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 대한노총이 군정 당국이 자기네 요구를 수용했다 하여 파업 종식을 선언했다. 수용됐다는 요구 내용은 (1) 일급제 폐지와 월급제 채택, (2) 급식 계속(주식), (3) 출근 노동자에 1일 4홉 쌀 배급, (4) 임금 인상의 4개항이었다. 이것은 원래 9월 13일 전평 계열 노동조합에서 제출한 요구 그대로는 아니라도 대략은 충족이 되는 것이었다.
이 정도 요구가 정말 수용됐다면 일단 파업을 중지하고 세밀한 협상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었다. 실제로 이 시점에서 전평 계통 농성자들이 대표를 뽑아 군정청 운수국장에게 (1) 성의 있는 해답을 해줄 것, (2) 9월분 급료를 내줄 것, (3) 후생미를 분배해줄 것, 세 가지 요구를 했다는 기사도 며칠 후 나온 것이 있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2일자)
그런데 전평 측은 이를 묵살했다. 파업에 일단 돌입한 이상 중단하기 힘든 관성이 작용하는 것이고, 신문이 나오지 않는 상황 때문에 관성의 제어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파업 돌입 때 추가된 (1) 이북과 같은 개혁 조치의 시행, (2) 공산당 간부들의 체포령 철회 등 정치적 요구들이 협상에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전평의 정치적 요구와 그에 대한 집착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다. 근로 조건 문제가 어쩌다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미군정의 정책 노선에서 비롯된 것이니, 당장의 근로 조건 조정만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고 정책 노선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었다. 힘들여 벌인 파업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대한노총과의 협상을 통해 파업 탄압의 명분을 확보했다. 이승만이 직접 나서서 이끈 대한노총이 미군정의 극렬한 파업 탄압을 유도한 사실은 이승만 영향권의 극우단체들이 경찰과 손잡고 파업 분쇄에 나선 사실과 앞뒤가 맞는다. 26일자 일기에서 이승만이 대한노총 같은 단체의 위원장을 맡은 것이 이례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는데, 이승만이 군정청과 대한노총 사이의 협상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이로써 짐작할 수 있다.
대한노총은 군정청과의 '합의'를 내세워 바로 이튿날 피켓라인 돌파를 계획했으나 철도국 지부연맹의 반대로 하루 늦춰 9월 30일 새벽 공격을 시작했다. 테러단체들이 선봉을 맡았고 경찰이 뒤를 받쳐줬다. 경찰의 역할은 이렇게 발표되었다.
30일 오전 4시부터 행동을 개시한 수도경찰청 경관 3000여 명은 경무총감 장택상의 진두 지휘로 파업 농성중인 경성공장 기관구 통신구를 포위하고 파업단 간부와 종업원 약 1000여 명을 검거하여 시내 각 서에 분산 유치하였는데 동 11시경 장 총감은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파업 주모자와 경관에게 저항한 분자는 엄중히 처벌하겠다. 검거 당시 종업원의 저항으로 경관 7~8 명이 부상당하고 종업원 중에도 수천 명의 부상자가 난 모양이다. 검거된 1000여 명 중에서 여자와 18세 미만의 종업원들은 현장에서 즉시 설유하여 석방했다. 이번 검거는 물론 경찰의 입장에서 한 것이다. 죄명은 주택 침입 공무 집행 방해 포고령 위반 폭행 절취 등이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3일자)
장택상의 말 중 부상자 "수천 명"은 착오겠지만, 아마 수백 명 부상자는 나왔을 것이다. 이에 비해 경찰 부상은 7~8명에 불과했다니 어떤 양상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공격에 대한 농성자들의 대비가 아주 허술했을 리도 없다.
파업 노동자들은 경성공장과 용산기관구에서 농성하고 있었다. 전평이 식량 준비가 없이 파업에 돌입했기 때문에 경성공장에서 농성하던 노동자들은 25일 오전 용산역 광장에 모여 파업 선포 대회를 가진 후 해산, 귀가했다. 그러나 용산기관구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파업단 주력은 기관구에 집결하여 차고를 파업 본부로 정하고 농성을 계속했다. 경성공장에 가까운 용산기관구는 노동자가 800명에 지나지 않지만 열차 운전의 열쇠를 쥐고 있는 곳으로서 전평 조합원의 정예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대한노총의 세력은 용산기관구 내에서는 더욱 미약하여 간판조차 낮에만 걸고 밤에는 떼어야 할 정도였다. (성한표, "9월 총파업과 노동운동의 전환", <해방 전후사의 인식 2>(한길사 펴냄) 429쪽)
철도 기능에서도 전평 조직에서도 용산기관구가 핵심부였기 때문에 파업 농성의 본부가 된 것이다. 엿새째 농성을 계속하면서 농성자들은 대한노총만이 아니라 경찰의 공격에도 대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비를 무력하게 만든 것은 선봉을 맡은 우익 테러 단체의 공로였을 것 같다. 이 '전쟁'에서의 역할을 김두한은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나는 일본도를 빼어들고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 여러 곳에 숨어있던 전평원을 색출, 창고에 몰아넣고 점검해보니 2000여 명이나 되었다. (…) "너희들 중에 이번 파업 간부를 뽑아내어라. 안 그러면 할 수 없다. 개솔린을 뿌리고 불을 지르겠다." 그리고 개솔린을 그들이 수용되어 있는 창고 주변에 부었다. "자, 5분의 시간을 준다. 내가 개솔린에 실탄만 쏘면 그만이다. 튀어나오는 놈은 모조리 쏴 죽인다." 나는 기관총 2대를 그들 앞에 정조준시켰다. 시계를 내어놓고 시간을 쟀다. 4분이 경과하니 그들 중에서 "나가겠습니다."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전평 간부 8명이 내 앞으로 튀어나왔다. (…) 그러고서는 화부와 기관사를 뽑아내고, 기관차를 수리시켰다. 모든 철도 종업원들에게 즉각 취업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직장에 복귀 안 하면 그들의 가족까지도 몰살해 버리겠다고 말한 후 서약시켰다. (김두한 <김두한 회고기>(연우출판사 펴냄, 1963년) 153~158쪽, 성한표 위 글 430쪽에서 재인용)
성한표는 위 글을 인용하면서 주에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김두한은 이밖에 파업단 습격에 나서기 전 공포심을 없애기 위해 3000여 명의 대원에게 술을 먹였고, 자신도 술을 마셔 정신을 마취시켰으며, 자기 앞에 나온 전평 간부 8명을 생매장시키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고 주장하고 부하들이 이들을 죽창으로 찔러죽이고 역구내 하수도에 처넣고 시멘트로 복개했는데 그 때문에 미 군사 법정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은 일이 있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성한표 위 글, 447~448쪽)
강준만도 <김두한 자서전>(메트로신문사 펴냄, 2002년)에서 전평 간부 8명을 부하들을 시켜 죽였고, 파업 수습 후 장택상이 자기를 찾아와 "눈물을 글썽거리며, '김두한 동지! 당신이 나라를 구했소'라고 말하면서" 자기 손을 꼭 쥐더라는 김두한의 회고를 인용했다.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 대편 1>(인물과사상사 펴냄), 293쪽)
군정청의 미국인 중 가장 진보적 인물의 하나였던 노동문제 고문 스튜어트 미첨조차도(1945년 11월 25일자와 1946년 8월 9일자 일기 참조) 9월 30일의 상황은 하나의 '전쟁'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전장에 나가듯이 사태에 임했다.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러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약간의 무고한 사람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 오랫동안 걱정할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시의 외각에 수용소를 설치하여, 감옥이 만원이 되면 파업자들을 여기에 수용했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대처한 방식이었다. (성한표 위 글 441쪽에서 재인용. 그런데 성한표는 미첨을 군정청 운수부장으로 소개했는데, B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378쪽을 보면 미첨은 1946년 12월까지도 노동문제 고문의 자리에 있었고, 군인이 아닌 그는 대령급 군인을 앉히던 운수부장 자리를 맡을 신분이 아니었다.)
"약간의 무고한 사람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점"? 김두한이 2000명을 몰아넣은 창고에 불을 지르겠다고 날뛰고, 적발된 전평 간부 여덟 명을 때려죽이는 그런 사태는 상상도 못했던 것일까? 감옥의 만원 사태를 대비해 수용소까지 따로 마련했다면, 1천 수백 명의 대량 검거는 군정청이 계획한 것이다. 그런 대량 검거에 어떤 인명 피해가 따를지, 미군정 측은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두한의 회고로는 9월 30일 일어난 일이 '파업 분쇄'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날뛴 것은 우익 테러 단체였지만, 멍석은 미군정이 깔아준 것이다. 미군정은 왜 이토록 극단적인 대응책을 택한 것이었을까? 9월 29일 워싱턴에서 날아든 외신 기사 하나가 눈에 띈다.
[워싱턴 29일발 AP 합동] 과반 조선에도 내방하였던 미 하원 군사위원단 단장 세리단은 금주 조선주둔미군사령관 존 R. 하지 중장의 경질을 종용한 바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미 육군장관 패터슨은 하지 중장을 전폭적으로 신뢰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략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10월 5일자)
미 하원 군사위원단(아마 '군사위원회'를 가리킨 듯)은 8월에서 9월에 걸쳐 태평양 지역의 미군 주둔지를 시찰하는 중 9월 초순 조선을 방문했다. 위원들 사이의 미군의 조선 주둔 기간에 관한 이견은 보도된 바 있었는데,(<서울신문> 1946년 9월 4일자) 하지 사령관의 경질을 주장한 위원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 주장을 육군장관이 공식적으로 물리친 소식이 들어온 것이다.
하지의 점령군 사령관 역할에 미국 정계에서도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사다. 소련과의 관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은 미국 정계에서 초미의 과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하지의 실적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첫째, 극단적 반공-반소 태도로 조선에서의 미-소 관계를 경직시킨 점. 둘째, 군정 운영의 실패로 조선 남반부의 상황을 불안하게 만든 점.
반면 잘했다고 내놓을 만한 실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에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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