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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 소설 번역하는 노인의 조건은…

[2011 가을, 이권우의 선택] 권지예의 <유혹>

인생 이모작을 준비할 시기가 됐다. 증후는 이미 나타났다. 알려진 대로, 노화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는 사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이 반갑게 아는 척하는데, 분명히 얼굴이 낯익었음에도, 이름이 떠오를락 말락 할 때의 안타까움이라니. 제법 기억력 하나는 좋다고 자부했던 사람으로서 큰 낭패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번은 기껏 상대방이 했던 말을 시치미 떼고 있다며 나름 공세를 펼치다 뒤늦게 내가 한 말임을 알고 얼마나 민망했던지. 인정해야 한다. 젊음은 가고 이제 노년이 오고 있음을.

그래서 뭐로 인생 후반부를 보내야 고민해 보았다. 소극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무엇이 제일 걱정되는가.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치매가 치명적일 거라 짐작했다. 스스로 이성을 통제할 수 없다면, 그만한 치욕이 어디 있을까. 그래 치매 방지할 수 있는 일을 업으로 삼아 후반부를 보내면 좋겠구나 싶었다.

찾아보았다, 무엇이 좋은지. 그 가운데 나를 사로잡은 것은 외국어 공부였다. 옳다구나 싶었다. 살아오면서 잘한 것도 있지만 아직 익히지 못한 것도 있다. 외국어가 그랬다. 물론 우리말을 잘하고 잘 쓰는 것도 아니지만, 외국어 하나 정도는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해내지 못했다. 그럼, 이제 하자, 라고 마음먹었다. 근데 그냥 하면 아무래도 흥미가 떨어지니, 무엇을 위해 외국어를 공부할까 고민해보았다.

그러다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나중에 에로 소설 번역가가 되면 어떨까 싶었다. 착상은 불경스럽게도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정창 옮김, 열린책들 펴냄)에서 얻었다. 말하자면, 에로 소설 번역하는 노인으로 후반기를 살아도 재밌겠다는 짓궂은 생각이 들었던 셈이다. 짓궂다 한 것은, 다른 이는 에로 소설에 방점을 찍겠지만, 나는 노인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노인이 에로 소설을 번역한다는 것은 무엇을 상상하게 할까? 현실에서 못 이루는 것을 대신하는 것으로서? 아니다. 오히려 나는 어떤 거리 두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몰입해서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담백하게 거리를 두고 슬며시 미소 정도 떠올리는 것 말이다. 노인이 있어야 할 자리는 탐욕이 아니라 탈속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굳이 에로 소설을 거론하고 있는 것은 그 시절까지도 과연 언어가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하는, 거창하게 말해 문명사적 고민도 끼어 있다. 1000만 명을 동원한 영화 제작자한테 들었던 말. 요즘 우리 영화에 에로가 없는 것은 포르노 때문이라고. 흘려들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상당히 의미 있는 진단이라 싶었다.

다 까발리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 덜 보여주는 것들이 자리 잡을 수는 없을 터. 세상이 영상 중심으로 바뀌고 그것이 입체화하고 나중엔 감각까지 자극하는 시대가 곧 오리라. 그런데 고작 은유와 직유를 무기로 삼아 쓴 에로 소설이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할 수 있을까. 내 삶의 후반기에 과연 에로 소설이라는 것이 남아 있기나 할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책만 읽어오며 살아온 누추한 삶처럼, 인생 후반기도 쓰러져가는 것들 속에 내가 있지나 않을까 싶은 황량함이 든다. 그런데 미련하게도 나는 그 자리가 탐난다.

하여튼, 에로 소설 번역하는 노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당장 외국어를 공부해야할 터인데, 요즘 너무 바빠서 조금 나중에 배우기로 했다. 지금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내 삶의 특징. 그럼에도 야한 소설이 나오면 읽어두기로 마음은 먹었다. 이유인즉 거창하다. 남의 말을 우리말로 옮기려면 우리말답게 해야 한다.

그런데 장르의 특성을 잘 살리려면 그 분야의 책을 미리 읽어두어 나중에 유창하게 옮길 수 있는 능력을 미리 갖추어두는 것이 좋다. 더욱이 읽은 것 많고 아는 것 많은 나 같은 사람이 번역하면 당연히 윤문에 대한 유혹이 싹틀 터. 그럴 때 독자들을 위해 저자의 표현을 더 유혹적이게 다듬으려면 평소 에로 소설을 읽어두는 것이 좋을 터.

하지만, 이 작은 소망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당최 야한 소설이 나오지 않았다. 야하다고 해서 읽어보았지만 쓰레기라고 욕을 바가지로 하면서 던져 버린 소설이 한두 권이 아니다. 잘 모르는 모양이다. 에로 소설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러다 최근 귀동냥으로 '물건'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야하단다. 연재할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단다. 입맛이 당겼다.

▲ <유혹>(전3권, 권지예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내 노년의 삶을 위해 지금 투자해야 하는 법. 기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권지혜의 <유혹>(민음사 펴냄)을.

맛있는 섹스는 있어도, 맛있는 사랑은 없다. 사랑이 허기라면, 섹스는 일종의 음식이다. 이 도시에 음식점이 넘쳐나듯 사람들은 여러 메뉴를 놓고 고민한다.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맛있는 음식이 꼭 일치하지는 않으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맛있기도 한 음식에 사람들은 안도와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미식가라면 먹음직스럽진 않으나 맛있는 음식을 탐색하는 데도 모험심을 발휘할 것이다.

좋은 에로 소설은 통속성과 문학성 사이에 있다. 통속성은 작품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다. 너무 심오한 내용으로 나가면 에로가 아니다. 더욱이 통속성에는 기존 윤리의 인정이라는 점이 있다. 과정은 파격적인 일탈로 그려지나 결론은 사회 통념에 일치해야 한다. 이 원칙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에로 소설이 아니다. 성에 대한 천착을 통한 삶의 긍정이라는 수사가 붙는 본격 문학이 되어버린다.

문학성은 빼어난 수사를 바탕으로 한다는 뜻으로 썼다. 아무래도 에로 소설은 직유와 은유를 잘 활용해야 한다. 근데 직유는 잘못하면 에로 소설의 품격을 떨어트린다. 시정잡배가 하는 말이 그대로 반영된 듯하기 때문이다. 좋은 에로 소설은 은유의 향연이어야 한다. 저것이 이것을 가리키게 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어디 있나. 그러나 이 재주를 잘 부릴 때 에로 소설은 빛난다. 어차피 빗대어 말하는 것이 문학이지 않던가. 에로지만 소설이 되려면 이 길밖에 없다. <유혹>은 처음부터 흔들린다. 직유와 은유가 긴장을 이루기보다는 직유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다. 그럼, 흥미가 떨어질 수 있다. 불안하다.

인규는 유미에게서 편안함 이상의 안도감을 느꼈다. 자물통에 꼭 맞는 열쇠를 찾은 사람처럼. 섹스를 하면서 두 사람이 정말로 잘 맞는 짝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렇게 잘 맞을 수가 있냐. 이건 신이 내린 맞춤형 성기야."

그러면 유미가 응수했다.

"정말 그래, 어쩌면 세상에! 칼과 칼집처럼 꼭 들어맞아"

과연 그럴까? 잘 맞는 건, 칼보다는 칼집의 문제 아닐까. 칼집 나름이지. 칼과 칼집이라…자신이 생각해도 멋진 비유다. 서서히 취기가 올라왔다. 칼이 그리운 밤이다. 잠깐 요리사처럼 몇 개의 칼을 떠올려본다.


읽는 사람 처지에서 보면 멋진 비유가 아니다. 통속성은 상투성과 같은 말로도 쓰일 수 있다. 나 같은 독자는 좀 더 새로운 비유를 원한다. 그런데 너무 노골적인데다 익숙한 비유를 들고 있다. 주인공 유미가 멋진 비유라고 말한다고 해서 읽는 이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마술이란 부리기 어렵다. 아무리 드러내놓고 에로 소설이라 해도, 그런 만큼 어떤 긴장된 선을 유지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어렵다. 뜻밖에도 에로 소설 독자들의 입맛은 까다롭다.

유미는 손으로 김 교수의 널름대는 '혀'를 자신의 먹음직스러운 백도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손으로 그것을 쥐고 세심하게 가슴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폭신폭신하게 잘 익은 따스한 호빵 같은 가슴의 부드러움과 귀엽게 튀어나온 작은 산딸기 같은 유두의 단단함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섬세한 애무 속에 김 교수의 관능이 겨우내 얼었던 샘물이 봄을 맞아 녹는 것처럼 솟아나려 했다. 깊게 계곡 진 두 언덕 사이에서 유미의 손안에 든 그것이 케이블카를 타듯 오르내렸다. 섬세한 유미의 손이 능숙하게 케이블카를 운전했다.

김 교수는 마치 눈앞에 아득히 솟구치는 기암절벽과 하늘이 빙그르르 도는 듯한 환영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화산이 폭발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제어할 수 없는 폭발과 함께 뜨거운 마그마가 분출됐다. 흰 대리석 구릉 사이의 계곡에 질펀하게 퍼질러 놓은 마그마를 유미가 두 손으로 문질렀다.


<유혹>에는 노골적으로 성애 장면을 그린 대목이 몇 군데 나온다. 그러나 그 대목이 과연 읽는 이들을. 경박하게 표현해 침을 꼴깍 삼키게 할 만큼. 자극했는지는 의심스럽다. 노골적인만큼 품위가 부족하다. 그 품위란 소설로서 갖추어야할 것을 말하는 바이니, 역시 수사학에서 만족할 만하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아무래도 시대 상황의 변화 때문인 듯싶다. 그러니까 마광수나 장정일이 파격적이고 노골적인 작품을 썼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너무 다르다. 그때는 야한 영화가 통하던 시대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보기에 에로 소설은 에로로서 기능은 다한 성싶다. 에로라고 통칭하는 것 이상의 자극을 영상으로 접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에로소설은 소설의 운명, 그러니까 과연 고작 언어로 사람들을 유혹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답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과장하자면, 후위로서 전위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유혹>은 세 권짜리 소설이다. 나는 입소문 듣고 1권을 읽었다. 이제 내처 2권을 읽을까?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손이 그쪽으로 간다. 그러나 나중에는 읽을 듯싶다. 나는 세상이 변하더라도 언어의 힘을 믿는 축에 남아 있을 사람이다. 이미지의 폭격으로 황량해진 문화 생태계에 홀로 남아 있는 언어라는 나무가 드리운 그늘에 몸을 누이고 있을 사람이다.

더욱이 나는 노년의 삶을 에로 소설 번역하며 보낼 사람이지 않은가. 언어가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여전히 자극하는 것을 더는 욕망 없는 눈으로 지켜보며 흐뭇해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말했듯, 책이나 읽으며 버텨온 내 전반기 삶처럼, 내 후반기 삶이 과연 가능할는지 불안해지기는 한다. 그래도 믿을 수밖에. 너무나 너무나 빈약한 그 언어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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