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지켜온 국제주의 노선이 패권주의적인 국가주의 노선에 밀려나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 발표에 이르게 된 사정을 몇 차례 언급한 일이 있다.
국제주의 노선을 확고히 세운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때(1913~1921년) 재임한 윌슨 대통령이었다. 1918년 1월 윌슨이 의회 연설에서 발표한 14개조가 그 출발점이다. 전쟁 후 세계 질서의 원리에 대한 미국의 제안이라 할 수 있는 14개조는 민족자결주의, 민주주의 확산, 자본주의 확산 그리고 제국주의와 고립주의를 아울려 배격하는 국제 협력주의로 요약되는데 이것을 '윌슨주의'라 하고 국제 정치 노선으로는 국제주의라 하는 것이다.
당시 열강들은 윌슨주의를 이상주의적 경향으로 간주했지만 그것은 종래의 제국주의와 비교해서 보는 상대적 관점일 뿐이다. 식민지 쟁탈전에서 뒤진 후발 열강 미국이 국제적 영향력을 키워가는 데는 현실적 효용이 큰 정책 노선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초강대국으로 미국의 위상이 바뀌면서 국가주의에 자리를 내주게 되지만, 그 단계에 이르러서도 국제주의는 미국이 세계 질서를 바라보는 1차적 기준으로 계속 작용하고 있었다. 직접적 영향력의 증대를 꾀하는 국가주의 노선은 이곳 저곳에서 국부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종전 당시 미국 정부는 중국을 아시아 지역 질서의 축으로 삼고 일본의 힘을 없애는 국제주의 노선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한편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에는 일본을 미국의 '맹방'으로 부활시키려는 국가주의 기류가 일어나고 있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으로 일본의 부활이 결정되는 데는 그 사이에 진행된 중국의 공산화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조선과 일본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중국 사정의 변화를 수시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전쟁 중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장개석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적으로도 편으로도 다루기 어려운 상대였다. 1944년 10월에 조지프 스틸웰로부터 중국 전역 사령관 직을 넘겨받은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훗날 "당시 중국은 미국의 장군들에게도 외교관들에게도 무덤과 같은 곳으로 여겨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장개석 정부와의 협력이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었다.
스틸웰(1883~1946년)은 4년간의(1935~1939년) 주중 대사관 무관 근무 등을 통해 중국어까지 습득한 미군 내의 '중국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2년간 중국 전역 사령관(중국군 총사령관 겸임)으로 있는 동안 장개석과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장개석의 무책임에 견디지 못한 스틸웰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졸라 장개석에게 보내는 친서를 받아냈다. 스틸웰에게 중국군 지휘권을 완전히 넘기지 않으면 일체의 원조를 즉각 끊겠다는 최후통첩을 담은 친서였다.
대통령 친서를 전달해준 패트릭 헐리 특사는 친서를 꺼내기 전에 체면을 살려주면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라고 충고했으나 스틸웰은 신이 나서 곧바로 친서를 장개석에게 들고 가서 윽박질렀다. 장개석은 루스벨트에게 바로 정중한 답장을 보내, 스틸웰만 아니라면 어느 미군 장군과도 충분히 협조하겠으니 제발 좀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스틸웰은 곧 소환되었다. 일본 항복 당시 미 육군 제6군 사령관으로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던 스틸웰이 조선 주둔군 사령관으로 거론되었으나 장개석의 반대로 배제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듯한데, 지금 그 출처는 확인하지 못했다.
'식초 장군(vinegar Joe)'이란 별명으로 통할 만큼 성질이 별나고 까칠한 스틸웰이 자기 약점도 많았기 때문에 장개석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려나고 말았지만 장개석 정부의 부패, 무능, 무책임에 대한 불만은 대다수 미국 관계자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일본군과 싸우라고 보내주는 원조의 대부분이 횡령되거나 공산군과의 대결을 위해 빼돌려지는(이것도 일종의 횡령이다.)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은 공산당뿐이었고, 미국으로서는 국민당 정부의 안정을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옛 만주국 지역의 일본군 항복을 소련군이 받는 외에는 대만을 포함한 중국 전역의 일본군 항복을 국민군이 받게 했다. 국민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일본군이 무장을 유지하며 주둔 지역을 공산군으로부터 지키도록 한 미국의 방침을 트루먼은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군이 바로 무기를 내려놓고 바닷가로 행군해 가게 한다면 온 나라가 공산당에게 넘어갈 것이 너무나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국민군 부대를 중국 남부로 공수해 가고 항구를 지킬 해병대를 투입할 때까지 적군에게 수비대 역할을 맡기는 괴이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Harry S. Truman, <Memoirs> Vol. 2: Years of Trial and Hope, 1946–1953, p.66. <Wikipedia> "Chinese Civil War" 조에서 재인용, 필자 번역)
만주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의 향배가 중국 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소련은 장개석 정부를 연합국으로 인정하고 협조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의 공산 혁명을 기대하지 않고, 만주 지역에서 과거 러시아의 이권을 돌려준다는 장개석 정부의 보장에 만족한 것이다.
소련군이 공산군을 온갖 방법으로 은근히 도와준 데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공산당의 위협을 유지시킴으로써 장개석 정부와의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정부 차원의 의도, 그리고 공산당에 대한 점령군 관계자들 차원의 유대감.
장개석 정부는 만주 지역 진주 준비가 될 때까지 소련군의 철수 연기를 부탁하기까지 했다. 소련군은 이 부탁에 응했다. 그래서 1946년 봄까지 국민군이 만주 지역의 주요 지점들을 소련군으로부터 인계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를 벗어나면 대부분 지역을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군에게 접수한 무기를 포함해 상당량의 무기를 소련군에게 넘겨받은 공산군은 연안 일대의 옛 근거지에 버금가는 강력한 새 근거지를 만주 지역에 만들었다.
▲ 장개석과 모택동은 1945년 8월 28일부터 중경에서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앞줄 오른쪽부터 모택동, 장개석, 미국 특사 패트릭 헐리. ⓒwikipedia.org |
소소한 충돌이 이어지던 끝에 1946년 1월 국공 간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엄청난 원조를 중국에 퍼붓고 있던 미국은 국민당 정부의 안정이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뤄지기 바라며 국민군이 우세를 확보하도록 도와주되 도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엄격한 감시를 계속했다. (8월 22일자 일기에 적은 것처럼 중국은 미국 주도의 운라(UNRRA)로부터 5억여 달러의 원조를 받은 최대 수혜국이었을 뿐 아니라, 1947년 8월까지 2년간 44억여 달러의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직접 받았다. 그 곁에서 남조선 미군정은 2500만 달러의 차관을 마련해 준다고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으니 참 쪼잔하기도 하다.)
그러나 장개석 정부는 무력 토벌의 길로 나서고야 말았다. 휴전 상태에서 시간이 갈수록 공산당이 유리해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국민당 정부의 경제 정책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고, 공산당의 토지 개혁 약속은 일부 지역에서 실현되기 시작하면서 인민의 지지를 끌어 모으고 있었다. 1946년 6월 26일 화북의 공산당 점령 지역에 대한 국민군의 공격으로 휴전 협정은 무너졌고, 7월 20일 국민군 113개 병단의 일제 공격으로 시작된 전면전은 3년 후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앞으로 간간이 중국의 상황 진행을 소개하면서 1946년 7월 이후의 내전을 "해방 전쟁"이라 부를 것이다. 1945년 이전 국-공 간 분쟁은 "국-공 내전"이라 부르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19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주체로서 역할을 제대로 맡아 온 점을 생각하면 중국의 호칭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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