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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당' 가면 벗고 '지주당' 본색 드러낸 한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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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당' 가면 벗고 '지주당' 본색 드러낸 한민당

[해방일기] 1946년 10월 12일

1946년 10월 12일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 합의 7원칙이 발표되자 한민당은 전면 반대는 아니지만 반대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담화를 발표했다. 구체적인 반대는 (1)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뜻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과 (2) 유상매수-무상분배는 재정 파탄이 필연적인 방책이므로 기만책에 불과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결론으로 "합작위원회의 합작원칙은 동 위원회 자체 내의 결정이요 장래 설치될 입법기관이나 기타 정당 및 사회단체에 대한 구속력이 없는" 것이라 하여 합작의 효과를 부정했다.

합작위원회에 참여해 온 한민당 총무 원세훈은 이에 반발, 8일 저녁 탈당계를 내고 9일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국민주당에는 나도 창립당원 중의 일인이다. 애당심에 대하여도 남만 못지않은 사람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당과 관계를 단절하게 됨은 유감천만이다. 그러나 당의 내정운영과 토지정책 등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본이념의 상위에서는 할 수 없이 당과 관계를 단절하지 아니할 수 없다.

첫째 최근에 발표된 좌우합작원칙 중에서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 의결에 의하여 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명백한 문구에 대하여 회의적 태도를 취함은 이해키 곤란하다. 소위 신탁통치 운운의 용어를 가지고 합작원칙을 비난함은 그 논의와 논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없다.


둘째 토지의 체감매상과 무상분여 등에 대하여 국가재정의 부담이 과중할까 우려함은 애국자적 견지에서 그럴 듯도 하나 애국자적 지주들의 국가재정을 위하여 토지를 희사하는 분들이 없으리라고 할 수 없고 유상매상의 무상분여를 국가재정의 파탄이라고 하는 한민당이 국가재정을 위하여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여를 주장할 용기는 어찌하여 없는가? 입법기관에서 토지문제를 신중 토의할 것이지만 조선에서 사유재산제를 채용할 것은 확정적인즉 모든 소작인에게 응분의 토지를 분여하고 소유권을 허여하고 일반적 세제에 의하여 징세한다면 그 무엇이 과중부담일 것이며 기만될 것인가?" (<자유신문> 1946년 10월 10일자)

두 가지 문제 중 "신탁통치 반대" 표시 문제는 지난 연초의 '4당 코뮈니케' 때도 원세훈이 똑같이 겪었던 일이다. 당시의 좌우합작에 한민당 대표로 나섰던 김병로와 원세훈은 3상회담 결의에 대한 공동 코뮈니케에 동의했는데, 한민당 주류가 "신탁통치 반대" 표시가 없다는 이유로 이 코뮈니케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번 합작위원회에서 원세훈은 한민당을 공식적으로 대표한 것이 아니라 민주의원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것이었다. 그는 합작회담의 시작을 앞장서서 공표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그러면서 한민당의 좌우합작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벼르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첫 성과인 7원칙에 대해 한민당에서 부정적 태도가 보이자마자 뛰쳐나온 것일 게다.

원세훈(1887~ ? )은 당시 민족주의 진영에서 널리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그의 풍운아적이면서 결백한 면모는 이재명의 <한국현대사의 비극>(선인 펴냄) 제3장(95-134쪽)에 소상히 그려져 있다. 그 책에 담긴 인상적인 일화 하나는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가 그에게 경성방직 경영을 부탁한 것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다. 사실 여부를 확인은 못했지만, 한민당 주류 노선과 거리를 둔 그의 자세 때문에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야기다.

1945년 9월 한민당이 출범할 때는 민족주의 진영이 폭넓게 참여했었다. 그런데 1년 동안 한민당 주류가 임정 봉대 등 애초에 표방했던 노선에서 벗어나 온 데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원세훈의 탈당을 신호탄으로 탈당의 봇물이 터졌다.

원세훈이 탈당 성명을 발표한 그 날로 중앙감찰위원 한흥주와 이민응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성명서에서 한민당의 좌우합작 외면을 성토한 다음 "이상의 이유에 기하여 본원들은 한민당의 정치노선 급 당면정책을 부정함과 아울러 그에 협력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자에 탈당을 성명함"이란 결론을 내렸다. (<자유신문> 1946년 10월 10일자)

청년부장 박명환과 합작위원회 서기 송남헌을 비롯한 한민당 중앙위원 16인도 그 날 중으로 탈당을 발표했다. 박명환이 이들을 대표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탈당의 동기라느니 보다 신념을 말하고 싶다. 현하에 있어서 정당이란 1당 1계급의 역할과 이익을 추구하기 전에 먼저 신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각각의 분야에서 이것을 추진하는 전위부대가 되고 혁신적이며 건설적인 집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계는 이와 거리를 멀리하여 우익은 우익대로 좌익은 좌익대로 혼돈상태에 빠져있다.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출하고 좌우 양 세력이 국제정세에 발맞추어 완전 합작함으로써 난국을 수습하여야 할 것이며 만일 이것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우익진영만이라도 대동 통일하여 혁명적 세력을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한 당에 구속됨이 없이 전체적 입장에서 미력을 다 하기 위하여 탈당한 것이다. 원세훈씨를 비롯한 우리들의 탈당을 가리켜 한민당의 분열이라느니 보다는 좌우합작의 성립을 계기로 한 국내정국의 일대 분해 재편성과정이라고 본다. 현재로는 신당조직의 의사는 없으나 반드시 지식층 기타 대중의 적극 지지할 일대 세력에 집중될 시기가 올 것만은 확신한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11일자)


7원칙 내용은 10월 4일부터 확정되어 있던 것이므로 7일의 공식 발표 전에도 관심 있는 이들은 관련된 토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8-9일 중 탈당한 한민당원들은 당의 태도를 미리 예측하고 탈당 결심을 굳혀놓고 있던 사람들이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탈당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신문> 10월 13일자에는 김용국 등 17인이 11일에 탈당한 사실이 보도되었다. 다급해진 한민당은 원세훈의 성명을 반박하는 성명서와 당의 입장을 변명하는 선전부 담화문을 11일 중에 거듭 발표했다. 선전부 담화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전일 본당의 성명은 좌우합작을 반대한 것이 아니요 합작원칙 중 토지개혁 기타에 이의를 가진 것이다. 따라서 입법기관을 반대함도 아니다. 도리어 본당은 토지문제를 가지고 선거에 임할지며 입법기관에 들어가서도 토지문제로 당책을 관철하려 한다." (<서울신문> 1946년 10월 12일자)

좌우합작을 반대한 것이 아니란다. 합작위원회의 합작원칙이 구속력이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 반대가 아니라면, 어떻게 말하는 것이 반대란 말인가? 한민당은 입법기관만 환영하고 다른 모든 합작 내용에 반대였다. 입법기관만 환영한 것은 하지 등 미군정 당국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미군정 당국자들은 입법기관에 묻어 들어오는 다른 내용도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입에 맞는 떡만 집어 들고 다른 떡은 걷어차는 한민당, 옳고 그르고를 떠나 참 한심한 행태였다.

지난 1월 4당 코뮈니케를 놓고 원세훈과 함께 한민당 주류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던 한민당 감찰위원장 김병로는 7월 군정청 사법부장에 취임하면서 당적을 벗어나 있었다. 그 또한 12일 기자회견에서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한민당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나는 사법부에 몸을 두게 될 때 벌써 정당관계는 떠난 것이므로 어느 정당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려고 아니 하나 원래 토지정책에 있어서는 무상으로 국유됨을 원칙으로 하여 농민에게 균등분여할 것이며, 지주에게 대하여는 균등생활을 확보할 정도에서 보상하면 정할 뿐이다.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서는 다소 충분치 못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현하 국내외정세에 비추어 우리 독립을 촉진시킴에는 민족통일을 기하려면 좌우합작을 추진시켜야 될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 좌우합작의 원칙에 대하여는 이것을 민족적 총의로 적극적 지지를 아끼지 아니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무엇을 말하든지 여기에 반대하는 것은 하등 정치적 의의가 없을 줄로 안다." (<서울신문> 1946년 10월 13일자)

한민당은 12일 긴급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대책을 의논했다. 그때까지 탈당자 49인 중 30인이 중앙위원이었다. 150석의 중앙위원회에서 30석의 결원은 작지 않은 구멍이었다. 12일 회의에서 몇 가지 기구 변경과 함께 중앙위원 결원을 보선했지만, 주류의 극우노선에 대한 반발은 아직도 다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10월 21일에 89명이 집단으로 탈당했는데, 그중에는 중앙위원 50인과 대의원 5인이 들어있었다. 앞서의 탈당자들과 합치면 중앙위원 절반 이상이 당을 떠난 셈이다. 이번 탈당자는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이 사태를 관망하다가 주류 측의 대응 방향을 보고 끝내 탈당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공동성명에서 한민당의 반동노선을 비판했다.

"8·15 후 계급분립운동 즉 건준의 계급분파적 지도 인공의 비인민적 계급분파적 구성 등이 미치는 조선민족해방운동에의 악영향이 자못 큼에 감하여 전민족적 혁명세력의 집결을 의도코자 결성된 창립 당시의 한국민주당은 확실히 민족혁명적 존재이었다. (…) 그러나 당내 일부 지도간부는 이 기구개혁에 도리어 불필요한 세력을 인입하여 가지고 당내의 진보분자에 대한 보수적이며 지주적인 대립관계를 더욱 격화케 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이며 지주적인 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이 아닌 것은 누구도 아는 상식이다. 이에 당내 진보분자로 자임하는 아등은 (…) "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6년 10월 22일자)

10월 21일의 '제2차 탈당파'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김약수(1890?-1964?)였다. 본명이 김두전인데, 김원봉과 함께 도피행각 중 가명삼아 약수(若水), 약산(若山)의 아호를 나란히 쓰게 되었다고 한다. 식민지시대에 쟁쟁한 사회주의 운동가로 6년간 복역도 한 김약수가 한민당에 참여한 것은 박헌영 일파가 건준을 장악하는 데 대한 반발에서였다고 한다. 후에 국회부의장으로 있다가 1949년 6월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받던 중 6-25 때 납북되었다. 가장 기구한 운명을 겪은 정치인의 하나다.

이 제2차 탈당으로도 한민당의 탈당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1946년 11월 23일자와 28일자 <서울신문>에 "한민당에서 姜仁澤 외 20여명 탈당", "한민당 중앙위원 崔養玉 외 20여명이 탈당" 등 기사가 계속 나타난다. 그러나 한민당 주류는 '과도입법의원'이란 이름으로 추진되던 입법기구 선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이제 한민당은 '민족당'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지주당'의 본색을 거침없이 드러내기에 이른 것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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