자체가 죽었다는 심정이다"라고 고백할 때, 파스칼이 <팡세>에서 "위대한 판(Pan), 신은 죽었다"고 말할 때 그들의 저술 의도는 다를지라도 그들의 말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과 동일한 사태를 가리킨다. 근대 이후 인간은 "신을 죽이고" 스스로를 존재자 전체의 제작자로서 공표한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통해 니체는 현대 유럽 사회를 최고의 가치들이 그 가치를 잃어버린 허무주의가 만연한 사회로 선언한다.

최고의 가치가 무가치해졌다는 것은 서구 사회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신이 대표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도덕적 가치들이 인간들의 행동에 어떠한 구속력도 그리고 명령하는 힘도 가지지 못하도록 무력화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서구 사회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도덕적 초감성적 세계 속에서 진리를 구하는 서구 형이상학의 무력화 선언이다.

하이데거가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선언을 통해 비로소 서구 형이상학의 종말이 선언되었으며, 이제 근대인들은 스스로 진리와 가치의 수립자로서 거듭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스스로를 초감성적 세계의 진리와 가치의 목자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형이상학의 종말을 선언한 근대인은 스스로를 존재자를 존재자이도록 하는 존재를 설립하는 자가 된다. 니체에게 사물을 사물이도록 하는 존재는 초월적 신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힘에의 의지이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힘에의 의지로 갖는 한에서, 인간이 참으로 사는 길은 자신의 본질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개인, 즉 '초인(der Übermansche, Superman)'이 되는 길이다.

"모든 신들은 죽었다. 이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초인이 사는 세상이다."

하이데거는 잠언 형식의 글을 남긴 문학가로서 평가되어 오던 니체를 서구 형이상학의 완성자로 위치시킨다. 니체의 초인 사상은 근대 형이상학이 모든 가능성을 완전하게 발휘하고 소진하는 근대 주체성의 형이상학의 완성이다. 서구 고대와 중세에 존재자를 있게 하는 존재는 신이며, 존재자는 이러한 제작자로부터 만들어져 실존하는 것이라 이해되어 왔다. 그렇기에 신이 곧 진리의 척도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인간은 신을 죽이고 진리를 가치로 자리매김한다. 다시 말해 근대인은 스스로 가치 설립자가 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체에 이르러 진리는 가치가 되며, 가치가 힘에의 의지의 고양으로 설립할 때, 존재자 전체는 인간의 자기 고양을 중심으로 획일화되고 파괴된다. 그러기에 근대인은 존재자 자체의 살해자이다.

"(신을 살해하는) 살해 행위는 그것을 통해 존재자 자체가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가 그것의 존재의 면에서 다른 것으로 되는 과정을 지칭한다." (383쪽) "존재는 가치가 된다." (378쪽) "이러한 과정에서 무엇보다 인간 역시 다르게 된다. 인간은 그 자체로서 있는 존재자를 제거하는 인간이 된다." (383쪽)

근대인의 삶은 저울 위의 운동이다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에서 하이데거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즉흥시(1924년)를 해석한다. 하이데거가 릴케 시 해석에서 주제어로 삼는 것은 모험, 저울 그리고 중력이다. 하이데거는 릴케 시의 시적 매력을 걷어내고 릴케 시에서 보이는 근대 형이상학의 안경을 읽어낸다.

하이데거에게 릴케의 시적 사유는 니체 형이상학의 그늘 밑에 있다. 그렇기에 릴케의 매력적인 시어에서는 근대 형이상학의 사유가 보인다. 서구에서 고대와 중세에서 그러했듯이 서구 근대 형이상학에서도 존재는 제작자이자 운동의 원인이다. 릴케의 시에서 보이는 '모험'의 테마는 힘에의 의지를 본질로 갖는 존재자들의 '모험'을 가리킨다. 근대 형이상학에서 개개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모험'하는 것이다. 릴케의 시에서 힘에의 의지로서의 존재는 그때마다 존재자를 모험에 내걸고, 반대로 존재자는 모험에 내던져진 자로서 존재와 관계 맺는다.

릴케의 시적 사유가 니체 형이상학의 사유 안에서 움직이기에, 존재자들이 모험한다는 것은 존재자들이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최대한으로 발현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철학 개념 중에 "힘에의 의지"만큼 매력적이고 영향력 있는 개념도 흔치 않을 성싶다. 특히 사회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어떠한 완충 장치도 갖지 않는 그러한 사회에서 삶을 영위할수록 우리는 스스로가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어릴 적 부모님과 뉴스를 청취하면서 특정 정치인이나 시민에게 법의 판결이 지극히 부당하게 내려진 것에 분개하는 나에게 부모님은 한마디 하신다.

"억울하면 네가 판사가 되면 되는 거다."

그러나 존재자들의 존재 방식이 '모험함'에 있다면 그것은 존재자들에게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내는 삶의 방식이 허락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존재자의 운동은 존재라는 '저울' 위에 올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412쪽). 저울은 흔들거리다가도 어느새 스스로 균형을 잡는 물체이다. 그렇기에 저울 위의 운동은 저울의 기울기, 즉 저울의 진동 폭에 제한된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존재가 존재자에게 주는 존재 가능성은 중심으로서의 존재가 허용하는 한계 내로 제한되며, 존재자의 풍부함과 다양성은 존재에로 끌어들여진다. 그렇기에 존재자의 다양한 가능성은 매개하는 중심인 존재의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존재가 힘에의 의지인 한에서, 있는 것은 자신의 힘의 고양만을 고취하는 '의지에의 의지'인 힘에의 의지밖에 없다.

나아가 현대 기술 시대의 인간은 힘에의 의지를 고양하고자 하는 자로서, 스스로가 중심으로 있는 자이다. 중심으로서의 인간은 존재자 전체 속에서 자기 자신만을 대면한다.

"(기술 시대에) 인간은 단지 자기 자신과만 대면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근대 학문과 전체주의 국가는 힘에의 의지로서의 존재가 다양한 존재자 전체를 조직하고 설립하는 관계의 중심으로서의 스스로를 전개하는 필연적 결과이다(425쪽). 모든 학문을 하나의 통합된 방법론, 예컨대 양적 연구 방법론이나 자연과학의 방법론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특정한 현대 학문의 시도는 이러한 근대 형이상학적 시야 안에서 전개된 사고이다.

모든 학문을 통합하고자 하는 시도는 모든 것을 모험에 내맡기고 허용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하나의 중심에로 수렴해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시야를 전제한다. 마찬가지로 이는 근대 이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중앙 집권적 근대국가가 전제하는 형이상학적 시야이기도 하다.

이 거대한 우주에 우리만 존재한다는 것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세계는 본디 존재자들 전체의 관계망의 산물이며, 이러한 존재자 전체의 관계는 하나의 사물인 물 따르는 주전자 혹은 강둑을 잇는 다리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인간은 사물로부터 조건 지어진 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근대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조건을 망각하거나 회피하고 스스로가 중심이고자 한다.

인간 스스로가 중심이고자 할 때 존재자 전체의 관계망은 분리되고 획일화되고 황폐화된다. 그래서 근대 서구 사회에서 인간은 서구 역사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강력한 주체로 거듭난 듯이 보이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만나는 황무지를 경험하게 될 뿐이다. 서구의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신의 자기 드러냄의 계기이다. 그러한 세계 이해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신뿐이다. 서구 근대 사회의 완성에 이르러 이제 존재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영화 <콘택트>(로버트 저매키스 감독)에서 주인공 아버지는 딸 앨리 애로위(조디 포스터)에게 다음과 같은 울림이 있는 말을 전한다.

"이 거대한 우주에 우리만 존재한다는 것은 공간의 낭비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강을 4대강 사업으로 인간을 위한 관광 자원으로 변모시키는 것은 개별 존재자들이 갖는 풍요로움과 유일무이한 존재를 살해하는 행위이지 않을까. 존재자 전체를 이와 같이 인간의 거울로 만들어버리는 현재 우리의 삶의 방식은 큰 낭비이고 비극이다.

주체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견뎌내기

하이데거에게 세계란 본디 존재하는 것들이 자신의 풍요로운 존재를 전개하는 유희의 공간이다. 존재자들 전체의 유희 공간으로서의 세계는 개개의 사물을 통해 발현된다. 그리고 인간은 비록 끊임없이 주체가 되고자 하는 존재자라 할지라도 그러한 욕구를 견뎌내고 스스로가 사물로부터 철저하게 조건 지어진 자라는 사실을 감내해야 하는 자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 속에서의 인간은 세계와 사물에 대한 지배자이자 명령권자로 군림하는 오늘날, 기술 시대의 인간 존재 방식으로부터 방향을 전환하여 세계와 사물의 고유한 생겨남의 운동에 참여자로서 있을 때 본래적 삶을 살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은 기괴하다. 상위 1퍼센트가 부를 독식하고 99퍼센트가 빈자로 전락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기괴하다. 국가가 주도하여 마치 상상의 신도시를 건설하듯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강들을 헤집고 파헤쳐 관광 자원으로 만드는 현실은 기괴하다.

하이데거의 당시 유럽 현실에 대한 질문을 주의 깊게 듣는다면 현대 사회의 기괴한 현실 속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자 하는 우리의 실천은 더 현명해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물과 사물들의 전체 연결망으로서의 세계는 그 자체 변경 불가능한 객체와 같이 있지 않기에 주어진 현실 앞에서 미리 좌절하고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사물에 개입하는 방식은 사물과 세계를 상상의 공간으로서 기획하고 설립하는 지배자이자 제작자이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와 욕구를 견뎌내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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