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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가 주도한 엉터리 선거, 최대 수혜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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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가 주도한 엉터리 선거, 최대 수혜자는?

[해방일기] 1946년 10월 26일

1946년 10월 26일

'입법 기관'이란 말이 처음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946년 6월 29일 러치 군정장관이 하지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를 군정청 공보부에서 공개하면서였다. (<서울신문> 7월 2일자) '입법 기관', 또는 '입법 기구'란 이름으로 논의되던 이 기구가 8월 24일 군정청 법령 제118호로 발포된 "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으로 모습을 나타내고, 10월 하순 중 선거를 치른 뒤 12월 20일 개원하기에 이른다.

6월 29일 공개된 편지에서 러치는 각 지방에서 선거로 뽑은 대표와(민선 의원) 중요한 정당을 대표하는 자들(관선 의원)로 구성하여 조선 민중을 대표하여 발언할 기구를 제안했다. 그리고 이 기구는 독립된 정권이 아니라 조선인을 대표하여 행정에 참여함으로써 군정장관의 직무 수행을 돕는 것이므로 남조선 단독 정부가 아닐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치의 편지 공개 며칠 후 민전에서 반대 의견이 나왔지만 적극적 반대는 아니었다. 의장단 정례 기자 회견에서 질문이 있자 "제안의 주지와 성의에는 감사하나 정치적으로 지금 이러한 기관을 설치할 시기가 아니"라고 답변한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7월 5일자)

하지는 7월 9일 러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조선 정치인들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민전 의장단 정례 기자 회견에서도 1주일 전과 같은 뜻의 대답을 하고, 입법 기구가 좌우 합작과 별개의 일이라는 점만 강조했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10일자, <서울신문> 1946년 7월 5일자)

8월 24일 법령 제118호 발포까지 입법 기구에 대한 두드러진 논의가 없었다. 이 법령은 (1) 목적, (2) 입법 기관의 목적, (3) 설치, (4) 봉급, (5)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직무 및 권한, (6) 定員數, 議員發言의 면책특권, (7) 의원의 자격, (8) 의원의 선거 방법, (9) 임기, (10) 의장, (11) 군정청의 권한, (12) 시행 기일의 12개조로 구성되었다.

제3조에서 90명으로 구성하며 그 절반을 민선으로 한다고 한 것과 제5조에서 "일반 복리에 이해에 관계되는 사항 및 군정장관이 의탁한 사항에 관하여 법령을 판정함이 동의원의 직무임", 그리고 "동의원에서 제정한 법령은 군정장관이 동의하여 합법적으로 서명날인하고 관보에 공포하는 때" 법률의 효력이 있다고 한 데 이 기구의 기본 성격이 나타나 있다.

제7조에는 "일제 하에 중추원 참의, 도회 의원, 또는 부회 의원의 지위에 있는 자, 또는 칙임관 이상의 지위에 있던 자"는 자격이 없다고 했는데, "칙임관 이상"은 너무 높아 실효성이 없는 기준이었다. 후에 군정청에서는 번역의 착오였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제8조에서는 리정(里町)-면읍구(面邑區)-시군(市郡)-도(道)의 4단계로, 각 단계에서 두 명씩의 대표를 올려 보내는 간접 선거를 규정했다. 관선 의원의 선출 방법은 규정되지 않았다.

법령 제118호가 나올 무렵까지는 미군정이 좌우 합작을 지원하는 큰 이유가 입법 기구 설치에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7월 하순 합작위원회의 구성 때까지 합작에 열의를 보이던 허헌이 합작위원회에서 자취를 감추고 민전에서 합작을 실질적으로 반대하는 5원칙을 내놓은 것은 박헌영 일파가 입법 기구에 대한 미군정의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용욱은 이것을 공산당이 "미군정의 의도와 좌우 합작 운동 자체의 의의를 분리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함께 부인하는 오류"였다고 봤는데,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중심 펴냄), 151쪽) 합작 운동의 동력이 미군정에서 나오고 있던 상황을 감안하면 분리해서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좁은 것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좌우 합작과 입법 기구에 대한 미군정의 의도가 강경 좌파를 배제하고 온건 좌파를 끌어들여 온건 우파 중심으로 정계를 개편하는 데 있었다고 정용욱 자신도 파악하고 있는 만큼, 공산당의 정세 파악은 정확한 것이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지.

여운형은 좌익의 일부만이 합작에 끌려 들어가는 사태를 피하려고 극구 노력했다. 이남의 좌우 합작에 그치지 않고 남북을 아우른 대(大)합작을 바라보려면 공산당의 참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공산당이 빠질 경우 우익 잔치판에 들러리 서는 꼴이 될 위험도 꺼렸다. 그러나 8월 들어 좌익 합당을 둘러싸고 박헌영과의 대립이 극한으로 달려 인민당까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박헌영 일파의 참여를 포기하고 좌우 합작에 임하게 되었다.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이 미군정과 밀착되어 있고 조병옥, 장택상 등 극우파가 경찰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거, 그것도 간접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10월 하순에 강행된 입법 의원 선거에서는 좌익은커녕 중도파도 설 땅이 없었다. 좌우 합작의 여건을 미군정에 의지하고 있던 중도파는 선거를 최대한 공정하게 치를 수 있도록 하는 군정청의 조치를 전제로 입법 기구 설치에 협조할 뜻을 7원칙과 함께 발표했다. 여운형도 좌익을 대표해서 여기에 동의했다.

그런데 미군정은 합작위원회의 협조 의사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법 의원 설치에 달려들면서 정치범 석방 등 요구받은 전제조건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10월 7일 합작위원회의 7원칙 발표에 이어 이튿날 하지가 입법 기구에 치중한 특별 성명을 발표하자 7원칙과 입법기구 두 가지 사안에 대한 각계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정용욱은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157~158쪽에서 각계 의견을 이렇게 정리했다.

각 정치 세력의 합작 7원칙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조선공산당은 합작 7원칙을 전면 거부하였는데, 특히 입법의원 설치가 단정 수립을 위한 조치라는 것을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 우익의 반응은 다양하였다. 한민당은 토지 개혁 조항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며, 이승만은 합작 7원칙에 거리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한민당과 이승만은 과도 입법 기구 설치에는 모두 찬성한다는 입장이었다. 김구는 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마자 이것에 찬성을 표하였고, 한독당은 과도 입법 의원에 대해서 그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4개항의 설립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또 민주의원은 일부 내부적 반발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지지를 표하였고, 비상국민회의는 조소앙, 유림의 반대로 합작 7원칙을 거부하였다.

10월 8일에서 15일 사이에 나온 반응이 이랬다. 그런데 10월 중순을 지나며 대구에서 시작된 소요 사태가 가라앉기는커녕 확산 기미를 보이자 입법 의원 선거를 연기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10월 22일자 <조선일보>에는 사회민주당(사민당)의 선거 연기 주장과 함께 민중의 인식 부족, 관청 간의 연락 부족, 소요 사태 등을 이유로 선거 연기를 바라보는 기사가 함께 실렸다.

과반 발표된 과도 입법 의원 의원 민선에 관하여 21일 사회민주당에서는 좌기 3개조의 이유를 들어 기일 연기를 요청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즉 동당으로서는 좌우 각 정당을 기조로 한 합작위원회의 추진에 의한 관선 또는 민주적 민선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때까지 기일을 연기하자고 누차 당국에 건의하여 왔던 바이라고 한다.

1) 선거 수단 방법에 있어서의 의식적인 편파성 비민주성
2)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제시한 선거의 선결조건인 애국적 정치인의 석방은 고사하고 금반 민요에 의한 진보 진영 중 다수의 수감
3) 남조선 전반에 파급한 민중 봉기에 인한 질서 파괴와 민심의 불안 (<조선일보> 1946년 10월 22일자)

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의원을 보내려는 선거는 지금 남조선 각도·시·읍에서 진행시키고 있는데 일반 민중의 입법 기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점과 아울러 중앙과 지방 관청 간의 연락이 불충분한 까닭으로 선거 사무는 그 진행이 매우 늦어지는 형편에 있어 오는 십일월 초순 중 개원하려던 예정은 부득이 연기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관측은 군정청 수뇌부에서도 가지고 있다.

지방 출장으로부터 돌아온 군정청 모책임자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 어떤 지방에서는 입법 기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을 뿐더러 이에 대한 주지 철저 방법도 투철치 못하여 민중은 전혀 선거에 대한 관심이 없다 한다. 한편 지방 말단관청에게 보낸 군정청의 법령 지시 등도 간신히 요새 도착한 데도 있다고 하며 영남 일대를 중심으로 민요 사건의 수습은 아직 더 시일을 요할 것이므로 이런 지방의 선거란 지금 곧 기대할 수 없는 사정도 있어 입법원의 민간 선거 그것부터가 원체 늦어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입법원의 개원도 훨씬 늦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22일자)

사민당은 1946년 5월 10일을 전후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을 비롯한 인민당 일부가 빠져나와 8월 초에 결성한 정당이다. 서중석은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497쪽에서 "여운홍의 인민당 이탈은 미군정이 벌인 좌익 분열 공작의 또 하나의 산물"이라 하고 "미군정의 공작은 여운홍 등 부동하는 세력을 인민당에서 탈당시키는 정도의 성과밖에 올리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사민당의 입법 의원 선거 연기 요구 같은 것은 여운형의 의중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48쪽에 실린 서용규(가명)의 증언을 보며 사민당이 인민당에서 떨어져 나온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상무위원회에서 이남에서 올라온 각종 정보를 종합해서 집중 분석한 결과 미군정이 여운형을 포섭하기 위해 공작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몽양의 동생 여운홍의 움직임이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여운홍은 당시 사회민주당을 만들었습니다. 여운홍이 형이 만든 인민당에 있다가 나와서 당을 새로 만들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들을 가졌습니다.

상무위원회는 '미군정이 인민당을 해체시킨 뒤 여운형을 동생의 당으로 가도록 만들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 분석이 가능했던 것은 고급 정치공작원인 성시백을 통해 들어온 정보 때문이었습니다."

여운홍이 여운형의 양해 아래 사민당을 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난 5월 여운홍의 이탈 소식에 접할 때는 그런 쪽으로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 몇 달 동안 인민당에서 벌어진 일과 사민당의 행보를 보며 새로 생각해 보게 된다.

인민당은 개방적 대중정당이었고, 따라서 당세를 키우기 쉬운 강점과 통합성이 취약하다는 약점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 약점이 8월에 박헌영 추종 세력의 움직임으로 당이 통째로 흔들리는 사태에서 드러났다. 이질적 요소들을 적극 끌어들여 융화시키는 민주적 정당으로서 인민당의 존재 의미가 있었지만 정치 세력으로서 현실적 경쟁력에 한계가 있었다. 작지만 단결력 있는 별도의 세력 거점으로서 사민당을 여운형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닐지.

좌익 통합이 박헌영 일파의 독단으로 파국을 맞았을 때 박헌영 반대파가 여운형을 중심으로 결집해서 사로당을 추진했지만, 그들이 받든 것은 여운형의 명망이었지 그의 카리스마가 아니었다. 사로당은 인민당보다도 더 넓은 스펙트럼에 걸친 이질적 요소들을 품은 움직임이었다. 여운형에게는 자기 생각대로 사로당을 끌고 갈 여지가 별로 없었고, 다양한 요소들로부터 공통분모를 이끌어내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10월 16일 사로당준비위의 성명 "입법 기관에 대하여"(10월 10일자 일기 참조)는 입법 기관을 "인민의 의사와 인민적 기초 위에 서지 못한 일종 군정 자문 기관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했다. 여운형 본인의 생각은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정한 선거가 불가능한 현실을 감안해서 관선 의원을 절반 넣도록 하고 그 인선을 합작위원회가 맡도록 한 것이므로, 완벽한 선거가 못 되더라도 용인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너무 어지러운 시기에 너무 서둘러 시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민당의 선거 연기 요구가 그의 의중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남 좌익이 남로당과 사로당으로 갈라져 맞서는 상황에서 북로당이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셈이었다. 9월 하순 평양 방문에서 돌아온 여운형은 좌우 합작에 대해 이북 지도자들로부터 상당한 양해를 얻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양해를 얻었더라도 입법 기관 문제에 대해서는 까다로운 주문이 따랐을 것이 분명하다. 여운형 자신도 입법 기관은 좌우 합작을 성사시키기 위한 '대가'로 생각한 것인데, 그 대가가 너무 커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북로당 지도부만이 아니라 모든 조선 좌익의 공통된 요구였을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은 무식하게 선거를 밀어붙였다. 조금이라도 내실을 기하려는 노력이 일체 없었다. 여운형의 입장을 살려줄 최소한의 공정성이라도 확보하려는 김규식 등 우익 합작위원들의 노력도 군정청은 무시하고 말았다. 11월 중순 북로당이 사로당을 맹비난하며 남로당의 손을 들어주는 데 입법 의원 선거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군정은 박헌영을 핍박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조치 중에는 박헌영을 도와준 것이 많이 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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