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합작위원회에서 '합작 7원칙'을 발표했다.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이 맞서 있던 두 달간의 교착상태를 깨뜨리고 처음으로 공식적 합의 사항을 생산해낸 것이다. 7원칙에 대한 실질적 합의는 10월 4일에 이뤄졌고, 준비를 거쳐 7일에 김규식과 여운형의 공동 성명 형태로 발표한 것이다.
본위원회의 목적(민주주의 임시정부들 수립하여 조국의 완전 독립을 촉성할 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 원칙을 下와 如히 의정함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 할 것.
2)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할 것.
3) 토지 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 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입법 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케 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 하에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 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동아일보> 1946년 10월 8일자)
7원칙의 내용에 대해 강만길과 심지연은 이렇게 논평했다.
합작 7원칙은 첫째 좌-우에서 가장 큰 쟁점으로 삼고 있던 3상 결정 문제에 대해 좌익이 주장한 것처럼 총체적 지지는 아니었으나 이를 일단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미소공위의 재개를 촉구하고 이를 통한 임시 정부의 수립을 요망함으로써 반탁을 주장해 온 우익으로서는 크게 양보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5원칙과는 달리 7원칙에서는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어, 이 부분은 8원칙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토지 문제에서 무상 몰수-무상 분배 대신 몰수-조건 몰수-체감 매상과 무상 분배 등 일종의 절충안을 취했으며, 친일파 처리 문제에서는 좌-우의 주장과는 별도로 합작위에서 친일파 처리 조례를 만들어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심의 결정토록 했다. 이는 친일파 숙청을 계속 주장했던 좌익의 큰 양보라고 하겠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1>(한울 펴냄), 211쪽)
토지 문제는 다른 어느 문제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 문제라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토지 문제에 대한 원칙에서 핵심 내용이 '체감 매상'이었다. 몰수(조건 몰수 포함)는 지주의 신분에 따라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었음에 반해 체감 매상은 모든 지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중소 지주에게 스스로 경작할 면적을 넘는 소작지가 조금 있을 때는 시가대로 매상하되, 매상할 소작지가 많은 대지주의 경우 면적이 넓을수록 매상 가격을 할인한다는 것이 체감 매상이었다. 전기 요금이나 소득세 누진 원리를 거꾸로 적용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대지주의 땅에 대해서는 명목은 '매상'이라도 '몰수'의 의미가 곁들여지는 것이다.
체감 비율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좌우될 여지는 있지만, 일단 우익의 '매상' 주장과 좌익의 '몰수' 주장을 절충시키는 길은 분명히 만들어진 것이다. 분배받은 농민에게는 수확의 2할을 현물세로 징수하는 방침이었으니, 이 점에서는 25퍼센트 현물세를 책정한 이북의 토지 개혁보다도 왼쪽으로 기울어진 방침이었다.
강만길과 심지연의 논평처럼 이 7원칙은 좌우 간의 합작을 위해 적절한 방향으로 꼭 필요한 내용을 담은 것이다. '합작'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최대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여러 방향에서 나온 이에 대한 논평을 시간 순서대로 살펴보겠다.
여운형의 인민당은 공식 발표 전날인 6일 확대위원회를 열어 7원칙 지지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원래 합작회담의 좌익 대표단은 민전을 배경으로 삼았는데, 10월 초순 시점에서 민전은 박헌영과 이강국의 도피 등 사정으로 인해 정상적인 대응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여운형은 7원칙에 대한 좌익의 광범위한 인준을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인민당 확대위원회를 연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에 반대하며 무조건 합당을 추진해 온 소위 '48인파'는 7일 이 확대위원회 결정을 배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박헌영 노선을 추종하는 이 집단의 움직임에서 박헌영의 태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7일에 이승만은 기자단과의 회견 중 7원칙에 대해 "나는 무조건으로 이를 지지하고 과거 5개월 동안 정치적으로 침묵을 지켜왔다. 그러나 좌우 합작이 최초의 조건대로 방금 진전 중인지 자세히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반대하는 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으면서도 반대하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한편, 한독당은 같은 날 "민족적 양심과 민족적 열의로 보아 8·15 이후 최대의 수확"이라며 전면적 지지의 뜻을 밝혔다.
10월 9일자 <서울신문>과 <동아일보>에는 여러 방면에서의 논평이 실렸다. 이승만은 발표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당분간 침묵을 지키겠다고 했고, 민주의원에서는 이미 사전 통과가 있었던 내용으로 당연히 지지한다고 했다. 새로 결성된 신진당과 사민당도 찬성과 지지의 뜻을 밝혔다. 그런데 민전의 사무국장 대리 박문규는 반대 의사를 밝혔다.
"민전 측의 5원칙은 비단 좌우 합작을 위한 우리의 원칙일 뿐만 아니라 남북 통일과 민주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원칙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좌우 합작은 그 본래의 사명을 떠나서 南朝鮮 단독의 입법 기관 설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므로 좌우 합작 7원칙에 대하여는 반대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10월 9일자)
7월 하순에 제출했던 5원칙에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인민당 48인파의 뒤를 이어 박헌영 측의 입장을 보여준 것이다. 여운형이 7일 새벽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가 8일 밤에 풀려난 일이 있는데, <동아일보>는 (10월 11일자) 박헌영과 담판을 가진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박헌영이 10월 6일 평양에 나타난 사실이 후에 확인되었으므로 박헌영과의 담판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7원칙 발표를 막기 위한 박헌영 일파의 소행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여운형의 납치 경위에 대하여는 본인의 건강이 극도로 쇠약하여 면회를 일체 사절하고 방금 대학병원에 입원 가료 중인데 신임할 만한 측근자의 말에 의하면 조선공산당 박헌영파에 납치당하였던 것이라 한다.
7일 아침 모 청년이 여 씨를 찾아와 '박 선생이 홍 선생 댁에서 기다리신다'고 하여 박 씨로부터의 청하는 편지를 전하였던바 여 씨는 곧 청년을 따라 원남동 로타리 부근까지 도보로 인도되어 다시 자동차에 태워 박 씨가 피신하고 있는 모처에 합작을 거부하는 박 씨와 만났다. 격론 끝에 여 씨는 흥분한 나머지 뇌빈혈을 일으키었고 박 씨는 여 씨의 강경한 태도에 논쟁을 단념하고 다시 여 씨를 자기 직속 청년 모모에 인도하였다 한다.
여 씨를 인도받은 청년들은 수 시간에 걸쳐 여 씨를 에워싸고 합작 반대를 애원 혹은 공격하였었으나 씨는 단연 합작을 주장하였으므로 청년들 역시 설복할 것을 단념하고 8일 밤 자동차로 명륜정 김모 집까지 돌려보내게 되었다 한다.
중도 노선을 체현한 7원칙에 대해 극좌와 극우가 반대하고 나설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민당도 당연히 반대 입장에 섰다. 그러나 7원칙에 "모호한 점"이 있다며 다소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합작 7원칙 중 모호한 점이 있는 것이 유감이다.
1) 제1조에 있어서 3상 회의 결정에 의하여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을 기함에 운운한 것은 한민족의 치명상인 신탁 통치 문제에 대하여 하등 언급한 바 없으므로 본당은 이에 전민족의 총의를 대표하여 신탁 통치 반대의 태도를 재해명하는 바이다.
2) 제3조에 있어서 토지 제도를 개혁하여 경작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은 본당의 원래부터 주장하는 바이나 유가 매수한 토지를 무상 분여한다는 것은 국가의 재정적 파탄을 초래하게 될 것이요 이 재정적 파탄을 면하려면 부득이 농민에게 중세를 과하게 될 것이며 또 무상 분여한 토지는 결국 경작권만을 인정하고 농민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고 말지니 이는 농민에 대한 일시 기만책이 됨을 불면할 것이다. 이에 본당은 단호 반대하는 바이다.
3) 당초 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상임위원과 연석 회의에서 결정한 8기본 대책과 상위된 점이 많음을 이에 지적해 둔다.
4) 합작위원회의 합작 원칙은 동 위원회 자체 내의 결정이요 장래 설치될 입법 기관이나 기타 정당 및 사회 단체에 대한 구속력이 없는 것을 차제에 부기하여 둔다." (<동아일보> 1946년 10월 9일자)
합작위원회에 참석했던 한민당 총무(요즘 정당에서 '최고위원'의 위치) 원세훈은 이 성명을 보자 바로 탈당계를 냈다. 원세훈은 지난 연초에도 김병로와 함께 4당 코뮈니케 작성에 참여했다가 한민당에게 뒤통수를 맞은 일이 있다. 원세훈의 뒤를 따라 많은 당원들이 탈당, 한민당이 위기를 맞는 상황은 나중에 설명하겠다.
한민당이 위 제3항에서 8원칙 집착을 주장하면서도 7원칙을 '전면 반대'하지 않은 점이 이승만의 유보적 표현과 함께 주의를 끈다. 조선건국청년회와 조선기독교청년회가 뒤이어 7원칙 지지에 나서는 것도 우익을 끌어들이는 미끼가 7원칙 속에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7원칙 본문으로 돌아가 제6항을 보라. '입법 기구'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한민당 등 극우파는 이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당시 자기네가 갖추고 있던 '실력'을 합법화, 항구화할 길이 거기에 있었다. 더구나 공산당이 탄압받고 있는 상황에서 입법 기구를 만든다면 우익의 확고한 지배를 받는 기구를 만들 수 있었다. 이승만을 따라 분단 건국을 추구하는 세력에게는 입법 기구 설치를 분단 건국의 계단으로 삼을 야욕도 있었다.
좌우 합작 회담이 시작될 때부터 하지 사령관 이하 군정 당국자들은 입법 기구 설치를 원하는 뜻을 밝히고 있었다. 합작 회담이 정체해 있는 동안 법령 118호로 "조선 과도입법의원 창설"을 발포해 놓기까지 했다(1946년 8월 24일). 7원칙이 나오자마자 발표된 하지의 특별성명을 보면 좌우 합작의 유일한 목적이 입법 기구 설치에 있는 것으로 그가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좌우합작위원회 대표 金奎植 박사의 정식 서한을 받아 동 위원회는 민주주의적 대표가 참가하여 남조선에 임시 독립 기관을 수립하자는 안을 만장일치로 추천하였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나는 좌우당 대표들이 조선 복리를 위하여 회합하였다는 것과 조선 자치를 향하여 획기적 민주주의 발전안을 추천하도록 결정하였다는 것을 들을 때에 매우 반갑습니다.
임시 입법 기관 수립은 조선 민족 통일과 독립 과정상 오늘날까지의 제일 진보된 걸음이라고 간주됩니다. 조선 민족의 완전 통일을 위하여 진력하시는 여러분의 애국열에 극진한 讚禮를 드립니다. 그들의 목적이 통일되어 있느니만치 조선의 장래는 매우 유망합니다. 미국의 근본 방침은 조선에 민주주의를 조장하며 장려하는 데 있습니다. 임시 입법 기관의 구성은 조선인에게 정부에 자기네 대표를 직접 파견하도록 됩니다. 이 임시 수립 기관의 조직에 관한 상세한 것은 현재 최종 수정 중에 있는 안이 미구에 발표되겠습니다. 그리고 합작 위원으로부터 입법 기관에 대한 제의가 있었는데 이것도 충분히 고려하여 법령을 발표하려고 합니다.
이 기관은 남조선의 입법체로 정부 고위급에 현재 있는 이와 앞으로 임명될 사람을 심사할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이 기관은 조선 문제를 자유롭게 충분히 토의할 논단이 되고 여기에 조선인의 자유 의사 발표가 조장되며 여론이 반영되며 국가의 복리를 위한 애국자의 애국심이 화합할 것입니다. 대체로 이 입법 기관이 조선 민중에 관한 미곡 수집 및 배급 과세 및 토지 재분배 등을 작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입법 기관은 민의에 순응하리라 합니다.
합작위원 7원칙은 합작 위원의 입장에서 추천한 것이요 입법 기관의 행동 및 결정 자유에 하등 권한과 구속을 줄 바는 아닙니다. 앞으로 조직될 입법 기관은 귀중한 조선 민중 대표 기관이 되며 누구나 다 같이 열망하는 2대 목표 즉 조선 통일과 조선 독립 달성에 큰 공헌이 있기를 나는 조선 애국자와 아울러 진심으로 축원하는 바입니다." (<동아일보> 1946년 10월 9일자)
마지막 문단에 음미할 만한 뜻이 들어 있다. 입법 기구가 일단 만들어지면 합작위원회에서 결정한 원칙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입법 기구 설치는 좌익에서 가장 완강하게 반대해 온 사안이었는데, 합작 성공을 위해서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입법 기구가 악용되는 일을 최대한 막기 위해 "입법기구에 관하여 하지 장군에게 대한 요망" 7개항을 7원칙에 붙여 발표했다. 하지는 합작 회담을 내세워 입법 기구 설치가 조선인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분식하면서 합작 회담의 결정이 구속력을 갖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입법 기구 문제는 다음 주에 세밀히 살펴보겠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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