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의 빈곤>(피터 윈치 지음, 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을 놓고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와 서규환 인하대학교 교수 사이의 논쟁이 진행 중이다. 서 교수의 서평, 박 교수의 반론, 서 교수의 재반론에 이어서 박 교수가 자신의 입장에 대한 해명을 한 번 더 보내왔다. '프레시안 books'는 이 논쟁을 계속 지상 중계할 예정이다. <편집자> (☞관련 기사 : ①서규환(현대인은 과연 원시인보다 더 합리적인가?) ②박동천(마이클 샌델이 대통령? 그럼, 한국 정치가 나아질까?) ③서규환(이론,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 |
8월 19일에 <프레시안>에 실린 내 답변(②)에 대해 서규환은 몇 가지 논평과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응수했다(③).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차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따라서 논쟁이 본격화될 조짐이 있다는 그의 느낌에 공감한다. 그런데 이번에 불거진 견해 차이 가운데는 본질적인 입장의 차이라고 할 만한 것보다는 내 입장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데에 기인하는 면이 큰 것 같다. 따라서 아래 적는 답변은 반론이라기보다는 주로 해명이다.
1. 헌법, 헌정, 구성, 건설, 등에 관해
1-1. 서규환이 사용한 "헌정"의 의미를 내가 오해했는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론적 헌정(憲政)이라는 문구는 정치 사회의 조직 원리, 즉 정치 사회 구성원들의 행태를 규율하는 기본적인 규범을 가리키는 헌법 또는 헌정이라는 개념을 담론의 영역에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서규환은 "이론적 헌정"이라는 문구를 후세를에서 차용했으며, 법학계에서 말하는 "그 헌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논의의 초점을 가급적 좁히기 위해 (그리고 이 논쟁을 위해 내가 지출해야 할 추가적 업무 부담을 절약하기 위해) 일단 후세를과 관련된 논의는 피해가고 싶다. 하지만 후세를이 그 단어를 무슨 뜻으로 사용했든지에 상관없이, 서규환이 말할 때의 의미는 여전히 "그 헌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왜냐하면 서규환은 "생활 형식들 사이의 질적 차이에 대하여 비판적 논의를 할 수 있는 이론적 헌정(constitution)"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서규환이 "생활 형식의 질적 차이에 대하여 비판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윈치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했다는 맥락을 감안하면, 예컨대 아잔데의 주술과 근대 서양의 과학 사이에 어떤 질적 차이가 있는지를 논의하지 않는 것이 윈치의 결함이고 따라서 그런 결함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이론적 헌정"을 원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생활 형식의 창안에 소홀하다"고 윈치를 나무라지 않았는가? "생활 형식의 창안"을 말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어떤 새로운 (아마도 올바른) 사회 질서를 동경한다는 것이고, 그런 기획에 도움을 주기 위한 "이론적 헌정"이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이 생활 형식의 창안을 위한 논의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말의 질서로 이해했던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서규환이 쓴 문장을 이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여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알려주기 바란다.
1-2. 박동천은 구별해야 할 맥락들을 뒤섞고 있는가?
서규환은 이렇게 고발했다.
"박동천은 구별해야 할 맥락들을 뒤섞고 있다. 헌법 개정의 문제와 법의 구체적 실행 과정에서 정당한 법을 지키지 못한 것의 문제를 구별해야 한다."
한국의 평균적인 법률가에게서 이런 종류의 반응이 나왔다면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서규환이 내 발언에 대해 이런 인상을 받았다면, 고발의 바탕을 구성하는 내용들을 좀 더 세밀하게 밝혀서 말해줬더라면 토론의 초점을 정밀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헌법의 개정과 헌법의 적용이라는 문제는 자체로는 물론 같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 대목에서 논의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동일한 점을 시사한다. 내가 그 대목에서 논의한 주제는 헌장을 제정한다고 해서 인간의 행태가 합헌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합헌과 위헌의 경계가 어딘지에 관한 논쟁이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이 명제를 정립할 수 있는 근거로 나는 두 가지를 제시했다.
"그런데 원칙을 어떻게 정하더라도 그 원칙 안에 결코 포섭될 수 없는 양상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한 시점에서 어떤 원칙이 제정되더라도 장차 어떤 새로운 원칙이 등장해서 헌장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지는 그 헌장에 의해 규율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헌장에 규정된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원칙들이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역시 헌장에 정해진 원칙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헌법도 언제 어떻게 새로운 헌법이 등장할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서규환 교수가 이 두 논점 각각의 진위 여부에 관해서, 그리고 이 두 논점이 자신이 주창한 "이론적 헌정의 필요성"에 대해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에 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내게는 불행히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서규환은 대신 이 두 논점을 구분해야 하는데 내가 혼동한다고 꾸짖는다. 아마도 내가 이어서 "이 두 논점은 사실 동일한 이치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말한 것을 일컫는 것이리라. 내가 다소 조급한 표현을 써서 오해를 불러일으킨 면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덜 조급한 방식으로 내 의도를 표현해 본다.
먼저 "같다" 또는 "다르다"라는 개념이 우리의 삶과 맺는 연관의 고리 하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범주와 형태와 개념 등을 통해 각기 서로 다른 여러 항목들을 동일시한다. 예컨대, "사과와 오렌지는 다른가?"라고 물으면, 대개는 "다르다"고 답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먹을지 오렌지를 먹을지를 선택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사과가 좋다" 또는 "나는 오렌지가 좋다"뿐만이 아니라, "사과나 오렌지나 상관없다"는 대답도 완벽하게 정당한 답변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사과와 오렌지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한다면 어불성설이 된다. 다시 말해, 어떤 두 항목을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해야 할지 아니면 하나의 동일한 집합에 포함시킬지는 누가 어떤 구분을 왜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헌법 개정이라는 항목과 헌법 조문의 구체적 적용이라는 항목을 언제나 같은 것으로 다루는 것은 물론 잘못된 혼동이다. 하지만 이 두 항목을 어떤 경우에든 상통할 수 없이 다른 것으로 다루는 것도 잘못은 마찬가지이다. 이 둘에서 동일한 함의를 이끌어낼 수 있느냐 아니면 이 둘을 서로 다른 항목으로 봐야 하느냐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슨 주장을 펼치기 위해 그 두 항목을 거론했는지를 반드시 살폈어야 한다. 내가 펼친 주장의 핵심은 한 시점에서 어떤 규범이 정착되었다고 할지라도, 장차 계속해서 그것이 규범으로 작용할지 말지는 그 규범 자체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대한민국 헌법은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그런데 매번의 개정에서 그 시점과 그 내용이 최초의 제헌헌법에 의해서 결정된 것은 분명히 아니다. 나는 지금 아홉 번의 개정이 절차를 지켰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의 개정 때 어떤 조항이 어떻게 변경되느냐 하는 변경의 내용이 제헌헌법에 의해서 규율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차원에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한 시점에서 아무리 최선을 다해 최고의 원칙을 정해두더라도, 그것을 계속해서 최고의 원칙으로 떠받들지 말지는 결국 차후의 사회적 결정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헌법에 규정된 특정 조항을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로 조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차후의 해석에 맡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 개방적 헌정을 얘기하면서 "진리는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서규환도 이를 부인하지는 않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다시금 반복하거니와, 나는 헌법의 개정이라는 문제와 헌법의 적용이라는 문제가 언제나 똑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탄탄한 규범을 정함으로써 백년대계를 꾀하는 기획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불가피하게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남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는 정치적 헌법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리임을 주장하는 어떤 이론에도 모두 해당한다. 이론의 진릿값이란 그 이론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해지는 것이지 그 이론 자체에 의해 규정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찌 보면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사실을 나는 지적했을 뿐이다. 그처럼 당연한 사실을 굳이 부각한 까닭은 서규환이 "이론적 헌정이 필요한데 윈치는 그것을 소홀히 여긴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활 형식의 창안에 도움이 되는 이론적 헌정을 윈치가 추구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 되려면, 서규환이 기도하는 이론적 헌정을 통해 윈치에게도 바람직한 새로운 생활 형식을 창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에서 밝혀졌듯이 어떤 이론을 어떻게 구성하더라도 그 이론이 실제 인간의 삶에 대해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는 그 이론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을 가지고 사람들이 무슨 결과를 낳느냐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2. 생활 형식의 질적 차이에 관한 담론의 가능성
▲ <사회과학의 빈곤>(피터 윈치 지음, 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 ⓒ모티브북 |
a. 그는 아잔데 사회와 서양 근대 사회처럼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 생활의 총체적 형식들 사이에서 질적 차이, 즉 우열을 가릴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b. 이 우열을 가리는 중요한 기준으로 그는 비판적 합리성을 들고 있다. c. 그리고 김치와 치즈의 차이를 거론하기보다는 "사람을 먹지 않는다"는 점을 거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서규환이 염두에 두고 있는 우열의 기준은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나의 해석이 서규환의 취지를 엉뚱한 방향으로 투사한 결과라면 교정을 바란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내 입장을 해명하기로 한다.
2-1. 8월 19일의 답변에서 상세하게 제시했듯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 총체적인 우열을 가린다는 발상은 지탱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한 개인이 두 문화 중 하나를 선호할 수 있고, 그때 그의 주관적 선호를 나름의 이유를 대면서 정당화할 수는 있다. 이러한 정당화는 그 주체의 심리 안에서 전형적으로, "이 편이 질적으로 낫기 때문에 나는 선호한다"는 형태로 형성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아잔데 사회보다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우월한 생활 형식이라고 내가 판정한다고 해서, 그러한 나의 판정 때문에 아잔데 사람들의 삶이 나의 삶보다 열등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잔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긍지와 보람을 느끼는 것만으로 나의 현재 삶이 그들의 삶에 비해 열등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주제를 적절하게 선정한다면 서로 다른 삶의 형식 사이에 우열을 논할 수 있는 경우가 있고, 그러한 논의가 개인적 선호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열이라는 개념에 담겨있는 기본적인 특징 두 가지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첫째, 질적 우열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정의를 하더라도 인간의 기도(企圖)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열에 관한 모든 논의에는 인간의 선호라는 요소가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의 선호에만 의존한 판단 역시 피해야 한다. 인간의 선호를 논의의 기본 주제로 삼으면서도 개인적 선호에만 매몰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어떤 생활 형식에 관해 어떤 질적인 우열을 무슨 자격으로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따지려고 하는지에 관해 이런 담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분명해질 필요가 있다.
둘째, 내가 생각하기에, 질적 우열이라는 개념의 일차적인 의미는 생활 형식 사이에서가 아니라 특정 생활 형식 내부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원예라는 생활 형식 또는 스포츠라는 생활 형식 안에서 더 나은 기술이나 성과를 운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질적 구분의 척도가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원예와 스포츠 사이에서 질적 우열을 가리겠다고 하면 이상해진다는 말이다. 스포츠라는 생활 형식 안에서도 가령 야구 선수들의 기량을 비교하는 것이 야구 선수와 수영 선수의 기량을 비교하는 것보다 말이 되며, 야구 선수 가운데서도 투수의 기량을 비교하는 것이 투수와 타자를 비교하는 것보다 말이 되며, 투수의 기량을 비교할 때에도 가령 평균 자책점이라든지 승수 등의 개별적 차원에서 비교하는 편이 평균 자책점보다 승수가 더 우월한 기준이라는 식으로 비교하는 것보다 말이 더 잘 된다.
2-2. 비판적 합리성의 적용 범위 그리고 그 빛과 그늘
비판적 합리성이 작동하는 사회가 건강하다는 관점에는 나 역시 상당 부분 공감한다. 사실은 나 자신이 지금 비판적 합리성을 실천하느라 나름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신봉하는 비판적 합리성이 작동하고 있느냐 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서 예컨대 아잔데 사회와 같은 문화의 질적 가치를 평가하면 무리라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잔데 사회에도 어떤 면에서 비판적 합리성이 작동한다.
아잔데의 주술 의식은 나름 정합적인 논리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를 테면, 어떤 사안에 대해 판정을 내리기 위해 두 번의 의식을 거행하는데, 그 결과가 일치한다면 그대로 판정이 내려지는 반면에 상반되게 나온다면 추가적인 해석이 강구된다는 점이 그러하다. 만약 결과가 상반되게 나온다면 가장 먼저 의식이 제대로 거행되었는지 여부가 점검된다. 중간에 어떤 대목에서 부정(不淨)이 탔다든지, 벵게가 너무 많이 또는 너무 적게 사용되었든지와 같은 결함이 발견되면, 종전에 행해진 의식 전체가 무효화되고 새로운 의식이 거행된다. 이와 같은 점검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은 곧 두 번의 결과가 일치하더라도 누군가 반문을 제기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사실로 연결된다. 이만큼 아잔데 사회에서도 비판적 합리성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둘째, 근대 과학의 인과관계라는 개념이 아잔데 사회에는 없다.
근대 과학을 합리성의 모범으로 간주하는 시각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은 우리라면 과학으로 풀 일을 그들이 주술로 푼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파레토, 맥킨타이어 그리고 서규환 등의 시각에서 아잔데의 주술은 전형적으로 불합리한 일로 비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정은 오로지 과학적 합리성이 아잔데 족에게도 가용한 개념일 때에만 정당한 판정이 된다.
우리네 생활 형식에서 어떤 일의 원인을 발굴하다 말고 중간에 기도회 따위를 거행한 다음에 모종의 계시에 따라 결론을 내린다면 불합리한 행위로 성토당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인 까닭은 계시를 구하는 행위 자체가 불합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 인과관계를 추구해야 할 곳에서 계시를 구하는 범주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아잔데 족에게는 애당초 "과학적 인과관계를 추구해야 할 곳"이라는 영역이 없다. 그들은 공동체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주술로써 계시를 구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우리에게 익숙한 합리성을 준거로 그들을 불합리하다고 판정하는 것이야말로 비판적 합리성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한 결과이다.
서규환은 아마도 이렇게 반박해 올 것 같다. "인과적 합리성을 그들이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 그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에 관한 논의는 아래 4절에서 "개념이 없다고 해서 곧 실재가 없다고 단정하면 안 된다"는 언표와 함께 다루기로 한다.
셋째, 원시 사회에 비해 근대 사회가 질적으로 나아진 것인가?
서규환은 "주술적 사유는 (…) 아잔데 족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권의 원시적 단계에 나타난다"고 한다. 주술이 모든 문화권의 원시적 단계에서 나타난다고 보는 출발점에서 이미 주술은 과학적 합리성의 발전에 따라 사라져야 마땅한 불합리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아잔데의 생활 형식에서 거행되는 의식을 우리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과 견주어 말한다면 주술보다는 신앙, 신탁(神託), 계시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맞다. 종교와 신앙도 모든 문화권의 원시적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과학적 합리성이 발전함에 따라 없어져야 할 불합리라고 서규환이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 주제에 관해 내 입장을 밝힌다.
우선 신앙과 과학의 관계에 관한 나의 일반적인 입장은 <사회과학의 빈곤>에 붙인 해제(22~29쪽)에서 진술한 바 있다. 다시 요약하면, 신앙과 과학은 각각 (액면가로만 따질 때) 별도의 영역이므로 한 편에서 통용되는 이치를 다른 편에 그대로 적용하려 들면 곤란하고, 만약 (깊은 의미에서) 둘을 한데 묶을 수 있는 범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면 과학적 합리성도 믿음의 체계 가운데 한 형태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그 책 전체에서 윈치가 주장하는 핵심 논지이고, 내가 해제에서도 설명을 했고, 또 바로 위에 적은 첫째와 둘째 논점과도 겹치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부연하지 않겠다.
그 대신 두 가지만 지적한다. 하나는 역사 전개의 원시적 단계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은 근대 이후에도 공통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섹스, 음식 섭취, 수면 등이 쉬운 예지만 서규환은 이런 것을 "본능"으로 보아 "생활 형식"에서 핵심이 아니라고 아마도 치부할 것 같다. 그렇다면 신앙은 어떤가? 어떤 일이 특별히 불운하지 않으면 잘 되리라는 믿음, 내가 사먹는 곰탕에 특별한 이유 없이 독이 들어있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물리학 교수의 강의가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 기타 무수한 형태의 신뢰, 믿음, 신앙은 원시 사회의 특징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필연적인 바탕이다. 신앙이라는 범주 안에서 저급한 부류의 행태들을 과학이라는 범주 안에서 건강한 부류의 행태들과 비교하고 나서, 신앙이라는 범주 전체가 과학이라는 범주 전체에 비해 저급하다고 판정을 내리면 부당하다. 그리고 건강한 부류의 신앙뿐만 아니라 저급한 부류의 신앙도 인간사회가 유지되는 한 인생의 다양한 형식 가운데 하나로 이어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현령비현령 수준 이상의 정합성을 갖춘 말에 국한할 때, 애당초 원시적 삶의 형태와 현대적 삶의 형태를 총체적으로 비교하는 순간 질적 차이를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원시 사회의 야만성을 아무리 부각하더라도, 수천만 명의 인명을 살상한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야만에 필적할 수는 없다. 심지어 짐승들의 야만을 눈 씻고 찾아봐도, 9999억 원의 재산에서 1조 원능 채우기 위해 세입자들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권리금을 떼어 먹는 따위의 행태 비슷한 야만을 일상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뿐이다.
물론 그러니까 현대 사회가 원시 사회보다 질적으로 저급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다만 원시 사회에 비해 근대 사회가 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할 합리적 근거는 없을 따름이다. 근대의 인간이 자연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힘이 비판적 합리성 덕택으로 증가했다면, 동시에 그 힘으로 저지를 수 있는 악의 규모 역시 비판적 합리성 덕택으로 증가한 것이다.
2-3. 문화적 취향과 보편적 격률
김치를 즐기느냐 치즈를 즐기느냐의 선호는 문화에 따라 달라지지 질적 차이는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식인 풍습은 어떠한가? 김치에 익숙해진 사람이 김치 대신 치즈를 먹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느낄 혐오감에 비하면 식인이란 그냥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만큼 이 두 사례 사이에서 혐오감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라기보다는 질적인 차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식인 풍습에 생소한 우리가 이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이 아무리 크더라도, 사람을 먹는 행위를 인간 이하로 간주하는 도덕률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논증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두 개의 생활 형식 사이에서 상통할 수 없도록 차이가 나는, 즉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대목과 관련해서, 한 편에게 고유한 가치척도를 가지고 다른 편에게 고유한 풍속을 평가하는 순간 논제의 회피(ignoratio elenchi)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972년 안데스 산맥에서 조난당한 우루과이 축구팀의 사례처럼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순전히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의 시신을 훼손하는 행위는 우리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평가가 결코 일률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차라리 아사를 택하는 사람은 참으로 강한 의지력의 표본이며, 오직 인간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으로 기릴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 그런 가치가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런 상황에서 참혹하나마 생존을 택하는 행위가 비인간적인 것으로 전락할 수는 없다.
이처럼 "사람을 먹지 않는다"는 표준은 실상 우리의 생활 형식에서도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탄이 작렬하는 전장의 한 가운데, 지진이나 해일 등의 재앙이 닥쳤을 때, 극도의 기아가 엄습했을 때, 기타 등 극한 상황에서는 평시의 도덕률이 그대로 통용될 수 없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도덕이 일반적으로 무력하다는 주장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라는 것이 행위의 맥락과 전적으로 유리될 수는 없음을 보여줄 뿐이다.
3. 개별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면 임시방편적 결단주의에 빠지게 되는가?
서규환이 당황스럽게 느끼게 된 원인을 상당히 제공한 점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한다. 내 의도는 그가 실제로 현실의 문제에 대해 참여가 불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가언 명제로서, 정치학자나 철학자가 현실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면 보편적 이치를 궁구하기보다는 구체적인 특정 주제에 관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피력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나는 그 답변에서 4대강 사업이나 정리 해고 등만을 열거함으로써, 마치 그처럼 시사적인 정책 현안만을 다뤄야 한다는 듯한 인상을 주고 말았는데, 이 역시 성급한 표현으로서 오해를 낳게 된 것은 내 잘못이다. 하지만 여전히 보편적인 이치를 탐구하기보다는 구체적인 특정 주제에 관해 각자 옳다고 믿는 바를 표명하는 것이 학문이 현실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단, 이때 특정 주제라는 것이 시사적인 정책 현안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예컨대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파고 들어가는 개념적인 탐구라든지, 일정한 생활 형식이 시간에 따라 변천하는 모습을 추적하는 역사적 탐구, 또는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이념이 그 본래적 의미에 충실하게 작동하려면 주위에 어떤 문화적 정신적 배경이 갖춰져야 할지를 다루는 체제 연구 등, 말하자면 이론적인 연구라 할 수 있는 것들도 당연히 "현실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주제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점들을 언급하지 않고 경솔하게 정책 현안들만을 열거함으로써 오해를 부른 것은 내 잘못이 맞다.
그러나 여전히 서규환과 나 사이, 또는 서규환과 윈치 사이에는 상당히 심각한 견해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생활 형식의 창안"을 위한 "이론적 헌정"에 윈치가 소홀하다는 서규환의 비판을 나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해석만 했는데, 중요한 일은 바꾸는 것이다"와 같은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8월 19일의 내 답변은 바로 그와 같은 발상이 왜 잘못인지를 밝히려는 시도였다. 그랬는데, 경솔한 표현으로 말미암아, 서규환으로 하여금 오히려 내가 그에게 마르크스식 비판을 가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고야 말았다. 따라서 그때보다 훨씬 신중한 방식으로 내가 생각하는 바를 다시 개진해본다.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마르크스의 11번 명제는 해석과 변경을 대비하는 바탕 위에 서 있다. 이 대비에서 해석이란 현장에서 한발 물러난 제3자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행하는 일이고, 변경이란 현장에 뛰어 들어가 사태의 타개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구경꾼의 시각이 실존적 주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중요한 진리에 관심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이 대비 자체는 건강한 의의를 가진다. 극한 상황의 인간 행동에 대해 평시의 도덕률이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내가 위에 적은 말 역시, 실존적 선택의 상황과 제3자적 도덕 담론이 접촉점을 상실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실존과 담론 사이, 다시 말해 삶과 앎 사이, 다시 말해 정치와 철학 사이에서 발생하기 쉬운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세심한 지성의 소유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과 막스 베버조차도, 계몽주의라는 사조의 우산 아래서 인간 세계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의 이론에 버금가는 사회과학, 정치경제과학, 정신과학의 이론이 정립되어야 하고, 그 이론에 따라서 세계를 변경하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다. 윈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실존의 차원과 관찰의 차원이 혼동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자연과학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연구 대상의 내면성으로부터 초연한 제3자적 시각 위주로 구성된다. 반면에 인간 사회를 이해하려면 외부적 범주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이 차이는 이미 <사회과학의 빈곤>에서 집요하게 발굴해 들어가는 주제고, 나도 이미 여러 번 반복한 사항이다.
현실의 변경과 관련해서, 서규환은 여전히 개별성 사이를 관통하는 어떤 지도의 원리가 필요하다고 보는 데 비해, 나는 개별성에 주목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보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으로 보인다. 서규환은 이렇게 나를 반박한다. "박동천은 여기에서 사안별 임시방편적 진단과 대안 제시 같은 것(을) 주장하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면서 "윈치가 "보편적 이치"를 부정하면서도 상대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신이 믿는 이치'는 어떠한 종류의 것"이냐고 되묻는다.
지식과 현실 사이의 접촉점이 마치 시사적 현안을 따라다닐 때만 있는 것처럼 내가 8월 19일에 말한 것은 경솔한 탓이었음을 위에서 밝혔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카데미를 버리고 시사평론으로 나오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치라는 것이 만약 있다면 그것은 어떤 공식 안에 요약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별적 진술들 안에, 좀 더 정확하게 꼬집어 말하자면, 개별적 진술들이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개인들의 분별력을 통해 표상되는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점이 내가 말하려는 바였다.
다시 말해, 나는 (그리고 내가 이해하는 한 윈치 역시) 보편적 이치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이치 자체의 형상을 언표를 통해 정립하려는 시도가 지적 소외의 결과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치란 일차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논쟁 상황에서 맞는 말과 틀린 말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것도 박동천이 믿는 이치, 서규환이 믿는 이치, 조용기가 믿는 이치, 홍준표가 믿는 이치 등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누가 어떤 말을 이치에 맞다고 보느냐고 하는 질문에서 "누가"와 "어떤"이 빠진 상태에서 이치를 논하게 되면, 전형적으로 이치의 내면에 침투하지 못하는 외부적 담론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누가 어떤 말을 이치에 맞다고 보느냐"는 차원의 접근(p)에서 서규환은 결단주의(q)를 의심한다. 그리고 서규환이 의심하는 결단주의는 물론 상대주의(r)와 연결될 것이다. 그런데 p에서 q를 거쳐 r로 연결되는 (내가 보기에는 혼란한) 방향으로 사유하는 사람도 아마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p를 말하면서 q나 r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인 진실이고, 윈치가 그 중 하나라는 것은 경험적인 진실이다.
이치라는 단어를 수사적인 의미로만 사용하는 경우가 아닌 한, "이치"를 말한다는 것은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는 함축을 가진다. 가령, 25×25=425라고 푼 초등학생에게 선생이 계산을 잘못했다고 가르칠 때, 선생은 전형적으로 이치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지 결단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사적인 현안에 관한 논쟁에서도, 자기가 지지하는 편의 입장이 이치에 맞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은 패거리 논리와 상관없이 옳은 편을 지지한다는 기본자세를 동시에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이치"가 과연 명실상부한 이치인지는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주장한다는 사실만으로 확정되지 않는다. 그러한 확정을 위해서는, 그가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정책적 대안이 실제로 이치에 맞는 것인지, 그리고 그의 사유가 실제로 감정이나 연고 등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이치에 의해서만 인도되는 것인지 양 방향에서 공히 추가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물론 정치적 갈등들이 모두 이치에 의해 해소되리라는 기대는 부질없다. 하지만 어떤 갈등도 이치에 의해서는 해소할 수 없다는 발상은 사실과 전혀 동떨어진 불신과 절망의 표현일 뿐이다. 정치적 갈등 가운데 어떤 것은 분명히 양 진영이 공유하는 이치에 의해 해소할 수 있다. 또 어떤 것은 갈등의 쌍방이 자기편의 입장에 일리가 있는 만큼 상대편의 입장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타협이나 절충에 따라 해소될 수도 있다.
이치에 의해서도, 절충에 의해서도, 해소되지 못하는 문제라도, 다시 다수결이나 제비뽑기 같은 사전 합의된 절차가 있다면 갈등이 계속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런 내용들을 나는 박동천의 결단이라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규환과 내가 공유할 수 있는 이치라고 생각하며 말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이 지점에서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야말로 상대주의의 정반대라고 나는 믿는다. 이 지점에서 내가 어디서 틀렸는지를 지적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그건 박동천의 개인 생각일 뿐"이라고 하면서 논의를 회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전형적인 상대주의에 의지해서 논리적인 곤경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이 절에서 지금까지 다룬 내용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언급할 사항은 "윈치의 삶이 모범적 사례라고 판단하는 한에서 그것은 타자에게 규범이기를 요청하고 있는 셈"이라는 서규환의 인식이다. 처음에 나는 "타자에게 규범이기를 요청"한다는 것을 그대로 따르기를 요청한다는 뜻으로 읽었다. 하지만 그가 그 글의 끝에서 "박동천은 규범을 규제, 제약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규범을 헌정하는 나의 이론은 이와 다르다. 규범은 인간 행위에 관한 일종의 규칙으로서 인간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제약적 조건"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서규환이 규범을 무엇으로 이해하는지 전혀 종잡을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방금 인용한 서규환의 문장이 무슨 뜻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마지막에 나오는 "제약적 조건"이 처음에 나오는 "규제, 제약"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나의 입장에서는 두 가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박동천은 규범을 규제, 제약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규칙에 따른 행동"이라는 문구에서 규칙은 규제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네 인간이 우리들의 행동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인식론적 기반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반면에 나는 "생활 형식을 창안하기 위한 이론적 헌정"이라는 서규환의 발상 안에 규제와 제약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석하며, 오히려 어떤 이론적인 규범을 정하든지 세상이 그 규범대로 되지는 않을 거라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이론적 헌정"이라는 문구의 내용이 무엇인지, 거기에 왜 규제와 제약이 함축되지 않는지를 설명해 준다면 내 이해력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음, 내가 윈치나 베유의 삶을 말한 것은 각각 관조와 참여의 전형에 해당하지만 윈치가 관조 편에서 참여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논지를 예증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예시로부터 "타자에게 규범이기를 요청"한다고 읽는 것은 비약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베토벤의 음악을 소개하는(p) 사람 중에 상대에게 베토벤의 삶을 따르라고 요청하는(q) 취지에서 그리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p에서 q를 곧바로 읽어내면 명백한 과잉 독해다.
4. 외생적 개념의 서술적 유용성에 관해
문화라는 단어가 조선 시대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조선 시대에 문화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서규환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이 지적은 도둑질이 없는 곳이란 도둑질이라는 개념 자체가 (따라서 소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곳이라는 내 주장에 대한 비판이 되지 못한다.
4-1. 두 변수의 조합은 항상 네 가지 가능성을 낳는다.
A라는 사회와 B라는 사회가 있다고 하자. B에서 사용되는 어휘 중에 A에는 없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의 지시대상이 A에 있는가? 두 변수가 교차할 때에는 항상 네 가지 가능성이 나온다. 이 경우에는 다음과 같다.
조선 시대에 왕이라는 단어가 있었고 왕이라는 직위와 제도와 인물이 있었다(갑). 조선 시대에 기린이나, 용이나, 봉황 같은 단어가 있었지만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임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을). 조선시대에 문화라는 단어가 없었지만 문화는 있었다(병). 조선 시대에 컴퓨터라는 단어도 없었고 컴퓨터도 없었다(정).
만약 내가 (갑)과 (정)의 집합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면 (을)과 (병)에 해당하는 사례를 하나씩 거론하는 것으로 나에 대한 충분한 반박이 된다. 하지만 나는 단지 (정)에 해당하는 사례 하나로 도둑질을 거론한 것이기 때문에 서규환의 비판은 허수아비 비판에 해당한다.
서규환이 나를 그렇게 오해한 까닭은, 내가 보기에, "언어학적 전회"라는 통속적 문구에 나를 끼워 맞춘 탓, 논리학 용어로 피전홀링(pigeonholing)의 오류 탓인 것 같다.
4-2. 외생적 개념을 서술어로 사용하려면 해당사회의 내면에 침투할 수 있어야 한다.
논리적 오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서규환의 문제 제기 자체는 논의할 가치가 많다.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없는 사회의 예로 이누이트 부족의 관습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바다사자와 같은 해양 동물을 포획했을 때, 잡은 사람들이 먹을 만큼 먹고 나머지는 마을의 공동 식량 저장소인 얼음 밑 냉동고에 보관한다. 그리고 나중에 필요한 사람은 공동 저장소에 가서 자기가 먹을 만큼을 꺼내 먹는다.
"내가 잡은 먹이는 내 것"이라는 개념에 익숙한 우리 사회의 일원이 이를 보고 도둑질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기가 잡지 않은 고기를 꺼내 먹은 것이니, 그 사회의 동료들이 도둑질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도둑질은 도둑질이다." 그러나 나라면 이 사람이 단어의 적용 대상을 잘못 찾았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잡은 먹이는 내 것"이라는 배타적 소유의 관념 및 그것과 연관되는 "도둑질"이라는 관념 자체가 없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행태를 서술하고자 하면서 그들의 의식과 행태를 구성하는 내면성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외생적 개념을 일방적으로 부과했기 때문이다.
이와 다른 사례로, 조선 시대에 대의제가 기능했는지를 묻는다면 대답이 단순하지 않다. 조선 시대에 대의제라는 개념은 없었다. 하지만 민심이 천심이라든지 조야에서 중지를 구한다는 등의 관념은 있었다. 이런 관념들은 서구에서 발전된 대의제라는 개념과 아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제도적인 장치들을 봐도 근대 유럽과는 비견될 수 없지만 고대 및 중세 유럽에서 나타났던 대의의 원시적인 형태와는 비슷한 면면을 주장하려면 할 수도 있을 정도다. 조선 시대에도 대의제가 기능했다는 주장을 누가 실제로 펼친다면 물론 현재 학계에서 일률적인 동의를 얻기는 어렵고, 기껏해야 일리 있다는 정도의 대접을 받기가 쉬울 것이다.
어쨌든 이와 같이 외생적 개념을 가지고 그 개념이 없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행태를 서술하고자 할 때에는, 단순히 외생적 개념을 갖다 붙이려면 갖다 붙일 수 있다는 수준을 넘어, 해당 사회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고려한 다음에 가타부타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없는 사회에 대해 도둑질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이 때문에 불가능하다. 반면에 대의제라는 개념을 조선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비슷한 개념들이 실제로 조선사회에 있었기 때문에 논의가 가능하다. 근대 과학의 합리성을 아잔데 사회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 태도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깝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