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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초 직전의 좌익 통합, 누가 문제였나?

[해방일기] 1946년 10월 21일

1946년 10월 21일

9월 4일 남로당준비위 구성 이야기(9월 5일자 일기) 이후 달포 동안 좌익 합당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고 있었는데, 그 일은 그 사이에도 물론 진행되어 왔다. 총파업, 소요 사태 같은 시국 상황과 좌우 합작 같은 정치적 과제의 영향으로 진행이 더뎠을 뿐이다.

남로당 추진자들은 북로당의 지지를 발판으로 반대파 포섭을 시도했고, 반대파 일각에서도 타협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박헌영 반대파(공산당 대회파 및 인민당과 신민당의 여운형, 백남운 지지 세력)는 다른 길을 찾아 사회노동당(사로당) 창당 추진에 나선다. 10월 15일 준비위를 결성하고 이튿날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인민당(여운형), 신민당(백남운), 공산당(강진) 공동 명의로 합동 결정서와 함께 몇 가지 현안에 대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원론적 내용의 합동 결정서보다도 구체적 현안을 논한 이 성명서에서 사로당 추진자들의 정치적 입장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소요 사태에 관한 내용은 상식적인 것이므로 좌우 합작과 입법 기관에 관한 부분만 옮겨놓는다.

◊ 좌우 합작에 대하여

여운형 김규식 양씨의 애국적 의도와 우리 민족의 주체적 입장에서 제기되어야 할 민주 역량의 집결체로서 소위 좌우 합작은 우리가 열렬히 지지하는 바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10월 7일 발표된 좌우 합작 결과로 보아 우리 민족의 주체적 독자적 협동 협력의 면으로 보다도 오히려 다른 정치적 효과를 예측하고 그것에 견제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지적 아니 할 수 없고 이 점을 우리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3당은 소위 좌우 합작을 우리 인민 대중이 요구하는 민주적 통일 전선으로 발전 전화시키기 위하여 우리 민주 진영이 인정할 수 있는 인물로서 구성하고 민주 협조의 현실적 보장인 민주적 책임조직을 확립하여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구성과 조직은 우리 조선 민주 건국과 인민의 기본권을 관철하기 위하여 일절의 반동 세력과 투쟁하면서 민주적 요소의 광범한 포섭으로서 반동 세력을 고립시키며 포위 공격하는 데에 우리 민족의 독자적 임무를 집중적으로 수행할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 입법 기관에 대하여

현재 조선 민족의 당면한 최대 요구는 미소공위가 속개되어 민주주의 임시 통일 정부 수립을 촉진하는 데 있다. 금반 발포된 입법 기관 법령은 위에 말한 우리의 민족적 요청을 거세한 것이며 인민의 의사와 인민적 기초 위에 서지 못한 일종 군정 자문 기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법 기관 설치보다는 다음의 기초적인 인민의 권리가 확립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1) 검거 투옥된 모든 민주주의 애국 운동자와 인민을 즉시 석방할 것
2) 경찰 사법 행정기구 내에서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및 일절 반동분자를 숙청할 것
3) 언론 집회 결사 출판 파업 시위 신앙의 자유를 절대 보장할 것
4) 군정 자문 기관인 민주 의원을 즉시 해산할 것
5) 일절 테러 행동을 금지하고 테러 단체를 해산할 것
6) 지방자치체로 광범한 인민 조직의 활동을 보장할 것 (<조선일보> 1946년 10월 17일자)

좌우 합작의 노력 자체는 존중하지만 10월 7일 '7원칙'의 형태로 얻어진 성과에는 "다른 정치적 효과"가 개재된 전 때문에 승인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입법 기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운형을 준비위원장으로 받들고 기자 회견도 여운형의 입원 병실에서 열었으나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좌우 합작의 방향에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로당 추진 세력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했다. 여운형을 지도자로 앞장세우면서도 그가 정해주는 노선을 일률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정체성 확립에 필요한 방향을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합당한 것이다. 실제로 여운형은 이 요구에 따라 입법 기관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구심점이 될 '권력'의 부재가 통합성에 한계를 가져왔다. 적어도 당시 상황에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사로당 추진 세력은 박헌영의 독재적 조직 방법에 저항하는 여러 집단이 모인 것인데, 그 정치 성향은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었다. 자금과 조직력 없이 여운형의 명망과 합리적 노선 선택만으로는 결속력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좌익의 합당은 결국 남로당과 사로당의 경쟁 양상이 되었는데, 이 경쟁의 초점은 북로당의 지지와 지원에 있었다. 북로당은 8월 말 창당에 임해 박헌영 일파를 지지하는 뜻을 발표했고, 며칠 후의 남로당준비위 결성은 이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9월 하순 여운형이 평양을 다녀온 뒤 좌우 합작과 사로당 결성에 서슴없이 나선 것은 평양에서 북로당 요인들에게 상당한 양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김두봉, 김일성 등 북로당 지도자들이 어느 정도 범위의 좌우 합작을 지지하고 박헌영의 지도력과 노선에 불신하는 뜻을 가졌다면 가능한 일이다. 사로당준비위 결성 직후 공산당의 강진과 신민당의 백남운이 평양에 간 것은 그런 뜻을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추측을 더욱 뒷받침해주는 것이 이들의 북행에 대한 박헌영 추종자들의 반응이다. 신민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10월 21일 나온 담화문에서 백남운이 '당 중앙'의 지시에 불복하고 합당을 천연시키다가 평양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이다. 이 담화문에서는 또한 허헌이 신민당 위원장에 취임했다고 주장했다.

남조선신민당(중앙간부파) 중앙위원회에서는 백남운의 평양 소환과 허헌의 위원장 취임에 대한 경위를 대략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백남운은 소위 원만한 합당이라는 구실 하에서 합당을 천연 내지 불가능케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당본부의 지시를 불복하고 개인 행동을 하며 나아가서는 당을 분열시키는 행동을 하므로 인하여 지난 9월 22일 권고 사직을 시켰으나 사로당을 만드는데 참가하여 민주 진영을 분열하는 정치적 착오를 범한 것으로 인하여 당 중앙에서 평양으로 소환하여 가게 되었다. 따라서 민족과 인민을 위하여 일생을 분투한 허헌에게 위원장으로 취임하기를 누차 교섭한 결과 승낙을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다."

남조선신민당 중앙간부파에서는 21일 동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표가 있었다. 위원장 백남운은 수일 전 평양으로 가게 되었다. 따라서 허헌에게 위원장 취임을 교섭한 결과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금반 새로 위원장에 취임한 허헌은 기자단에 대하여 "종래 누차의 교섭을 사퇴해 왔으나 현하 중요 시기에 있어 당외에서 조력할 것만이 아니라고 느껴서 이번 입당을 결의하고 책임을 맡게 되었다"는 의미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6년 10월 22일자)

김두봉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을 만들면서 이남에 이에 호응하는 정당을 만든 것이 남조선신민당이고, 김두봉과 친분을 가진 백남운이 이를 맡았던 것이다. 두 당은 별개의 정당이고, 두 당 지도부가 만난다면 '협의'를 위한 것이지, '소환'이 될 수 없다. 박헌영 일파는 강진에 대해서도 '소환'이라고 했는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어디서 누가 소환한단 말인가? 북로당 지도부를 '당 중앙'으로 여기던 박헌영 일파의 사고방식을 보여준 일이다.

그리고 허헌이 신민당 위원장을 맡는다? 당외 인물을 위원장으로 영입하는 것도 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위원장 자리가 비어 있어야 영입할 것 아닌가? 소위 중앙간부파는 '소환'이란 이름으로 백남운 위원장을 실격시켜 버렸을 뿐, (남조선)신민당에서 백 위원장에게 어떤 조치를 취한 흔적이 없다. 즉각 반발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22일 신민당(대회소집파) 선전부에서는 당수 백남운 평양 소환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백남운의 북행은 몇몇 반당분자에 대한 사문위원회의 작성서류와 사회노동당의 적극적 발표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고려할 바 있어 현재 연락 중에 있는 것이므로 결코 소환된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23일자)

신민당 선전부장 허윤구는 22일 허헌의 입당설과 백 위원장 평양 소환설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허씨 입당설과 백 위원장 평양 소환설 등등에 각종 모략과 허구 선전이 유포되고 있으나 첫째 허헌이라는 당원은 우리 당에는 없고 따라서 위원장 취임 운운은 가소로운 일이다. 백 위원장은 전번 대표자대회가 선정한 사문위원회에서 결정한 방대한 사문서류와 15일에 결정한 합당 즉 사회노동당의 영예로운 발전 등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고려하는 바 있어 수일 전 북조선에 향발하였다." (<동아일보> 1946년 10월 23일자)

북로당에서 명망의 김두봉이 위원장을 맡고 실력의 김일성이 부위원장을 맡은 것처럼 이남의 합당도 명망의 여운형을 앞에, 실력의 박헌영을 뒤에 배치하는 것이 이북 지도자들이 권한 합당 구도였다. 그래서 남로당준비위에서도 여운형을 준비위원장으로 모시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여운형의 이름은 사로당과 남로당 양쪽 준비위의 위원장 자리에 함께 올라가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여운형과 박헌영 사이는 김두봉과 김일성 사이만큼 어울려지지 못했다. 이 문제의 책임이 주로 박헌영에게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두봉과 여운형 사이에 취향과 태도의 차이가 크지 않은 반면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의 차이가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행적에서 꽤 뚜렷하게 느껴지는 문제가 있다.

허헌을 신민당으로 보낸 것만 해도 그렇다. 남조선신민당은 세력이 큰 정당은 아니고, 이북의 조선신민당과의 관계 때문에 좌익 안에서 상당한 상징성을 가진 정당이었다. 세력이 큰 인민당도 프락치로 흔들어댄 것을 보면 신민당 뒤집어놓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허헌을 신민당 대표로 앉히는 것은 남로당 대표 자리를 원래 맡기려던 여운형을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지난 여름 이래 여운형은 좌우 합작과 좌익 합당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이 시기 그의 판단과 행동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의 성실한 태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박헌영과의 불화는 그로서 어쩔 수 없었던 일로 보인다. 적과 동지를 뚜렷이 가르는 박헌영의 스타일은 반대파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고, 여운형은 박헌영의 반대파를 끌어안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사로당과 남로당 양쪽의 준비위원장 명의를 함께 갖고 있던 여운형은 양측의 합동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남로당 측은 사로당 측의 무조건 해산과 개인 자격 합류 요구를 굽히지 않았다. 여운형은 11월 5일 예정되어 있던 사로당 임시중앙위원회에 불참함으로써 연기시키고 1주일 후 열린 회의에서 사로당 해산 제안을 내놓으면서까지 남로당 측을 회유하려 했으나 결국 역부족이었다.

솔로몬의 재판이 생각난다. 현명한 임금 솔로몬은 아이를 쪼개서라도 제 몫을 가져야겠다는 어미가 가짜 어미라고 판결했다. 솔로몬이 65년 전의 조선에 있었다면 좌익을 쪼개서라도 제 몫을 챙겨야겠다는 박헌영을 가짜 지도자라고 판결했을까? 물론 적합하지 않은 비유다. 그러나 좌익 분열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여운형의 애달픈 모습 앞에 떠오르는 생각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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