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제학은 오늘날 자연 과학인 것 같은 외양을 두르고 있다. 상당한 무리를 해가며 "노벨상"에 억지로 끼어들어 마치 자신이 의학 화학 물리학과 마찬가지의 학문인 듯한 모습을 자아내려 애쓴다. 하지만 경제학은 그 기원에 있어서 윤리학에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초기 근대 유럽에서 경제학의 모태가 되었던 학문은 프로이센의 경우는 국가 경영학(Staatswisenschaft)이었지만 프랑스나 영국의 경우에는 도덕 철학(moral philosophy)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애덤 스미스 그리고 그의 스승이었던 후치슨(Francis Hutcheson)은 모두 도덕 철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들이었다. 많은 이들은 그건 옛날이야기이고, 일단 갈려져 나간 이후의 경제학은 가치 판단과 무관한 하나의 실증 과학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경제학에 있어서 윤리와 도덕의 문제는 지금도 이 학문의 가장 중요한 기둥을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현재까지도 주류 경제학의 모든 명제는 "당위"인지 "현실"인지가 뒤섞여 있다는 데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애덤 스미스는 모든 개인들이 스스로의 이기심을 추구하게 내버려 두면 모종의 섭리(Providence)가 작용하여 전체의 조화와 균형이 달성되는 메커니즘이 시민 사회 즉 시장 내부에 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18세기 유럽 사상사에 있어서 대단히 극적인 도덕 철학의 혁명이었다. 그 이전까지의 전통적인 사회 윤리와 도덕 철학에 있어서 "개인의 탐욕"만큼 사회 유지에 해로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부동의 공리였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에는 개개인들이 모래알처럼 이기적으로 변해버리면 어떻게 사회가 무너지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강조된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상은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개인의 탐욕을 구제할 수 없는 대죄(deadly sin)로 저주하였다. 이는 18세기 초까지도 그러하였다. 스미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맨더빌(Bernard Manderville)이 사치와 탐욕이 판치는 꿀벌들의 나라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번영과 발전을 이룬다는 도덕적 역설을 다룬 <꿀벌의 우화(The Fables of the Bee)>(최윤재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를 발표했을 때 이는 대중의 엄청난 공분을 일으키면서 떠들썩한 스캔들이 일으키기도 했으니까.
스미스는 맨더빌의 논지를 발전시켜서 인간의 이기심을 인간 성정(性情)의 자연스런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이 오히려 사회의 조화를 가져오는 메커니즘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가 선택한 논리 전개의 방식은 "자연법"에의 호소라는, 맨더빌보다 훨씬 심오한 관점이었다. 개별자의 이기심이 충돌하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전체의 조화가 창출된다는 것은, 인간 사회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는 우주와 자연 전체에 편재하는 보편적인 자연의 원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도덕 철학자로서의 스미스의 오랜 사색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이제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이라는 것은 감히 인간이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어쩌고 할 대상이 아니다. 몇 천 년을 내려오던 "탐욕적 개인주의에 대한 저주"는 애덤 스미스를 지나면서 결정적인 가치의 전환을 맞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
애덤 스미스는 결코 탐욕이나 개인적 이기심을 인간의 유일한 "본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탐욕과 개인적 이기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받들어 내면화시켜야 하는 큰 도(道)가 되어 버렸고, 자신의 개인적 이기심을 철저하게 계산하여 이를 최우선의 행동 원리로 내세워 다른 일체의 고려를 여기에 종속시키는 행동이야말로 "합리적"인 것으로 추앙되었다.
이는 최근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내려오면 아예 종교가 되어 버린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요 그것을 추구하고 충족하는 것이 인생의 의미이자 목표이다. 이는 이제 하나의 절대적인 도덕 윤리가 되어 버렸다. 한때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처세서 <죄악으로 승리하라(Sin to Win)>의 제목처럼, 사람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기의 이해타산을 추구하는 데에 스스로를 강화시킬 수 있다면 어떤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의 절대적 도덕률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를 정당화하면서 스미스를 들이대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지만, 사실 스미스에게 죄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가 선택한 "자연법"이라는 이야기 방식에 문제의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뮈르달(Gunnar Myrdal)이 젊은 시절에 이미 강력하게 제기한 바가 있지만, 이 이야기 방식의 문제는 "당위"와 "현실"을 항상 헷갈리고 애매하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
경제학의 모든 명제들이 그렇지만, 이러한 새로운 인간 본성론은 인간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현상 기술의 명제인가 아니면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의 문제인가? 자연법 사상에서는 이 둘이 분별이 되지 않게 되어 있다. 인간이 평등한 이유는 자연적으로 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인 동시에 자연적으로 마땅히 평등한 존재로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며,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정당화시켜주는 근거가 된다.
고양이는 야옹하고 울게 되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야옹하고 울어야지 으르렁거린다든가 꼬꼬댁거려서는 안 된다. 인간 본성이 이기적 존재라는 것에 있다는 게 분명하다면 인간은 마땅히 이기적 존재가 되어야지 괜히 천사를 흉내 낸다든가 부처님 예수님처럼 살려고 한다든가 하는 짓은 본질적으로 "인두겁을 쓰고서 할 짓이" 못 된다(!).
스미스와 중농주의자들 이후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은 이러한 자연법의 이야기 틀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스미스는 억울하겠으나, 그가 자연법의 틀을 빌어서 인간의 이기심을 정당화시킨 순간 그것이 곧 하나의 도덕률 그것도 절대적인 윤리 법칙으로 변화하는 것도 예정된 일이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리하여 경제학이라는 "황량한 과학"이 내놓은 인간관과 사회관이 부동의 자연적 진리가 되어 버린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이기적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윤리적으로도 이기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 본성론 일반에 따르는 낯익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면, 이타심이나 동정심 또 사회적 본성 따위는 누구의 속성이란 말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비합리적 감정과 행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진정한 이익을 제대로 계산할 줄 모르는 무지함 혹은 잘못된 철학이나 이념에 찌들어서 나온 환상에서 비롯된 생각으로서, 이는 현실과도 어긋나는 거짓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걸어가서도 안 될 그릇된 일이라는 것이다.
3
물론 몇 천 년 내려온 인류의 오래된 윤리적 감정과 사회관의 전통에서 볼 때 이러한 도발적인 "가치의 전복"에 저항이 없었을 리 없다. 인간 세상은 이기적 개인의 행동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 이들은 "개인과 '합리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뒤르켕이나 칼 슈미트 등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듯, 어찌 보면 이것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등등의 사회 과학이 발달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들이 만들어내는 시장 경제로 환원될 수 없는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등등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들을 인간 세상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시장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로 보아야 한다는 시도가 거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특히 1970년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사회과학에서의 싸움은 경제학 쪽의 승리로 결판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등의 실체가 도대체 무어냐는 대단히 공격적인 질문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한 강력한 답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했다. 그러자 경제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이기심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행동으로 그런 것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한발 더 나아간 자세를 취한다.
여기에서 "합리적 이해타산"에 몰두하는 개인들의 이합집산을 설명하는 게임 이론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비록 화폐와 재화가 오고가는 것은 아니더라도 정치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들이 빚어내는 결과임은 동일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굳이 경제학과 독립된 사회 과학의 영역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경제학과 동일한 방법으로 통일해나가는 것이 "과학적" 사회 과학을 위하여 마땅히 나아갈 길이라는 것이다.
특히 소위 "신제도주의경제학(new institutional economics)"이 출현하면서 인간 사회의 모든 제도들을 다 이기적 개인들의 행동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접근이 성행하게 되자 경제학은 모든 사회 과학 분야 일반으로 영역을 확장하게 되고, 전통적인 사회 과학의 영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된다. 소위 "경제학 제국주의"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진리"의 영역에서 벌어진 경제학적 인간관의 확장은 고스란히 "도덕적 당위"의 영역에서 시장주의적 정책의 확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영국 수상이었던 마거릿 대처의 말대로, 시장 경제의 논리와 별개인 "사회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과 제도는 따라서 시장 경제의 원리에 맞추어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나아갈 바이다.
사회와 제도를 이러한 원리로 개혁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개인들이 철저한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거듭나서 그 어떤 활동 영역에서든 그 어떤 제도에서든 행동의 원리를 "개인적 이익의 합리적 계산과 추구"로 통일시킬 것이 필요하다. 몸이 아픈 사람은 "의료 서비스 소비자"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교육 서비스 소비자"로, 지구 온난화가 걱정되는 "탄소 배출권 거래자"로 행동하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이다. 대통령은 "CEO 대통령"을 뽑는 게 최고다 등.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과학적 진리라기보다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윤리 철학이 되었다.
이러한 현대 경제학의 기묘한 논리적 구조가 낳은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이러한 윤리 철학이 지배하게 되면, 처음에는 별로 그렇지 않던 인간들도 실제로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앞서 말한 "자연법"의 순환론적 구조는 탄력을 받게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을 보라. 모두 이기적 원자들이 아니냐. 따라서 우리 모두 이기적 원자로 행동하는 것이 옳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별다른 방도가 없으므로 악착같이 이를 악물고 이기적 원자로 거듭나기 위해 밤낮으로 각종 처세서 등을 읽으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현실에는 이기적 원자들이 늘어난다. 이러한 되먹임 현상이 일정 기간 지속되면 이기적 개인이라는 인간 본성론은 부동의 객관적 진리이자 주관적 윤리가 되는 것이다. 요컨대, 실재 존재하는 인간에서 인간 본성론이 나왔다기보다는 인간 본성론으로부터 현실의 인간이 재창조되는 기현상이다.
4
▲ <착한 것이 살아남는 경제의 숨겨진 법칙>(정태인 지음, 상상너머 펴냄). ⓒ상상너머 |
노벨상 수상자인 센(Amartya Sen)의 연구가 바로 이러한 지점에 착목하고 있다. 정태인의 책 또한 각종 게임을 상정하는 이론과 그에 상응하는 실험 결과들을 소개하면서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각자의 이익을 놓고 게임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각종 사회적 딜레마로 귀결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종류의 게임이든 거기에 참여하는 단위는 '개인'으로 상정되며 그 개인은 이타적 존재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존재로 상정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경제학의 가정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서 차이가 있다면, 다양한 상황에 따라 벌어지는 다양한 게임의 종류에 따라 협력과 상생이 훨씬 우월한 결과를 낳을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즉, '남을 엿 먹이는 것이 곧 나의 이익이다'라는 "죄수의 딜레마"에서의 행동 논리가 "사슴 사냥"이나 여타 다양한 상황에서는 전혀 이롭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오히려 '나도 살고 남도 살고(live and let live)'나 일방적 이타주의로 행동했을 때 나도 남도 모두 함께 훨씬 더 이로운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남의 엿 먹음은 곧 나의 이익'이라는 생각에 너무 심하게 씌워 모든 다양한 경우와 상황과 게임의 종류에서 "죄수"의 행태로 일관하는 경우이다. 이때는 남도 죽고 나도 죽는 사회적 딜레마 즉 '공멸'의 상황이 현실에 벌어지게 된다. 한 때 태평양의 낙원이었던 이스터 섬이 황폐화되고 식인(食人)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생지옥이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학부모도 아이들도 심지어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학원 및 과외 교사들까지도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이 '사교육'이라는 전쟁터가 갈수록 더 치열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지구 온난화로 모두 다 죽는다는 과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탄소 배출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우리 머리에 둘러 씌워 만고불변의 자연법인양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이기적 개인들의 경쟁이야말로 자연 질서"라는 생각이 이러한 우매한 결과를 낳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정태인의 책은 알기 쉽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정태인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로 이기적인 사람인가요?" 솔직히 대답이 쉽지 않다. 행간을 읽어보면 정태인의 생각은 이런 것 같다. 사람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며, 굳이 따져본다면 남들과 함께 잘 살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러한 본성을 발휘하여 공연히 착하게 굴고 다정하게 굴다가 '남의 엿 먹음은 곧 나의 이익'이라고 믿고 행하는 이들에게 당하고 상처받는 일들이 벌어질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모두 서로에게 '엿 먹이는 행동'의 자세를 견지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정태인의 책은 이러한 상황에서의 탈출구가 종교나 윤리의 일방적인 설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지혜롭게 생각해본다면, 이렇게 단순무지한 생각을 버리고 다양한 상황에 맞게 행동할 수 있는 탄력적인 존재가 될 수 있고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 나도 남도 함께 이익을 볼 수 있는 다양한 경제 형태와 제도를 창조해 나갈 수 있다는 데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
이렇게 머리를 한 단계 높이 업그레이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욕망, 즉 "나도 살고 남도 살고 함께 잘 살자"라는 욕망을 용기 있게 풀어놓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5
여기까지였다고 해도 이 책은 분량에 비해 대단히 좋은 정보와 지적 자극을 담고 있는 영양가 높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읽어야 한다든가 중요한 기여를 했다든가 하는 식으로까지 평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방금 말한 이야기들은 최근의 행동 경제학뿐만 아니라 '윤리적 경제(moral economy)'의 의의를 설명하는 고금동서의 종교 경전이나 현자들의 지혜 속에서 누누이 이야기되고 있는 바이니까.
이 책의 참신한 시도이자 새로운 기여라고 할 수 있는 바는, 생활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과 같이 시장 경제와도 또 정부의 공공 부문과도 구별되는 소위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의 조직 원리를 여기에 구체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정태인과 같이 게임 이론 행동 경제학의 틀을 빌지는 않았지만, 이미 '사회적 경제'의 오랜 전통에서 내려오는 고전적 사상가들-로버트 오웬, 표트르 크로포트킨('상호부조론')-에게서 이러한 협력과 상생을 경제의 중심 원리로 하자는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동안 장구하게 내려온 각종 협동조합이나 공동체들이 실제로 조직되어 있는 바를 보면, 분명히 그러한 원리들이 일정하게 밑에서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행동 경제학의 틀을 빌려와서 그렇게 좀 막연한 상태의 전통이나 지혜 등으로 상당히 '암묵지'와 같이 공유되던 생각을 명시적으로 논리적으로 해명해보고 또 거기에서 현존하는 협동조합이나 공동체의 조직 형태를 설명해보려는 시도는 나로서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접한 것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는 남부 유럽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 협동조합의 사례를 생생하게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경제'가 바로 이러한 협력과 상생이라는 행동 원리로 조직되었을 때 시장 경제로는 생각하기 힘든 종류의 혜택과 지속성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장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러한 연관이 '사회적 경제'의 실천적인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희망 있는 방향이라고 믿는다. '호혜성'이니 '함께 사는 경제'니 하는 말들은 좋은 정신을 담고 있는 소중한 말들이지만, 막상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구체적인 제도나 조직 형태 또 규칙 등을 설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모두 다 느낄 수 있는 바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생활협동조합에서 회원들끼리의 상호신용금고와 같은 금융 기관을 만든다면 정관을 어떻게 해야 하고 대출 행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점에서는 시중 은행과 비슷해야 하고 어떤 점에서는 달라야 할까? 여기에서 어떤 식으로 '게임'을 설계해야 모두 최대의 혜택을 보면서도 또 협력과 상생의 정신을 더 강화하여 조직 전체의 인간적 단결을 도모할 수 있을까? 이러한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을 때에 정태인이 제시한 방향의 연구는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6
사족이 될지 모르겠으나, 이미 오래 전에 나온 베블런(Thorstein Veblen)의 경제 사상에 이 책에서 정태인이 제시하고 있는 아이디어와 대단히 유사한 생각들이 전개되었음을 주마간산이나마 짚고 넘어가고 싶다.
베블런은 사람들이 서로 '나도 살고 너도 살고(live and let live)'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공동체 전체의 물질적 복리를 불리고자 하는 '제작자 본능(workmanship)'이 있다고 보았고, 그것이 발현된 활동을 '산업(industry)'이라고 부른 바 있다. 그리고 자기가 일하기보다는 남의 일한 것을 빼앗아오는 '수탈자 본능(predatory instinct)' 혹은 '불한당 근성(sportsmanship)' 또한 있다고 보아 여기에서 나타난 활동의 역사적 형태의 하나로서 '영리 활동(business)'을 정의한 바 있다.
베블런이 보기에, 마르크스주의이든 신고전파이론이든 소위 '생산성'이라는 것을 상정하여 그것을 노동이든 자본이든 개개의 생산 요소에 돌리는 것은 모두 '미신'이라고 보았다. 진정한 생산성이 있다면, 이는 사회 성원들 모두가 서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공유하고 있는 공동체 전체의 '지식'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리 활동'은 이러한 공동체 전체의 믿음과 이해에 기초한 '산업'을 지배하여 그것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윤의 근원을 삼을 뿐만 아니라, 이윤에 도움이 된다면 그러한 '산업' 활동 자체를 '깽판 놓는(sabotage)' 행동을 아예 중심 원리로 삼아버린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력을 생산성 향상을 통한 자본 축적으로 생각했던 마르크스와 달리, 베블런은 자본주의가 이러한 점에서 오히려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복리를 제한하는 본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여기에서 사회적 생산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자들끼리 서로 돕는 민주주의적 질서를 강화하여 영리 활동의 '비생산성'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늘날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의 이론가로만 왜소하게 축소되어 버렸지만, 이러한 그의 기본적인 경제 사상은 정태인의 책에 개진되어 있는 바의 연구 방향 및 관점과 깊은 친화성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7
이제 내가 서두에서 왜 이 작은 책이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책이라고 생각하는지 설명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지난 300년 동안 하나의 주문처럼 근대 세계의 기본적인 인간관 및 사회관을 지배했던 근본적인 생각에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걸음 나아가서, 상생과 협력이라는 원리에 근거하여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평범하고 소박하게 실천해 볼 수 있는 사회적 경제 영역의 의미를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지난 40년간 신자유주의 사상이 횡행하는 가운데 심하게 침식당했던, '사회'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복원시키는 작업을 소생시키고자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체제가 전 지구적으로 근본적인 의심에 처한 오늘날, 사람들은 대안적인 경제와 사회의 조직 원리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큰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라면 이 책에서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큰 질문의 크기를 감당하는 책이라면, 큰 책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책은 실로 "비학문적"인 문체를 가졌다는 미덕이 있다. 본래 프레시안 사회교양원 강좌에서의 강연을 활자로 옮긴 것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저자 스스로가 학문적인 위세를 과시하는 것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생각과 재미를 나누어보고 싶다는 소망을 더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문체는 제비같고 날렵하여 심지어 군데군데 날라리 같은 느낌을 줄 때까지 있다. 흠이기는커녕,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미덕이라고 생각된다. 날라리. 얼마나 재밌고 좋은가. 게다가 지적인 내용을 고도로 압축하여 낼름낼름 받아먹을 수 있도록 쉬운 '야부리'로 풀어주는 날라리라면. 나도 이런 날라리의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