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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이 관 속에 숨어서 월북했다고?

[해방일기] 1946년 10월 14일

1946년 10월 14일

남조선노동당은 11월 23~24일 결성 대회를 열기에 이르거니와, 9월 4일 준비위원회가 결성된 시점에서 기존 좌익 3당은 이미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공산당은 대회파의 반발로 창당 후 최대의 내분에 휘말려 있던 차에 9월 7일 박헌영을 비롯한 핵심 간부들의 체포령으로 더 이상 정상적 운영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대회파의 반발 이전에 공산당 내부에는 박헌영의 독단적 당 운영에 어느 정도 반발이 나타나 있었을까? 세밀한 검토는 못했으나 안재성의 <이현상 평전>(실천문학사 펴냄)에서 공산당의 내부 분위기를 그린 약간의 서술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무렵(1945년 말) 이현상과 동지들을 괴롭힌 또 다른 존재는 내부의 적이었다. 조선공산당이 경성콤그룹 출신들로 장악되어 파벌적이라는, 좌익 내부의 비난이었다. 조선공산당의 주요 직책을 대부분 경성콤그룹 출신들이 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박헌영이 공식적인 직책과 상관없이 옛 동료들의 의견에 의존한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이주하를 매우 신임해 직책과 상관없이 이들의 의견을 절대 신임했으며 여기에 정태식, 이순금, 김형선 등이 충실한 비서 역할을 했다. 산하 지구당 위원장들도 대부분 경성콤그룹 출신이거나 그들에게 천거받은 인물들이었다. (191쪽)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중앙의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지역의 도당 소속 당원들은 박헌영과 당 중앙이 문제가 있다는 막연한 불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전남이나 전북 등 중앙에서 먼 지구당일수록 심했다. 또한 주요 당직에서 소외된 이들이나 출세 지향적인 인물들은 신민당과 인민당 등 다른 좌익 정당으로 집결했다. 공산당이라면 기본적으로 일국일당제 위에 당은 오류가 없다는 맹신에 가까운 신뢰에 빠지기 마련인데 남한의 조선공산당은 처음부터 치명적으로 권위를 잃은 채 여러 개의 당으로 분리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북한의 존재도 영향을 미쳤다. 아직까지 큰 제약 없이 삼팔선을 넘나들던 시기였다. 공산당 집권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북한이야말로 혁명의 전진기지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었다. 일제하에서의 불투명한 경력이나 출세주의, 파벌성 때문에 조선공산당에서 소외된 이들은 북한에 의탁하려 했다. 김일성은 거듭해서 조선공산당 중앙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면서도 내심 박헌영의 편협성과 지도력 부족에 불만을 가지고 반대파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198쪽)

안재성은 이 책에서 박헌영의 심복 김현상에게 깊은 애정과 신뢰를 보여준다. 그래서 박헌영 일파가 반대파 공격에 쓰던 "불투명한 경력이나 출세주의, 파벌성" 같은 말을 그대로 따라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박헌영의 편협성과 지도력 부족"과 콤그룹 중심의 당 운영을 지적하는 것을 보면 이런 문제들이 우호적인 시각에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9월 7일 미군정의 공산당 간부 수배령이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였다는 생각을 9월 9일자 일기에 적었다. 이 때 체포된 서기국장 이주하는 몇 건의 담화문 발표가 공안방해죄로 기소되어 12월 4일에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서울신문> 1946년 12월 6일자). 그가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고 하는 것은(<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443쪽) 이에 불복 상고한 결과인 모양인데 기사로는 확인하지 못했다. 194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 "이주하 씨 공판 무기 연기"란 제목의 기사에서 6월 6일로 예정되어 있던 상고심 선고 공판이 "주소 불명으로 송달되지 않아" 무기 연기되었다고 하는데, 이북으로 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싶다.

아무튼 9월 7일에 수배령이 떨어진 박헌영 등 공산당 간부들에게 이주하보다 크게 무거운 혐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 정도 혐의로 주요 정당 지도부를 일망타진하겠다고 경천동지할 체포 작전을 벌인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움을 서중석도 위 책 442~443쪽에서 밝혔다. 이 체포령을 이유로 이북으로 피신한 행동의 적절성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더라도 이 체포령이 박헌영과 하지 사이의 '담합'으로 볼 '합리적 의심'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심만으로 박헌영을 간첩죄로 처형할 일은 물론 아니지만, 당시 상황을 최대한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의심이다.

이 의심에 따르면 박헌영은 월북하고 싶었고, 하지는 그 알리바이를 위해 체포령을 내린 것이다. 8월 말에 북로당은 대회파를 제쳐놓고 박헌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김두봉과 김일성 등 북로당 지도부는 박헌영의 영도력과 노선에 불신을 갖고 있었다. 박헌영 일파는 현상 유지 차원에서 북로당의 지지를 받을 위치에 있었지만 수세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이남 좌익의 향배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던 북로당 지도부가 여운형 등 다른 세력으로 눈을 돌리는 일이 없도록 가로막기 위해 그쪽에 가 있을 필요를 박헌영이 절실하게 느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잠깐 방문이면 몰라도, 가서 오래 지내기 위해서는 핑계가 필요했다. 남로당 지도부에 참여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지에게 체포령을 부탁했으리라는 의심이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앙일보사 펴냄) 260~261쪽에 실린 서용규(가명)의 증언은 이런 의심을 부정하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의심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박헌영 체포령이 내려지자 소군정과 김일성을 비롯한 북로당 지도부는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이런저런 현안이 있는 마당에 박헌영이 체포라도 되는 날이면 남한 내 좌익 세력의 기둥이 날아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비밀리에 사람을 박헌영에게 보내 '평양으로 올라와 남한 공산당을 지도하라'고 권했습니다. 성시백이 몇 차례 오갔고 한은필도 동원됐습니다. 경호원을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박헌영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체포령이 내린 상황에서 북포당 지도부가 박헌영 등의 월북을 권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남 좌익 핵심부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이 미군 CIC의 취조를 받게 되는 일을 좌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박헌영은 월북 후의 유리한 활동 조건을 흥정하며 거절하는 시늉을 했을 것 같다.

서용규는 미군정의 체포령 발령에 여운형이 개재했다는 정보도 있었음을 언급했다.

"박헌영의 체포령과 관련해서 미군정과 여운형 측의 사전 논의가 있었다는 정보가 올라온 겁니다. 당시 46년 1월부터 서울로부터 '박헌영과 여운형의 갈등이 점점 더 심해지자 여운형이 미군정 측에 박현영을 그대로 놔둬선 안 된다고 얘기해 체포령이 빨리 내려졌다'는 정보가 올라왔습니다. 북에서는 이 정보에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운형이 그렇게까지 얘기하진 않았어도 미군정 고문과 만난 자리에서 박헌영의 극좌적 행동을 비난한 것은 사실일 거라고 본 겁니다." (위 책, 262~263쪽)

이것은 박헌영의 마타도어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여운형이 만났다는 "미군정 고문"이 누구였을까. 버치 중위가 얼른 떠오른다. 여운형이 버치와 만난 자리에서(김규식 등 다른 합작위원들도 함께) 박헌영의 좌우 합작 방해를 비난했을 수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여운형이 박헌영 일파를 좌우 합작에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인내하며 애를 썼는지 생각하면 박헌영 체포령을 미군정에 권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박헌영 일파의 배제는 좌우합작에서 좌익의 약세를 뜻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여운형은 이로 인해 곤경에 빠지게 된다.

여운형과 박헌영, 그리고 미군정 사이의 관계에 관한 서용규의 증언은 7월 18일자 일기에서도 소개한 것이 있다. 미군정이 여운형을 흑색선전으로 매장시키면서 박헌영이 한 것처럼 꾸미려 하는 음모를 박헌영이 미리 알고 여운형에게 "이런 음모가 있으니 당신에 대한 흑색선전이 마치 내가 한 것처럼 나오는 것이 있으면 미군정에서 한 짓인 줄 아시오." 하고 귀띔해 줬다는 것이다.

이 증언을 보며 이 서용규란 사람, 머리가 참 나쁜 사람인가보다 생각했다. 박헌영이 한 얘기를 그대로 옮기며 '합리적 의문'은 전혀 떠올리지 않는 것이다. 미군정이 나쁜 짓 꽤나 했지만 흑색선전에는 별로 소질을 보인 일이 없다. 박헌영이 여운형에게 저지른 흑색선전을 이북 지도자들에게 추궁받자 둘러댄 얘기인 줄 어떻게 알아듣지 못할 수 있었을까? 흑색선전은 한국민주당과 박헌영 일파의 전공 분야였다.

체포령이 떨어진 후 10월 6일 평양에서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한 달 동안 박헌영의 행적은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 펴냄)에도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9월 중순 몇 차례 민전 의장단 회의에 참석한 것이 추측되고, 언제 서울을 떠나 어떤 경로로 월북했는지 명확치 않다. 9월 말 내지 10월 초까지 총파업 등 '신전술' 추진에 힘을 쓰고 있었을 것이 짐작될 뿐이다.

박헌영이 관 속에 숨어서 영구차를 타고 38선을 넘었다는 얘기가 많이 떠돌았던 모양이다. 박헌영 취향의 이야기다. 1927년 병보석 출감에 앞서 똥을 집어먹는 등 정신병자 행세를 하던 이야기가 딱 겹쳐진다. 그를 석방한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죄수 건강을 걱정해서 풀어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당시 공산당 사건에서 옥사는 있을지언정 병보석은 없었다.

화려한 '옥중 투쟁' 이야기는 석방의 진짜 이유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엄중한 사건의 주요 피의자가 병보석 중 국외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석방의 진짜 이유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관중(棺中) 월북 이야기도 그의 투사 이미지를 제고하면서 애매한 행적을 얼버무린다는 점에서 1927년의 옥중 투쟁과 같은 울림을 일으키는 것이다.

박헌영의 월북으로 이남에서 공산당의 역할은 한 차례 매듭을 지었다. 지금까지 공산당은 합법적 주요 정당의 하나로 기능을 발휘해 왔는데, 이제 박헌영 일파를 중심으로 남로당이 만들어지고 나면 신전술의 연장선 위에서 반체제 활동의 본산이 된다. 원세훈, 김병로 등 민족주의자들이 떠나고 '지주당'의 본색을 드러낸 한민당과 짝을 이루는 변신이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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