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로 단편(혹은 단편집)을 읽는다. 단편의 매력은 아쉬움과 충만감이다. '짧아서 아쉽구나' 혹은 '꽉 찼구나'. 그래서 나는 단편을 제대로 못 쓰면서 들입다 장편을 써대는 작가를 보면 '저 작가의 작가 정신엔 자의식이라는 항목이 없는 걸까?' 싶기도 하다.
대개의 인생에서 소설을 가장 많이 읽는 시기일 20대 때 읽은 가장 인상적인 단편집(혹은 중단편집)은 황석영의 <객지>다. '객지'를 비롯해 '낙타누깔'과 '삼포 가는 길' 등이 실린 책. 금서였는데 어렵사리 물에 젖었다 말라 한쪽이 불어나 있는 책을 구해 여러 차례 읽었었다. 나는 여전히 그 책보다 나은 단편집(혹은 중단편집)을 본 적이 없고 황석영이 그 책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걸 쓰는 걸 본 적도 없다.
'세계 명작'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 고등학생 때도 도스토예프스키와 파스테르나크는 몇 차례 시도했는데 늘 조금 읽으면 읽기 싫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문체에 예민한 내가 문체에 예민하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채 조악한 번역 문체에 고통을 느꼈던 게 첫 번째 이유인 것 같고(근래의 번역본들은 좋은 게 많더라만) 절반은 내 어떤 감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민족 감성' 같은 건 아니다. 배운 사람이라면 혹은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다 상찬한다는 <태백산맥>도 앞에 조금 읽다 말았고 '조선식 구라'가 흘러넘치는 <장길산>도 채 5권을 못 넘겼다. 그 소설들이 명작이라는 의견을 애써 반박할 의욕은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 작품들에게서 어떤 맥락에서도 매료될 순 없었다. 그런 내 나름의 '세계적' 문학적 궁핍 속에서 베른하르트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 <옛 거장들>(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현암사 펴냄). ⓒ현암사 |
"98년 신문 광고를 보고 삼. 어려워 보여 처박아놓았다가 99년 4월 현재 재미있게 읽고 있음."
나를 위해 적어놓은 글귀라는 걸 감안하면 "재미있게"는 '매료'의 표현인 것이다. 나는 1998년 어느 날 신문에서(필시 <한겨레>였겠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두 권, 즉 <옛 거장들>과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광고를 눈여겨봤을 것이고 며칠 후 그것들을 구입했다. 그리고 베른하르트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름의 인연을 꿰어 맞추자면 1998년은 내가 이른바 '글쓰기'라는 걸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2004년에 나는 블로그에 적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5년 전 우연히 그의 소설 <옛 거장들>과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그에게 반했다. 내가 인간이란 얼마나 가망 없는 존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베른하르트를 좋아한다는 걸 희한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베른하르트야말로 모든 이상주의자들의 의지처일 수 있다. 이상주의자는 그 이상 때문에 단순해지는 속성이 있다. 그 단순함은 다시 이상주의를 단순하게 만들고 혁명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인간과 세계에 대한 혐오다. 혐오를 모른다면 혐오를 넘어설 수 없으며 진정한 건강성과 아름다움을 구할 수 없다. "이렇게 가망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대체 내가 뭘 하겠다는 거지?" 이렇게 중얼거릴 줄 모르는 이상주의자는 위험하거나, 적어도 경박하다."
그리고 2008년 <소멸>의 추천사를 의뢰받고 이렇게 적었다.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지성이란 실은 혐오를 기반으로 한다. 왜냐하면 지성이란 지적인 것들의 축적도 지적 행동의 조합도 아닌 '세계에 반응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말했듯 여느 사람들이 제 앞의 문제에만 반응할 때 지성을 가진 사람은 세계의 문제에 반응한다. 그래서 지성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심지어 혁명에 투신하는 순간에도, 혐오를 품고 있게 마련이다. 나는 베른하르트에게서 지성의 한 정점을 본다. 그는 우파로 하여금 제 속물성을 자인하게 하며, 좌파로 하여금 제 이상의 결핍을 보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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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멸>(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조현천·류은희 옮김, 현암사 펴냄). ⓒ현암사 |
발간된 책엔 편집부의 실수로 마지막 문장 "그는 우파로 하여금 제 속물성을 자인하게 하며, 좌파로 하여금 제 이상의 결핍을 보완하게 한다"이 빠져 있었다. 그 출판사의 편집주간은 매우 미안해하며 '어서 2쇄를 찍어 빠진 문장을 살리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연락은 없다. 한국에서 베른하르트는 잘 읽히지 않는다.
건방지게 말하는 게 아님을 전제로 말하자면, 나는 그게 한국 지성 사회의 어떤 무딘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라 생각해왔다. 베른하르트가 지성 사회의 한 '대세'여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지성 사회에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않음이 말이다. 적절한 비교인진 모르겠지만, 한국의 지성 사회에서 우디 알렌이 그다지 먹히지 않은 것과 비슷한 맥락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당분간은 베른하르트가 새삼 많이 읽힐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베른하르트가 주는 지적 자극(혹은 쾌감)은 매우 섬세한 어떤 지점인데 한국의 지성 사회의 촉수는 이명박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무뎌졌기 때문이다. 모든 진지한 문학적 인문학적 사유와 논의들이 실제 삶과 만날 때는 '그래도 현실이 어쩔 수 없지'라는 한 마디의 말로 소멸되어버리는 사회, 그런 우스꽝스러운 지적 풍토와 그로 인한 '당연한'(베른하르트가 잘 쓰는 표현) 자괴감을 나와 이명박을 비교하고 이명박을 욕함으로써 씻어버리는 지성 사회에서 베른하르트가 새삼 읽힐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신자유주의적 독서 유행'(은 극단화하여 일단 신경숙과 공지영이 배가 터지게 식사하고 나머지를 박민규 김연수 김영하 등등이 어지간한 식사를 하고 나머지 작가들은 먹을 음식이 떨어져버린 상태에 이른)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안목으로 책을 골라 읽는, 이 답답하기 짝이 없는 나라에 대한 환멸과 갑갑함을 이명박 따위를 욕하는 것만으로 해소할 수는 없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베른하르트를 읽어볼 것을 정중히 권한다.
베른하르트는 문단을 나누는 법이 없어서 대개 책 한 권이 한 문단이다. 그리고 마치 랩을 하듯 반복되는 냉소와 혐오의 문장들은 처음엔 (내가 그랬듯) 어렵게 느껴지거나 반발로서 냉소와 혐오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소멸>처럼 500쪽이 넘는 작품은 베른하르트와 어지간히 정분이 난 다음으로 미루고 (내가 그랬듯) <옛 거장들>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처럼 짧은 장편부터 읽을 것을 권한다.
<옛 거장들>에 대한 소개는 누가 해도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이 소설은 빈에 있는 미술사 박물관을 배경으로 이틀에 한 번씩 이곳에 있는 틴토레토의 '하얀 수염의 남자' 앞에 서는 음악 평론가인 레거와 철학자이자 작가인 아츠바허의 대화를…'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베른하르트는 처음엔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할 수도 있음을 기억한 채 직접 읽어보는 일 말고는 어떤 식의 소개도 ('출발 비디오 여행'처럼 무식하리만치 많은 분량의 스포일러를 보여주는 소개라 해도) 무망한 작가다.
외국의 베른하르트 애호가들은 '베른하르트 대륙'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그 말은 그가 30여 개 언어로 번역된 가장 주요한 현대 세계 문학 작가라는 사실 말고도 그의 작품의 도저한 폭과 깊이를 애호가의 자긍심을 담아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다만 그 대륙에 발을 디뎌볼 것을 거듭 권한다. 그 이유는 앞서 인용한 내 글에 적힌 대로다.
대신 베른하르트가 자기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한 조언을 옮겨 적는다.
"극장에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첫 페이지와 더불어 막이 오릅니다. 제목이 나타납니다. 칠흑 같은 어둠—서서히 배경으로부터 그리고 그 어둠으로부터 차츰 모양과 의미가 드러나는 낱말들이 바로 그 인위적인 구성으로 더욱 두드러지면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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