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의 빈곤>(피터 윈치 지음, 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을 놓고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와 서규환 인하대학교 교수 사이의 논쟁이 진행 중이다. 서 교수의 서평으로 시작해 그 동안 총 다섯 차례 반론, 재반론이 오갔다. 서 교수의 마지막 답변에 이어서 박 교수가 그간의 대화에 대한 소회를 보내왔다. <편집자> ☞관련 기사 : ①서규환(현대인은 과연 원시인보다 더 합리적인가?) ②박동천(마이클 샌델이 대통령? 그럼, 한국 정치가 나아질까?) ③서규환(이론,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 ④박동천(식인 풍습의 원시 사회는 정말로 열등한가?) ⑤서규환(왜 나는 주술적 사유를 비판하는가?) |
내가 번역하고 편집해서 펴낸 <사회과학의 빈곤>(모티브북 펴냄)에 관해 서규환 교수와 지난 석 달 가까운 시간 동안 '프레시안 books' 지면을 통해 공개 대화를 나눴다.
이 대화가 앞으로 오래 계속되리라고는 전망하기가 어렵겠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그만 하겠습니다"라는 언명을 남기고 그만 두기도 쑥스럽다. 그 한 문장만 쓰고 '프레시안 books'의 지면을 차지할 염치는 없는 노릇이고, 그 이상을 쓰다가는 미진한 논제에 관해 내 생각만 적고 나서 "이제 그만하자"는 식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차 이 대화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현 단계에서 내가 지금까지의 대화에 대해 느낀 바를 적어보기로 했다.
이 대화를 시작하면서 나는 뜨거우면서도 행복한 대화가 가능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뜨거우면서도 행복한 대화"를 기대하면서 나는 동시에 은근히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어지기를 또한 기대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방향의 논의는 한 가지 주제를 집중해서 다룸으로써 상호 간에 어느 정도의 공통분모를 형성한 다음, 다른 주제로 넘어가 논의할 때에는 앞서 구축된 공통분모 위에 새로운 공통분모를 덧붙임으로써, 차근차근 상호간에 공통 기반을 확충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대화는 내가 보기에 그런 방향이었다고 하기에 크게 미흡하다.
단, 그렇다고 해서 "뜨거우면서도 행복한" 대화가 전혀 아니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나는 매번의 답변을 쓰면서 근자에 자주 끌어 모으지 못했던 수준의 집중력을 끌어 모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는 이런 주제에 관해 세밀한 논의를 글로 정리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뿐만 아니라, 서규환과 나 사이에 얼마나 크고 많은 차이가 있는지를 종전에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정도보다 훨씬 명료하게 볼 수가 있게 된 것도 내게는 지적으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즉, 내가 이 대화에 바친 시간은 낭비가 아닌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대단히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문제는 계속 그럴 수 있을지이다. 지금까지 대화를 통해 많은 견해 차이가 드러난 데 비해 오해나 이견이 해소된 면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사실은 무엇이 오해에 해당하고 무엇이 이견에 해당하는지에 관해서조차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비해 지금 두 사람 사이에 공통 기반이 더욱 두터워졌다고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 사이에 차이점들이 어떤 종류의 차이인지, 왜 발생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애당초 해소가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등에 관해서도 서규환과 나 사이에 가까운 장래에 동의가 이뤄질 것 같지 않다.
▲ <사회과학의 빈곤>(피터 윈치 지음, 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 ⓒ모티브북 |
그래서 이번에는 단 하나의 지점에만 시선을 모으고 싶다. 그것은 내가 "'1958년'의 그 윈치의 품안에 있으려 하는 것 같다"는 그의 기소와 관련된다.
우선 일차적인 차원에서 서규환과 나 사이의 쟁점 가운데 하나는 윈치를 누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와 관련되는 듯하다. 서규환은 내가 1990년 이후의 윈치를 놓치고 있다고 말하는 반면에, 나는 기어이 밝혀 말해야 한다면 윈치에 대한 서규환의 이해가 크게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이는 학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전형적인 쟁점 가운데 하나다.
이제 이차적인 차원의 과제는 이처럼 일차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쟁점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것이다. 내 입장은, 이 대화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와 같은 쟁점을 해결할 길은 이 쟁점 자체를 파고드는 수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이 쟁점을 파고들고도 해결 못 할 가능성도 물론 있다). 보편적 이치의 가능성이니, 이론적 헌정(또는 구성)이니, 비트겐슈타인의 생활 형식론이니 (그런 게 설사 있더라도) 문화 상대주의니, 여기에 뭘 끌어들이든지 말든지, 내가 윈치를 잘못 이해했는지 아니면 서규환이 잘못 이해했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데까지 판가름하려면 어떻게든 내가 이해하는 윈치와 서규환이 이해하는 윈치를 서로 소통이 가능한 언어를 통해 (이상적 언어가 아니다) 비교해 보고 다시 서로 의견을 나누는 수밖에 없다.
나는 서규환이 어디서 어떻게 윈치를 오해하고 있는지를 밝혀서 논쟁의 도마 위에 올릴 용의가 있다. 그 경우 내가 말하는 방식은 오해가 발생한 지점들을 개별적으로 예를 들어 거론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즉, "이 또는 저 대목에서 서규환은 윈치의 이런 저런 주장을 P라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q, r, s, t 등의 이유와 근거에서 오해"라는 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나는 그러므로 서규환도 나의 오해를 지적하려고 한다면 같은 방식으로 해주기를 바란다. 지난번의 긴 글에서 서규환의 기소는 내가 보기에 이와 같은 가장 기초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단지 판결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규환에 대한 방금 나의 고발, 즉 그는 기소를 해야할 곳에서 판결을 내리고 있다는 고발은 나 자신이 요구하는 대화의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정당화가 필요한 듯하다. 어쩔 수 없이 - 지금까지 별로 대화의 밀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지 못했지만 - 1, 2, 3, 4로 번호를 매겨야겠다. 이는 <프레시안>(2011년 9월 16일)에 실린 "박동천에게 답한다" 가운데 7번째 구획에 관한 얘기다.
1. 내 이해가 미흡하다고 보는 서규환의 기소문을 인용한다. 오타가 있는 듯한데, 그것도 확인하기 전이라 단정하지 않고 그냥 인용한다.
첫째, "인간 생활에 있어서 사고가 적용될 수 있는 여러 양상들이 모두 동일한 평면 위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과학과 도덕을 마치 서로 대등한" 활동의 형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과학과 종교에 관해서도 비슷한 점이 지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은 아니지만.
셋째, "서로 다른 사회생활의 양식 사이에 각 특성들이 중첩"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으로는 사회생활의 여러 양식들이 각기 나름대로 자율적이라는 시사에 맞서 균형을 이루기에는 불충분하다. 사회생활의 여러 양상들이 단순히 '중첩'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들은 상호 간에 내면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그 중 하나가 나머지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경우가 자주 있다." 윈치의 이 자기비판은 충분하게 개진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인간의 사유와 과학에 대한 인간의 사유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통찰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박동천은 윈치의 이 자기비판의 논지를 통찰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 자신이 이해하는 식의 "1958년"의 그 윈치 품안에 있으려 하는 것 같다.
첫째, 둘째, 셋째라고 각각 적고 나서 바로 이어서 서규환이 따옴표 안에 집어넣은 진술은 내 번역문에 나오는 것들이다. 즉, 여기서 지금 서규환은 내가 번역하면서 사용한 문구를 단순히 인용만 하고 나서, 박동천은 "이 자기비판의 논지를 통찰하고 있지 못"한다고 판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 판정이 적어도 하나의 검토해볼 만한 지적 주장이라도 되려면, 내가 어디서 어떻게 윈치의 이 세 가지 반성을 위반했는지를 거론해야만 한다(A). 아울러 윈치의 "자기비판의 논지"가 무엇인지를 "자기비판의 논지"라는 포장 말고, 그리고 윈치가 사용한 문구들과 독립되는, 다른 문구들을 사용해서 해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B). 그리고 A와 B가 어떻게 위배되는지를 밝혀 말해야 한다.
2. 일반적으로 서규환은 어떤 주장을 하나의 문구 또는 문장으로 정형화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은 끝나고, 이해는 독자들의 몫이라고 보는 것 같다. 이러한 태도를 그가 의식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일례로 그는 이 대화의 처음에 "생활형식의 창안"이라는 문구를 써놓고, 내가 그 뜻을 나름대로 해석했을 때는 그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정작 그럼 무슨 뜻인지는 여태까지도 설명할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방금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도 윈치가 말한 "중첩"은 불충분하다고 하면서, "내면적 연관"을 말한다. 하지만 다시 "내면적 연관"이 뭔지, 그것이 윈치가 말하는 "중첩"과는 어떻게 다른지, 나아가 윈치가 다른 곳에서도 "내면적 연관"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등등을 논의해야 자신의 주장이 형체를 갖출 수 있다는 필요성 자체를 일축해버린다.
3. 비트겐슈타인의 §81을, 그것도 윈치가 생략한 대목을 되살려서, 내가 번역한 문장 말고 이영철의 번역에 자신의 수정을 보태서, 서규환은 장황하게 인용하는데, 이어 나오는 논의에 그것이 왜 필요한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특히 윈치가 생략한 대목을 되살릴 적에는 적어도 왜 그게 특별히 여기서 되살려져야 하는지를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서규환은 이 긴 인용문 다음에 다시 윈치가 1990년의 서문에서 스스로 표명한 몇 가지를 인용하면서 열거할 뿐이다. 나는 오히려 현재 서규환과 내가 소통과 관련해서 봉착해 있는 어려움과 관련해서는 §82의 마지막 대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데-또는 이렇게 묻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 '그가 따르는 규칙'이라는 표현에 그러한 경우에도 남아 있어야 할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무슨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 만약 아무 규칙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이와 같은 대화를 지금까지 이어온 우리 자신의 행태를 그리고 상대방의 행태를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일까?
4. 서규환이 나의 오해를 고발하는 구절의 시작은 "규범이 제약적 조건"이라는 그의 표현을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한 데 대한 그의 반박이다. 그는 "윈치를 읽었다는 박동천이 왜 이렇게 말할까, 한참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윈치와도 상관없고, 한참 생각할 일도 아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박동천은 규범을 규제, 제약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규범을 헌정하는 나의 이론은 이와 다르다. 규범은 인간 행위에 관한 일종의 규칙으로서 인간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제약적 조건"이라고 한 서규환의 말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제약이라는 말을 두 번 쓰고 있는데, 앞에서는 규범을 제약으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뒤에서는 다시 제약적 조건이라고 하기 때문에 내가 종잡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자기가 한 단어를 두 의미로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한 의미가 그렇게 다른 각도로 사용될 수 있는 지평은 무엇인지를 명시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 글에서 내가 한 말을 다시 요약한다. 윈치를 내가 오해한 것인지 서규환이 오해한 것인지 논쟁을 이어갈 용의가 있다. 단, 논쟁을 이어 가려면 내가 지금 요구한 바와 같은 기초적 요건을 갖춘 형태로 기소가 이뤄지길 바란다. 혹은 서규환 교수가 내 방식과는 다르면서도 상호 소통이 가능한 논쟁의 형식을 나름대로 제안한다면, 그래서 그 방식이 내가 보기에 소통에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거기에 따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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