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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좌를 위해 최악의 길을 걸은 '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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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좌를 위해 최악의 길을 걸은 '총파업'

[해방일기] 1946년 9월 26일

1946년 9월 26일

철도에서 시작된 총파업의 불똥이 제일 먼저 튄 분야가 출판이었다. 9월 25일 오후 4시 경성출판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감으로써 1주일 동안 신문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서중석은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에서 애초의 계획은 "출판과 보도 부문만은 노동자 인민에게 선전하기 위해 마지막에 파업을 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인데 이 계획을 벗어난 때 이른 파업 때문에 "노동자들의 투지 등 파업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고 파업의 효과도 반감"되었다고 평했다. 그렇게 된 사정을 각주에서 설명했다.

CIC 보고에 의하면 서울의 몇 개 신문 편집장들이 철도 파업을 불법적이라고 낙인찍은 것이 인쇄공 파업의 한 원인이라고 한다. 한 연구자는 이 파업이 당 지시라고 하여 일어났던바,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에서는 출판노조의 파업을 중지시켜 파업 전모를 광범히 선전하자고 주장했지만, 이승엽의 간섭으로 파업이 계속되었다고 기술하였다. 이 파업은 9월 28일에 열린 대회파에서 소집한 조선공산당대회에 대한 보도를 막기 위해서 박헌영 측근이 지시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간부파들은 쥐를 잡기 위해 독을 깨는 행위를 한 셈이다. (449~450쪽)

파업 진행 중 언론 기능을 스스로 마비시킨다는 것은 '총파업'의 목적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자해 행위였다. 위에 인용된 CIC 보고는 현장 분위기에서 출판노조가 파업을 서두른 이유를 찾았는데, 개연성이 전혀 없는 관점은 아니다. 9월 5일 몇 개 신문의 강제 정간으로 언론계 분위기가 격앙되어 있었다는 점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총파업에 두 달간의 집중적 준비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지도부의 방침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서중석은 공산당 대회파가 9월 28일에 소집해 놓았던 당 대회를 박헌영 일파가 차단하기 위해 출판노조 파업을 지시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는데, 이것은 노동 조건 개선에 목적을 둔 순수한 노동 운동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총파업을 이용했다는 이야기다. 이 가능성은 더 폭넓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신문의 실종은 혼란 심화의 조건이 되어서 며칠 후 대구 사태 발발에도 한 몫 한 것이었다. 공산당의 신전술에 부합하는 방향이었다. 서중석은 위 책 454쪽에 9월 총파업 서술을 마무리하면서 "9월 총파업의 손실은 정치적 목적이 지나치게 앞선 나머지 제반 여건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않은 당 지도부의 근시안적 오류의 산물"이었다고 적었다.

강준만은 9월 총파업에 25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고 1만1624명이 검거되었으며 그중 150여 명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정리했다. 그 결과 전평은 간부들의 대량 검거로 인해 쇠락해 갔고 대신 대한노총이 성장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인물과사상사 펴냄), 294쪽) 좌익의 입장에서도, 노동 운동의 관점에서도 큰 손실을 가져온 일이었다.

먼저 대한노총과의 관계부터 살펴보자.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란 당시의 이름이 보여주는 것처럼 1946년 4월 결성된 대한노총은 "극우 청년 단체의 분신"(서중석)이었고 "우익 정치 집단으로서 일종의 테러리스트 조직"(강준만)이었다. 그런 대한노총도 9월 24일 철도국 경성공장 파업에 참여했다. "공장 종업원으로서 다 같이 요구되는 사항이므로" 조직을 떠나 공동 투쟁을 하자는 전평 측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대한노총의 철도국 파업 합류에 파업 전선을 혼란시키려는 책략이 개재했을지도 모르지만 여러 사정으로 보아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철도국 경성공장 노동자 3700명 중 800명 정도가 대한노총 조합원이었다고 하는 것을(성한표, "9월 총파업과 노동 운동의 전환", <해방 전후사의 인식 2>(한길사 펴냄), 421쪽) 보면 현장 노동조합은 중앙 지도부의 정치성에 비해 노동 운동의 일반적 분위기를 갖고 있었을 것 같다. 당시 대한노총의 움직임을 성한표는 이렇게 정리했다.

대한노총 소속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파업에 동조하여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 지도부는 파업 당일인 24일부터 비상 태세에 들어갔다. 대한노총은 24일 인사 이동과 부서 개편을 단행하고 위원장으로 이승만을 추대했으며, 26일에는 이승만도 참석한 회의에서 파업 대책을 토의했다. 이 날 회의에서 40여 우익계 청년 단체가 결성한 파업대책위원회와 대한노총이 제휴하여 '총파업대책협의회'를 조직했다. 대한노총은 파업단이 제출한 요구와 비슷한 4개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방송을 통해 밝힌 하지의 방침에 좇아 노동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한 후, 빠른 시일에 파업을 파괴하겠다고 군정 당국자들에게 약속했다. 대한노총은 이에 따라 28일 아침 총무부장 김헌에게 철도 노동자의 직장 복귀를 방송케 하고, 29일 각 청년 단체를 선봉으로 피켓라인을 뚫고 들어가려고 했으나 정작 주체가 되어야 할 공장지부연맹이 아직 태세를 확립하지 않아 공격은 하루 연기되었다. (428~429쪽)

대한노총보다 격이 높은 단체에서도 위원장보다 권위가 높은 총재 자리를 맡는 것이 보통인 이승만이 이 상황에서 위원장을 맡았다는 것이 매우 특이한 일이다. 군정청과의 밀착 교섭이 긴요한 상황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군정청이 대한노총의 요구를 서둘러 들어준 것은 대한노총을 파업 파괴에 투입하기 위해서였을 텐데, 그를 위한 교섭이 필요했을 것이다.

대한독립노동총연맹에서는 철도 파업 문제를 해결코자 아래와 같은 4가지 요구 조건을 제출하여 군정 당국과 교섭한 결과 노동부장 및 운수부장의 의향으로는 제출한 요구안을 전적으로 수락할 용의가 있다는 확답을 28일에 받게 되어 30일 오전 8시를 기하여 취업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한다.

요구 조건

1) 일급제 폐지와 월급제 채택
2) 급식 계속(주식)
3) 출근 노동자에 1일 4흡미 배급
4) 임금 인상

(<조선일보> 1946년 10월 2일자)

이 기사에서 "30일 오전 8시를 기하여 취업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한 것은 10월 2일에야 신문이 나왔기 때문에 실제 일어난 결과에 맞춰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28일에 파업 중단이 합의되었다면 위에 인용한 성한표의 글 내용대로 29일 아침에 조업을 시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대한노총의 현장 노동조합이 공격적 진입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전'이 하루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한노총이라도 현장 노동조합은 중앙의 정치성과 거리를 두고 노동 운동의 본색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현장 노동조합과 중앙 지도부 사이의 분위기 차이는 전평도 마찬가지였다. 9월 23일 일기에서 경성 철도공장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이 (1) 쌀 배급(노동자는 4홉 가족은 3홉), (2) 일급제 반대, (3)임금 인상, (4) 해고 감원 반대, (5) 급식을 종전과 같이 계속할 것, (6)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 노동 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의 6개항이라 한 것은 9월 25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원래 노동자들이 제출한 요구에는 (6)과 같은 정치적 내용이 없었다. 순전히 노동 조건 관계 요구뿐이었다. 23일 결성된 '대우개선투위' 대표들이 24일 파업에 들어가면서 덧붙인 것이었다.

총파업의 동력은 현장 노동자들의 민생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민생고 해결에 전평의 도움을 기대했기 때문에 전평의 지도를 청했다. 노동 단체로서 전평은 이 기대에 부응하는 데 주목적을 두고 노선을 정해야 했다. 그런데 전평의 지도 노선은 정치적 효과에 더 연연했기 때문에 자생적 노동 운동 지도자들이 몽땅 뿌리가 뽑히고 대한노총이 현장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평 지도부의 역할을 평가하는 데 지도부가 총파업을 계획했느냐 아니했느냐는 질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전평 지도부가 철도 파업 단계에서부터 총파업의 지도를 떠맡고 나섬으로써 총파업은 그들이 계획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이미 그들의 투쟁으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전평 지도부가 총파업의 전 과정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다음 몇 가지가 지적될 수 있다.

첫째, 9월 총파업은 과연 통일된 마스터플랜이 있었는가 의심이 갈 정도로 조직적인 통제가 결여되어 있었다. 우선 앞에서 소개한 전평 상임위의 파업 계획이 거의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24일에 파업키로 된 경성전기는 이날의 파업 시도는 사전 준비가 없어 실패하고, 철도파업이 파괴된 후인 10월 1일에야 부분적인 파업을 실현시켰으며, 맨 나중에 파업하기로 되었던 출판노조는 "전평의 지시에 호응"한다면서 남 먼저 파업하고 말았다.

둘째, 9월 총파업에는 산별 체제가 거의 가동되지 않았다. 15개 산별노조 중 철도노조를 제외하고는 어떤 노조도 산하 전 노동자가 참여하는 전국적인 파업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산별노조들이 지지했다는 흔적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셋째, 9월 총파업에 대한 전평 지도부의 의사통일이 이루어져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철도파업단 대표의 일원이며, 철도노조 대표로서 전평 상임위원(서기국원)인 오병모는 (…) 다음날이면 총파업을 선언하게 될 전평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현실적으로 파업을 이끌어야 할 철도노조 대표로서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소극적 태도는 그가 바로 파업 회피 지령을 내렸던 서기국원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없는 것일까.

넷째, 파업 당시에 내놓은 철도 노동자들의 요구에는 전평 지도부가 총파업의 요구 사항으로 결정한 '정치적 요구'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정치적 요구들은 전평의 "총파업 선언"에 처음으로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해원동맹 파업 때에도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 철회" 요구는 제기되지 않았다.

(성한표, "9월 총파업과 노동 운동의 전환", <해방 전후사의 인식 2>, 426~427쪽)

9월 총파업과 그 뒤를 이은 대구 사태를 통해 조선 남반부의 좌익 역량은 뿌리 뽑히고 말라붙었다. 이것은 실권을 쥐고 있던 미군정의 반공 노선이 불가피하게 가져올 결과라고 말할 수 없다. 민중의 보호를 위한 사회주의 노선은 상당 부분 좌우 합작에 포용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모험주의 성향의 공산당 '신전술'에 말려들어 사회주의 정책조차 용납되지 못하는 풍토를 만들고 만 것이다.

나는 이 사태가 극좌와 극우 사이의 '적대적 공생 관계'가 이뤄지는 또 하나의 고비였다고 본다. 좌익의 전략적 역량이 박헌영 일파의 전술적 이득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그 사이에 우익의 헤게모니도 폭력 집단을 앞세운 극우파에게 돌아갔다. 몇 주일 후 좌우합작위원회가 곡절 끝에 이뤄낸 토지 개혁안을 거침없이 거부해 버린 것도 이 사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중석도 '적대적 공생 관계'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아래와 같은 상황 설명을 할 때는 그와 비슷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도 오가고 있지 않았을까싶다.

공산당의 신전술은 좌익 전체의 헤게모니 다툼과도 맞물려 돌아갔다. 좌우 합작 자체를 박헌영은 '원칙'에 어긋난, '반동'들과의 가당찮은 짓으로 보았지만, 좌우 합작이 계속되는 한 좌익의 헤게모니는 표면상 여운형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과 김구같이 수십 년간 해외에서 헤게모니 문제에 단련된 인사들도 미국이 좌우 합작을 지지하자, 1946년 6월부터 그해 연말까지는 정계에서 소외되었고 우익의 헤게모니는 김규식에게 집중되는 감이 있었다.

그런데 좌익의 경우 공서(共棲)의 특성 또는 구조로 여운형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산당은 그 뒤에서 조직 강화를 하면 그 결실은 다분히 공산당에게 넘어갈 수 있었다. 또한 좌우 합작의 지원을 받아 좌익의 최대의 강적인 이승만과 김구를 약화시키고,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통일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건파 공산당 간부들은 종파주의 성향이 강했고, 헤게모니 문제에 민감하였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420쪽)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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