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사태에 관한 군정청 당국의 첫 공식 발표는 10월 3일 조병옥 경무부장에게서 처음 나왔다. 그 발표에서 경찰의 피해만 "사망자 20명 중경상자 50명 행방불명 30명"이라 한 것은 충격이었다. 경찰 피해만으로도 해방 이후 최악의 사태였다. 충청도에서만 700명 경찰이 응원하러 달려갔다고 한다. 일반인 피해는 밝히지 않았는데, 경찰과 부딪치는 사태에서 일반인의 피해가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은 최근의 용산 기관구 사태까지 거듭거듭 확인되어 온 사실이다. 소식에 접한 사람들은 놀라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병옥은 이튿날도 경과를 발표했다. 경찰관 사망이 53명으로 확인되었다는 것, 대구 시내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영천, 성주, 왜관, 군위 경찰서는 탈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경남 통영에서도 5000여 명의 습격 시위가 있었다는 것, 약 4000명 경찰이 동원되었고, 그중 3388명은 타 지방 경찰의 응원 출동이라는 것 등이 이 발표에 들어 있었다.
5일에는 경무부의 발표가 있었는데, 조병옥의 전날 발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발표에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붙어 나왔다. 많은 경관의 가택과 가족들이 습격당했다는 사실, 대구형무소의 죄수 100여 명이 탈옥한 사실, 그리고 오후 7시에서 오전 6시까지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있다는 사실 등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성주경찰서에서 서장 이하 21명의 경관을 붙잡아 태워 죽이려다가 응원대의 공격으로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이었다.
7일에는 이례적으로 공보부를 통한 공식 발표와 조병옥 개인의 발표가 따로 나왔다. 공보부 발표는 각지의 상황을 간단히 전한 것이었는데, 조병옥의 발표는 마치 종료된 사태에 대한 종합 분석처럼 (1) "폭동 발단 및 만연의 과정", (2) "피해의 진상"에서 (6) "희생된 경찰관에 대한 선후책", (7) "전국적 치안 상태"에 이르기까지 항목을 나눠 서술했다. ("자료 대한민국사"에는 이 발표가 10월 8일자 <조선일보>, <서울신문>, <동아일보>에 게재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근현대 신문 자료"의 <동아일보> pdf 파일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병옥의 7일 발표는 경찰의 입장을 정당화하면서 "공산당 대구 책임자 손기채", "게릴라 공작 대원" 등을 출연시켜 '폭동'의 조직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이었다. 대구 사태에 대한 당시 정당과 언론의 논평은 민생고를 중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구의 콜레라 피해가 혹심했다는 점도 흔히 지적되었다. 그런데 일각에는 정치적 선동을 부각시키는 시각이 있었다. 조병옥은 이런 시각을 앞장서 끌고나온 것이었다.
대구 사태의 원인을 공산당의 선동으로 돌린 한민당, 독촉국민회, 민주의원 따위 조직, 단체들의 논평에는 신경 쓸 가치도 없다. 심각한 것은 10월 14일에 나온 하지의 특별 담화다. 그의 기본 시각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몇 대목에 밑줄을 친다.
"나는 신뢰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이번 남조선에서 생긴 폭동은 남조선에 거주하지 않는 선동자들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말했거니와 추가 물적 증거로 보아 그 폭동과 혹 장래 일어날 폭동까지도 이 위험한 무정부주의자 범죄자 및 선동자들이 조선국가와 민족의 복리와 안녕에 관심이 없는 지도자 지휘 하에서 주도히 계획하고 집행한 사실이 명확하다.
(…) 선동자들은 모든 곤란을 과장하며 식량 문제를 기화로 하여 별의 별 악질의 거짓말을 하여 급기야 純良한 조선 대중으로 하여금 폭동을 일으키도록 한 것이다. 폭동은 어려운 사태를 개선하려는 순진한 노력이 아니라 혼란과 불행을 초래하여 조선의 발전을 정지시키며 선동자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시키자는 음모에 불과하다.
이 선동자들의 악질 행동에 관한 證憑物을 일일히 발표하기에는 시간이 불허하나 애국자나 무엇을 생각하는 조선 사람은 과거 수일간 남조선에 생긴 사건을 보아 순량한 노동자와 농부와 학생이 매우 그릇 인도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동시에 자기네의 한 일을 냉정히 재고할 때에 깊이 뉘우치는 바가 있으리라고 한다. 나는 이 폭동에 참가한 사람들을 다 원망하는 바가 아니다. 그 군중의 대다수는 국가를 파괴하면서라도 사적 또는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려는 위험한 범죄자들에게 그릇 인도되었던 것이다. 이 선동자들은 현상의 불만을 주지하고 악용하여 지도자로 자임하고 소동과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 이런 만행이 계속될 우려도 많다. 그들의 전 노력을 남조선 혼란과 반항에 경주하고 있다. 그들은 근로자와 농부의 친구라 자칭하며 선동과 거짓말로 남조선의 순량한 대중을 어지럽게 했다. 대중이 욕망하는 모든 것을 다 줄 수나 있는 듯이 이것저것은 무상으로 준다고 약속해 가며 규율 정연한 정부를 타도하라고 충동했다. 경상남북도에서 경관과 양민을 다수 살상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범죄자로 자인을 했다.
나는 여러분들 지역에 들어온 근로 대중의 좋은 친구로 자임하는 그 자들을 냉정히 검토해 보라고 한다. 어디서 사는 자냐? 얼마나 오래 그 지역에서 살았나? 무슨 일을 하나? 대체 어떤 것을 전하고 있나? 신뢰할 만한 사람인가? 그들의 언약을 이행할 안이 있는가? 조선을 개선하기에 어떤 노력을 하는가? 그들은 곤란을 가할 노력을 권하는가? 조선 독립을 위한 질서 유지와 민주주의를 주창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소동과 폭행으로 세계 안목에 조선에 치명상을 주며 조선 자주 독립에 큰 지장을 주는 것인가?
(…) 노동자로서 조건 개선을 진정한다면 언제든지 환영한다. 이 요구를 노동자를 대표한 위원이 당국자에게 제출하여 파업을 계획하기 전에 토의하고 중재할 것이다. 정당한 불평이라면 그것도 숙고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아닌 순전한 정치적 선동자가 노동자의 이름을 팔아 가지고 이것저것을 강요한다면 그 청구의 정당성과 순량하고 참된 노동자들의 요구에까지도 의심을 가지게 된다.
정당한 노동 쟁의가 있다고 하여 반드시 소동이 있어야 될 이유도 없고 구실도 절대 없다. 그러므로 경상도에 생긴 폭동과 살상은 파업과는 관계가 거진 없고 오지 파업의 요구를 가용하여 감행한 살육뿐이다. 이런 종류의 불법적 행동은 대중의 복리보다는 소동을 일으키자는데 요점을 둔 자들의 선동이 아니면 생길 이유가 없다. 파괴와 살인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범죄행위요 조선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동아일보> 1946년 10월 15-16일자)
하지의 의도가 착한지 어떤지, 그 성격이 오만한지 성실한지를 떠나, 하지의 상황 인식 능력은 참 한심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커밍스는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한국 전쟁의 기원)> 548쪽 주1에서 하지가 1946년 10월 28일 맥아더에게 보낸 전보에서 "소련이 금년 가을 추수 후에 남한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가 늘어나고 있다"고 했음을 지적하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북측의 공격에 대한 경각심을 드러낸 일이 있다고 밝혔다. 하지는 경찰이 습격당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법과 질서의 시행을 대표하며 법을 지키는 사람들과 그들의 재산을 보호한다. 경찰은 선동자들이 일으키고자 하는 혼란을 가로막는 존재이기 때문에 선동자들은 경찰을 무너뜨리고 위신을 떨어뜨리기 위해 '증오 작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357쪽에서 재인용)
용어의 선택에는 해석이 곁들이기 쉽다. '대구 사태'나 '10·1 사태'는 해석이 개재되지 않은 중립적 용어다. 그런데 '폭동'이나 '항쟁' 같은 용어에는 특정한 해석을 전제로 하는 뜻이 담긴다. 그래서 사태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대구 사태에는 폭동의 의미와 항쟁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었다. 경찰은 '반란'의 인상을 미국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조병옥이 미국인 경찰부장 매글린 대령에게 10월 20일 건네준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지난 5월부터 빨갱이들이 군정에 대한 전 국민적 반대를 꾸며내려고 계획해 왔다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었다. (…) 이 계획은 공산당 지도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져 왔으며, 그 전국 조직과 지방 조직 그리고 그 자매단체들의 조직 핵심부를 통해 실행되어 왔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372쪽에서 재인용)
심한 민생고를 배경으로 터져 나왔다는 점에서는 '폭동', 미군정과 경찰의 횡포에 대항해 일어난 움직임이라는 점에서는 '항쟁'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나는 본다. 다만 '항쟁'이라 하기엔 그 주체와 지향성이 너무 불명확했다. 공산당의 '신전술'이 항쟁의 주체를 지향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현실적 지도력이 너무 미약했다.
커밍스는 대구 사태로 촉발된 '추수 봉기'가 지배자를 추방할 조직을 갖추지 못한 이상 '혁명'의 성격을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동학 운동과 같이 '농민 봉기'의 고전적 사례로 본다고 말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351~352쪽) 대구 사태 자체는 10월 21일의 계엄령 해제로 일단락되었지만 각지의 소요 사태는 12월까지 이어졌다. 사태에 대응하는 자세에서도 드러나는 미군정의 무능과 불성실을 보면 피할 수 없는 사태였다고 생각된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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