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9월 23일 정오 부산 철도 공장의 파업을 개시로 하여 며칠 사이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에 '9·23 총파업'이라 한다. 이튿날 경성 철도 공장이 뒤를 따르면서 비상사태가 빚어졌다.
운수 동맥의 심장인 경성 철도 공장이 24일 오전 9시부터 완전히 그 기능이 끊어졌다. 즉 지난 17일 최저 생활 보장을 위하여 여섯 가지 요구 사항을 운수부장과 철도국장에게 제출한 경성 철도 공장 3000여 명의 종업원들은 21일까지 그 건의에 대한 회답을 요구하는 동시에 만일 기한까지 회답이 없을 때는 최후적 행동으로 나간다는 경고를 했었는데 기일이 지나도록 하등 회답이 없으므로 드디어 24일 상오 아홉 시 종업원 대표들은 운수부장과 철도국장을 직접 면회하고 요구 조건을 관철할 때까지 파업을 단행한다는 정식 선언을 하고 전면적 파업에 이르렀는데 이에 앞서 부산 철도 공장 종업원 약 2000명도 23일 정오를 기하여 경성 공장과 같은 요구 조건으로 파업을 개시한 후 운수부장대리의 특별 방송까지 있었던 것이다. 한편 24일 종업원으로부터 파업 단행 선언을 받은 운수부장 코넬슨은 곧 운수부 과장이상 간부를 회의실에 모아 놓고 동 열시 반부터 이 문제에 대한 구수 협의를 하고 있는데 회의는 열두 시가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조선일보> 1946년 9월 25일자)
요구 사항 6개항은 (1) 쌀 배급(노동자는 4合 가족은 3合), (2) 일급제 반대, (3)임금 인상, (4) 해고 감원 반대, (5) 급식을 종전과 같이 계속할 것, (6)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이었다. (4)번 이외의 요구는 모두 점진적 노력의 대상이었다.
해고 감원 문제가 얼마나 긴박한 상황이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긴박한 상황이었다면 점진적 노력을 요하는 다른 문제들 틈에 끼워 내놓을 것이 아니라 그것 하나만을 걸고 투쟁에 나서야 했을 것 같다. 이 총파업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 요구 내용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전평이 주도한 이 전국적 파업 운동은 7월 이후 공산당이 채택한 신전술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신전술이란 그 동안 미군정에 대한 직접 비난이나 항거를 삼가던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 저항에 나선 것이다. 물론 공산당의 의도만으로 거대한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파업 확산을 위한 조건은 해방 이후 축적되어 온 것이었다.
1945년 11월 5일자 일기에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 배경을 설명한 것처럼, 일본인의 철수를 계기로 조선 노동자들은 새로운 권리 의식과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많은 공장에서 자치위원회(직원위원회 또는 노동자위원회) 형태로 운영권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미군정은 자치위원회의 권한과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인 경영자들을 대신할 조선인 경영자들을 임명했다. 이 조선인 경영자들은 종래의 일본인 경영자들에 비해 책임 관계가 분명치 않은 조건에 놓였고, 그 조건을 사리를 위해 악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양심적인 경영자라도 미군정의 불안정한 경제 정책 아래 정도를 지키기 어려웠다. 1945년 8월 9일자 일기에 동양방직 사태를 적었는데, 노동 분규가 진행되는 가운데 회사 경영진이 대량의 쌀을 감추고 있던 일이 드러났다. 폭리를 위한 매점매석으로 비판을 받았으나 검찰은 결국 종업원의 생계를 위한 것으로 인정, 가벼운 처분만을 내렸다.
그런데 동양방직 사태의 진행 중에 노동 운동의 양상과 미군정 노동 정책의 변화 기류가 비쳐 보인다. 6월 중순에는 군정청 노동국 당국자들이 노사 간 중재에서 전평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이 회사의 간부와 경비원으로 '신우회'란 조직이 만들어져 노동자들과 충돌하는 일이 거듭 일어나더니, 8월 초에는 인천공장 노동자들이 전평을 탈퇴하고 대한노총에 가입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10일자)
6월에는 전평도 유화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 상황을 서중석은 이렇게 서술했다.
전평은 1946년 6월에 들어 한층 유화적인 지령을 내려보냈다. 6월 13일부 전평 서명의 지령 제24호 "일상 노조 운동과 군정 협력에 관한 건" 등 몇 개의 지령은 8월에 들어와 실로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 지령들은 파업을 가능한 한 억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6월 17일부 전평 서기국 서명의 특별지령 "조합 활동 특히 직장 내 활동에 관하여"에서는 "파업 태업 등의 항목에 관하여"라는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당면의 조선 현실은 경제 부흥에 의한 자주 경제의 수립이 긴급히 요청되고 있으며, 우리 노동자의 생활 향상도 경제 부흥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우리는 경제 부흥과 노동 조건 개선을 병진시키는 투쟁을 전개시켜야 한다. 산업을 고의로 파괴하려는 기업가와 물가 자재를 방매하여 폭리를 취하려는 모리배가 있는 타방, 태업, 파업을 구실로 노조를 파괴하려는 여러 가지 음모가 있고, 기타 여러 가지 정치적 관계로 보아 파업, 태업 등의 전술은 될 수 있는 대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승리를 위하여는 파업이 절대 필요하다 할지라도 이를 분산적으로 무계획하게 기분적으로 단행한다면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니, 금후에 있어서의 파업은 상부기관의 지도 없이 파업해서는 안 된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446~447쪽)
1946년 6월에서 8월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가. 우익에서 전평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대한노총은 4월 8일 설립된 후 노동계에서 단연 열세에 처해 있었다. 1918년생으로 조선차량에 근무하면서 대한노총 설립에 참여한 김명식은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군정에서 노동조합 말고 다른 단체는 공장에 들어갈 수 없도록 했기 때문에 우리도 노동조합을 만든 거죠. 대한노총이 처음 생겼을 때 공장 직원 1700명 가운데 74명만 대한노총에 속해 있었고, 370명 정도가 전평에 소속되어 있었어요. 전평에서 임금 인상을 주장하니까 그쪽에 사람들이 많이 몰린 거죠.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261쪽)
군정청의 노동 정책 담당자들은 노동조합의 발전을 유도하기 위해 전평을 존중하는 정책을 제안했다. 그러나 5월 이후 미군정 고위층이 정판사 사건 등 공산당 탄압 정책을 취하면서 공산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전평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태도를 차츰 거두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이용해 우익에서 만든 대한노총이 세력을 확장한 것이었다. 동양방직의 '신우회'와 같은 구사대 성격의 조직이 대한노총에서 일반적 형태였을 것 같다.
김명식의 회고에서 전평이 임금 인상을 주장했다고 한 것은 대한노총에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겠다. 전평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조직인 반면, 대한노총은 노동 운동에 대항해 사용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었다. 1929년생의 유병화는 해방 직후 대구 철도노동조합 결성에 참여한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다가 8월말 대구 철도노조를 결성하게 되었어요. 지금 시민회관을 일제시대에는 공회당이라고 했는데, 거기 소강당에서 10명 가까이 모여서 결성식을 가졌죠. 그 다음부터 내가 철도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했어요.
"노동자들이 한 달 봉급 가지고 한 달을 못 먹고 살면 안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해방 후에 한국의 경제 사정이라는 게 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 정부는 거기에 대한 대책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먹고 살 수 있는 조건을 찾기 위해서는 노조를 만들어 투쟁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던 거죠. (8·15의 기억>, 250쪽)
전평은 이런 자연 발생적 노조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권리 확대에 앞서 회사를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조직 활동을 필요로 했다. 식민지 시대에는 착취자의 역할이라도 확실한 역할을 가진 총독부가 있었고 경영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만한 책임감이나마 가진 존재도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회사의 장래를 위해 노동자가 나서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당시의 노동 운동에서는 권리 의식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였다. 위에 서중석이 인용한 전평 문건의 "경제 부흥과 노동 조건 개선을 병진시키는 투쟁"이란 대목도 책임 의식을 중시하던 당시 노동 운동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8월 중순 총파업 계획을 시작할 무렵 전평의 노선은 투쟁 일변도로 돌아서 있었다. 바뀐 방향을 서중석은 이렇게 설명했다.
7월 하순 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함에 따라, 이것에 입각해서 전평 상무위원회에서는 보다 조직적이며 집단적인 대중적 파업 투쟁 계획을 세웠고, 그 시기는 10월로 잡았다고 한다. 10월은 추수기여서 농민들의 추수 투쟁과 연결하여 노농 동맹을 강화할 수 있고, 미군정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평 상무위원회의 파업 계획은 공산당 지도부가 질질 끌어 8월 중순에 가서야 파업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내려 전평은 그때서야 갑자기 파업 준비에 착수했다.
전평의 신전술 채택은 8월 23일 "현하에 있어서의 스트라이크 전략의 문제-조선 노동 운동 당면의 제 문제, 특히 2, 3의 우익적 편향에 대하여"라는 노선 전환의 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장문의 문서는 앞의 파업과 태업 전술을 우익적 편향으로 비판하고, "태업, 파업, 시위운동 이외에 어떠한 투쟁 형태가 있단 말이냐! 그리고 또한 그와 같은 운동을 직장 내에서 하지 않고 어데서 해야 되느냐!"라고 반문하였다. 이 문서는 파업을 회피하는 것은 무장 해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노동자는 투쟁을 통해서 투쟁의 과정에서 교육되고 훈련되고 성장하는 것이며, 이상적인 상당한 준비가 없었다 할지라도 투쟁을 전개할 때에는 소여의 조건 하에서는 전력을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문서는 판가리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에서 나아가, "실로 스트라이크는 그 전부가 '판가리 싸움'이며 조건 여하에 의해서는 '결정적 승리를 전취'할 수도 있으며…승리냐, 패배냐 하는 판가리 싸움은 '타협'을 전제로 하지 않고 적을 '굴복'시킬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역설하였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447~448쪽)
"판가리 싸움"이란 말로 모험주의 성향을 노골적으로 밝힌 투쟁 지상주의 노선이었다. 이런 노선 전환을 불러올 만한 요소가 미군정의 경제-노동 정책의 그 사이 변화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전격적이고 전면적인 전환을 가져온 것은 미군정의 일반 정책 변화가 아니라 공산당의 입장이었다.
공산당의 신전술은 미군정의 공산당 고립 정책에 대항해 박헌영 중심 공산당 주류 세력이 좌익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총파업이 빚어낸 경색 국면은 좌우합작의 기반을 위축시켰을 뿐 아니라 좌익 합당에서 박헌영 반대파의 손발을 묶는 효과를 가져왔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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