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나도 그런데…" 하고 대답하고 나서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며 동시에 한 단어를 외쳤다. "트리피드!" 유성우 앞에서 그 친구도 나도 어렸을 적 읽었던 존 윈덤의 과학 소설(SF) <트리피드의 날(The Day of the Triffids)>을 떠올렸던 것이다. (내가 읽었던 책의 제목은 <괴기 식물 트리피드>였었다!)
영국의 작가 윈덤이 1951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유성우가 쏟아지던 날, 그것을 지켜본 전 인류의 대부분이 눈이 멀어버리는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쓴 주제 사라마구도 이 책을 읽었으리라고 확신한다!) 트리피드는 이 책에서 눈이 먼 인류 대신 세상을 지배하는 유전자를 조작한 걸어 다니는 식물의 이름이다.
어렸을 적에 읽은 책이지만 유성우만 보면 "트리피드"를 떠올릴 만큼 그 끔찍한 내용-무기력한 인간을 사냥하는 트리피드도 무섭지만 사라마구가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생생히 묘사했듯이 벼랑 끝으로 몰린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더 끔찍했다-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니 이 소설을 쓴 윈덤의 <초키>(정소연 옮김, 북폴리오 펴냄)가 나오자마자 손에 잡을 수밖에….
외계인을 만나는 특별한 방법
▲ <초키>(존 윈덤 지음, 정소연 옮김, 북폴리오 펴냄). ⓒ북폴리오 |
이 소설은 어느 날 외계 지적 생명체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한 소년과 그 사실을 알게 된 부모의 이야기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어대고 또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공유하려는 외계인 '초키'의 도발(?)에 열두 살 매튜는 어쩔 줄 모르고, 이를 어떻게 알게 된 부모 역시 난감하기 짝이 없다. 거기다 몇 가지 우발적인 사건이 더해지면서 상황은 더욱더 꼬여가기만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미지와의 조우>나 <E.T.>와 비교하면 외계 지적 생명체와 열두 살 소년의 이런 접촉은 단순하고 따분하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윈덤의 통찰이 빛을 발한다. 자, 곰곰이 생각해 보자. 소설, 영화나 혹은 "아니면 말고" 식의 미확인 비행 물체(UFO) 보도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외계인과의 조우가 <E.T>, <우주전쟁> 혹은 <브이(V)> 같으리라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외계인과 접촉하고자 엄청나게 빠른 로켓을 타고 그들이 사는 행성을 방문하는 발상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우리는 은연중에 우리의 관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어떻게 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외계인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이 타자와 접촉할 때,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외계인이 우리가 사는 지구와 같은 물리 법칙이 적용되는 곳에 산다고 전제한다면, 로켓이든 그보다 훨씬 더 발달된 UFO든 우주를 가로질러서 두 문명이 직접 접촉하기는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비교적 최근에 확인된 지구형 행성까지의 거리도 빛의 속도로 36년을 가야 한다.
두 문명 간의 직접 접촉의 가능성이 낮은 것은 단순히 우주를 가로지르기가 어렵고 비효율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구와 전혀 다른 환경, 역사 속에서 문명을 발전시킨 외계인은 타자와 접촉하는 방식 자체가 전혀 다를지 모른다. 예를 들자면, 서로 간에 공감하는 능력이 남다른 어떤 외계인은 직접 접촉에 집착하기보다는 마음과 마음을 교감하는 의사소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윈덤이 창조한 소설 속 외계인 '초키'도 마찬가지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방법이 있음에도 이 외계인은 비교적 '지구의 편견'에서 자유로운 열두 살 소년에게 말을 걸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인간이 그 무한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사고의 폭이 좁은지를 역설하면서 말이다. 외계인 초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들'이 너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착한 외계인 vs. 나쁜 외계인
윈덤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마치 수백 년에 걸쳐서 대양을 넘고 넘어서 유럽의 정복자들이 이른바 '신대륙'을 유린한 것처럼, 언젠가 월등한 문명을 지닌 외계 지적 생명체가 지구를 나쁜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지 않을까? 미국 드라마 <브이>의 한 입에 쥐를 먹는 '다이애나'처럼 심지어 인류를 먹을 의도로?
초키의 답변을 듣기 전에, 이 역시 따져볼까? 앞에서 얘기했듯이 상당수 외계 문명은 우주를 가로질러 직접 접촉하는 방식 자체를 아예 낯설어할 수도 있다. 더구나 설사 그런 욕구가 있더라도 우주를 가로지를 정도로 오지랖이 넓으려면 웬만한 문명의 성취로는 불가능하다. 지구의 인류가 지금과 같은 문명의 수준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그런데 과연 인류가 앞으로 오랫동안 지금과 같은 문명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불과 반세기만에 지구를 몇 개는 결딴낼 핵폭탄을 쌓아두고 으르렁대는 상황에서? 인간 활동의 결과로 나타난 온갖 환경 파괴로 지구 기후 자체의 안정성이 흔들리는 판국에서? 계급, 종교, 민족 등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더욱더 후비고 있는데도?
확신하건대, 지금 상태대로라면 인류는 범 우주적 식민지를 개척하러 나서기는커녕 석기 시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자, 그렇다면 우주 저쪽의 외계 지적 생명체의 사정은 어떨까?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상호 공감이 아닌 상호 갈등의 문명을 일궈온 그들도 우주를 가로지르기 전에 자멸할 가능성이 훨씬 크지 않을까?
그러니 남다른 문명의 성취를 이루고 나서, 우주로 시야를 넓힌 외계인의 마음씀씀이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윈덤은 초키를 통해서 바로 그런 외계인의 모습을 그린다. 열두 살짜리 아이를 통해서 지구 문명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려고 시도했던 초키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이렇게 고백한다.
"(우주에서) 지적 생명체는 드물다. 각각의 지적 생명체는 다른 모든 지적 생명체에게 의무를 가진다. 게다가 어떤 지적 생명체들은 상호 보완적이다. 아무도 특정 지적 생명체에 잠재해 있는 능력을 평가할 수 없다. 오늘 우리는 너희가 몇 가지 장애물을 넘도록 도울 수 있다. 어쩌면 너희가 어느 미래에, 우리나 다른 지적 생명체들을 도울 만큼 발전할지도 모른다."
스티브 잡스가 의심스럽다
책장을 덮고서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혹시 윈덤이 죽기 직전에 썼던 이 <초키>는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 것은 아니었을까? 평생 초키와 같은 외계인의 조언을 받으며 자신의 소설 속에 조심스럽게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암시해뒀던 (유전자 조작 같은 짓은 함부로 하지 마! 트리피드를 기억해!) 그가 죽기 전에 소설을 빌려서 한 '마지막 고백'.
그러고 보니, 최근에 목숨을 뜬 스티브 잡스는 어떤가? 초키처럼 "인류는 지금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면서, 남다른 혁신의 모습을 보여준 그도 혹시 또 다른 외계인의 제자? 그러고 보니, 스티븐 스필버그가 <초키>를 가지고 한창 영화를 만드는 중이란다. 그도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외계인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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