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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박경철 꿈꾸는 20대 찌질이들, 꿈 깨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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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박경철 꿈꾸는 20대 찌질이들, 꿈 깨시지!

[우석훈이 '꿈꾸는 세상'을 묻는다] <문화로 먹고 살기>

반가웠다. 과장이 허락된다면, 너무나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지난 2003년 이래, 10년 가까이 내가 출판 분야에 입문하려는 젊은이들과 뒹굴며 집중적으로 고민해왔던 내용을 한마디로 간추리자면, 결국 저자 우석훈이 이 책 제목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바로 그 맥락에서 '출판으로 먹고 살기'였다.

더구나 저자의 관심이 '(문화) 산업'이나 '(문화) 기업'의 성장이 아닌, "사람들이 세 끼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사나 그 정도 돈은 버는 걸까"라니, 바로 그 관점에서 '출판 산업'의 구조를 설명해 내려던 게 꽤나 외롭게(여기엔 좀 부언이 필요하다. 한국의 출판 산업 구조에 거시적인 관심을 가지고 깊이 있는 고민을 하는 이도 무척 드물지만, 그 대다수는 '사람들이 세 끼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사는지' 따위와는 거리가 한참 먼, 굳이 말하자면 '투자 가치'에만 집중되어 있다.) 진행된 내 고민의 정체인데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다른 분야는 내가 속사정을 모르니 겸손하게 그 분야를 잘 알고 계시는 전문가의 판단을 구하기로 하고 적어도 내가 제법 소상히 알고 있다고 여기는 출판 분야로만 시야를 좁혀 보면, 그래서 도대체 출판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출판으로 먹고 살기 어려운 현실을 고발하는 건지, 아니면 먹고 살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건지, 심지어 그나마 먹고 살 방법이 많으니 일단 도전해 보라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 <문화로 먹고 살기>(우석훈 지음, 반비 펴냄). ⓒ반비
어지간만 해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일독을 강권할 요량으로 살펴보았는데, 혹 어느 정도 현장 경험이 있는 후배에게 비판적 토론의 화두를 던지는 취지에서라면 모를까, '책에 대한 근거 없는 로망'에만 들떠있기 일쑤인 대다수의 입문자에게 참고로라도 권하기가 주저스러울 정도였다.

가령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문화 소비자가 아니라 문화 생산자나 기획자로 살고 싶어 한다"는 지적은 지극히 정당하다. 하지만 그들이 그 길을 걷지 못하는 게 단지 그 길이 좁아서, 그 욕구를 실현할 장치가 없어서이기만 할까. 물론 재능 있는 젊은이에게 먹고살 만한 일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하는 열악한 구조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간절한 것과 '(그 욕망을 실제로 구현할 만한) 재능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출판 분야에선 하늘과 땅 사이만큼의 간극이 있다. 게다가 단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세 끼 밥을 보장하는 건, (차라리 직업이 있건 없건 모든 사회 구성원의 최저 생활이 보장되는 '보편 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모를까) 문화 산업의 공공적 기반이 지금보다 훨씬 튼튼해진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출판 산업에서, 우석훈의 표현대로 "더도 말고 지금보다 딱 두 배만 더 고용할 수 있다면" 또는 그럴 수 있다 해도, 어쩌면 그것은 크나큰 문화적 '재앙'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 실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출판 분야에선 해마다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매년 300여 명의 젊은이들이 이런저런 교육 과정을 통해 입문의 길을 두드리며 그들 대다수가 '좁은 문'에 가로막혀 좌절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정작 현장에선 현장대로 '사람이 없다'는 아우성이 끊이지 않으며 '저런 사람이 책을 만드는 것 자체가 펄프 1그램도 기름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에선 범죄'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엉터리'들이 그럴듯한 '커리어'를 빙자해 안 그래도 적은 일자리를 과점하고 있기도 하다.

우석훈은 "만약 나쁜 게 있다 하더라도, 더 재미있고 유쾌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 우점종이 되도록 하면" 된다며 "재미는 재미로 극복해야지 힘으로 누르려 해선 안 된다"는 백번 지당하신 말씀으로 이 문제를 슬며시 우회하려 하지만, 그도 지적했듯 "모든 사람이" 단지 '하고 싶다'는 이유로 문화 산업에 종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차피 이 문제는 '유한한 자원'을 분배하는 문제일 뿐이다.

과연 '다른 사람을 재미있게 해 줄 재능도 없고 기실 다른 사람이 재미있을지에는 별반 관심도 없는 채로 그저 저 혼자만 재미있으면 그만인 데다 심지어 자기가 재미있게 놀자고 다른 사람의 재미를 훼방 놓기까지 하는' 사람의 세 끼 밥까지 걱정해야 하는가. (물론 앞서 말했듯 '보편 복지' 차원에서라면 그런 사람에게도 마땅히 세 끼 밥이 보장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지금 문화 산업의 '일자리'에 관해 말하고 있는 중이다.)

이 점은, 우석훈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는 듯하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소중한 지적으로 밑줄을 그은 대목이 그것이다.

"고독한 천재형보다는 협업에 익숙한 사람들이 자기 재능을 발휘하기에 더 유리한 경우가 많다."

적어도 출판에서는 '재능을 발휘하기에 더 유리한' 정도가 아니라, 마치 운동선수에게 종목을 막론하고 기초 체력이 필요하듯이, 그 자체가 가장 기초가 되는 필수불가결한 '재능'이다. 요컨대 출판으로 국한해서 말하자면, '협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아무리 '책에 대한 애정'과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간절히 호소한다 해도,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없는 상황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책 없이 고용만 늘린다고 한들, 민폐만 늘어날 뿐이다. 죽어나는 건 그저 그 '고독한 천재'(?)들과 어떻게든 함께 놀아보려는 '직업적 성취욕'을 포기할 수 없는 '협업에 익숙한 사람들'뿐이다.

어쩌면 다른 분야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출판만 이런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가령 나는 영상과 출판을 비교해서 이런 현상을 설명한 적이 있다.

"영상물 제작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대개 관객이라는 차원에서 보아도 상당히 '고급' 관객에 속한다는 것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데 반해서, 출판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독자라는 차원에서조차 '고급' 독자에 속한다고 보기에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이들이 대다수라는 점이다. 물론 감히 관객이나 독자의 '수준'을 평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령 액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영화감독 지망생이라면, 대개 국내는 물론이려니와 해외의 유명 액션 영화들은 거의 섭렵하고 때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에까지도 제 나름의 취향에 따라 눈길을 두었을 탄탄한 수용 체험 속에서 그 꿈을 키워왔을 것이다. 전문적인 평론가만큼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액션 영화감독들의 스타일을 비교해가면서 호불호를 논평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출판에 대한 열정과 포부를 힘주어 피력하면서도 독서 체험이 형편없이 빈약해서, 이른바 스테디셀러로서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한 책들인데도 읽어보기는커녕 제목조차 낯설어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고전을 저술한 대가들은 고사하고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대표적인 저자들에 대해서도 캄캄절벽이라 가벼운 논평조차도 언감생심이더라는 것이다." ("'독서 진흥'과 '출판인 양성' 모두 성공하려면", <한겨레> 2010년 12월 11일자)

▲ <문화로 먹고 살기> 저자 우석훈 ⓒ프레시안(최형락)
우석훈에게 묻고 싶다. 꽤나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출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대다수(내 경험상 대략 8할 이상)가 이러한데, 출판이라는 유람선에 정원을 늘려서라도 이들까지 다 태워야 하는가. (오해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부언하자면, 나는 어떻게든 더 많이 태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단, 단지 '하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그 열정을 철저한 준비와 자기 점검에 쏟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어차피 시장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공공의 지원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모든 사회 구성원이 세 끼 밥을 보장받지도 못하는 현실에서 '출판 문화의 다양성 확보나 질적 성장'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까지 세 끼 밥이 보장되는 특권을 누려야 할 까닭이 있는가.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자. 이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소망을 외면하지 말자"고 입 발린 소리만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그것이 과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소망이기는 한 것인가. 자연스럽기는커녕 무언가 오도된 '이미지'에 들려 있을 뿐인 것은 아닌가. 좀 더 오버하자면, 우석훈이 적지 않은 공을 들여 내놓았을 이 책조차도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러한 '오도'에 한몫 단단히 거들고 있지는 않은가.

좀 심한 말 같지만, 출판에 대한 우석훈의 서술이 '이상'과 '현실' 사이를 곡예하듯 넘나들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가령 "책의 특징은, 다른 문화와 경쟁 관계라기보다는 보완 관계에 있다는 점"이라는 지적은 순전히 이론적으로 옳다. 그러나 현실은 그보다 더 참혹하다. 본질적인 의미의 '독자'는 실제 시장을 형성하는 '소비자'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나는 심지어 지금도 죽겠다고 아우성인 동업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출판 산업의 시장 규모가 지금의 10분의 1로 줄어든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다닌다.) 그리고 본질적인 의미의 '독서'와 무관한 '소비'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컨대 올해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주원이의 서재'가 과연 '하지원의 팔찌'와 무엇이 다른지 대답해야만 한다. 이미 책은 상당 부분 다른 문화와 '승산이 전혀 없는' 경쟁 관계에 돌입한 지 오래다. 지난 10년간 출판계를 주도했던 주류 담론이 바로 그러했다. '매체 환경이 달라졌으니,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의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너무 무겁지도 밋밋하지도 않은 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이 아무리 가벼운들 아무리 화려한들 인터넷을 따라갈 수 있을까. 기실 백전백패의 전략에 불과한데도 그 무모한 경쟁으로 '거품'에 불과한 시장 규모를 간신히 버티느라, 본질적인 의미의 '독자'를 늘려나가려는 노력은 뒷전이었다. '독자'에게라면 여전히 책은 보완재일 수 있지만, '소비자'에게는 '대체재'일 뿐이다. 고종석의 말투를 빌자면, "그것을 직시하는 것은 슬픈, 더 나아가서는 오싹한 일이지만, 그것을 우회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게다가 소설 시장이 "살아남았다"는 평가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 살아남은 것은 소설 시장이 아니라 몇몇 소설가이다. "경쟁도 부침도 심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독자와 교감에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지적은 당연히 옳지만, 이것은 우석훈이 책머리에서 제기한 '소설 써서 세 끼 밥은 챙겨 먹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는 상당히 생뚱맞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성공 비결'이 아니라 극심한 '경쟁과 부침'의 실상이다. 그렇다고 몇몇 성공적인 소설가들을 제외한 수많은 소설가들이 소설만 쓰고도 세 끼 밥을 챙겨 먹을 수 있는 방안을 뚜렷하게 제시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의 서술은 사회과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장하준 효과를 다른 저자들도 누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힌다.

그게 중요한 문제인가? 아무래도 내가 책을 잘못 읽었나 싶어 다시 머리말과 프롤로그를 되짚어 읽어야 했다. 저자가 "영광"이라고 말하는 사회과학의 전성기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가령 저자가 예를 든 이진경 같은) "장하준 급 필자"들이 만든 게 아니다. 그들로 대표되기는 하지만, 실은 원고료 떼먹히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꾸준히 저작 활동을 지속한 수많은 연구자/저술가들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활동을 어떻게 공공적으로 지원하고 어떻게 사회적으로 지지할까가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 아닌가?

고작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도 있으니, 잘만 하면 먹고 살 수도 있다"가 이 책의 핵심 메시지라면 허망한 일이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분야도 있나? 혹은 "그렇게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두 배만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라 해도, 모호하긴 매한가지다. 열 명의 '성공한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 100명이 불안정 노동을 감내하는 현실에서, 단지 열 명이 스무 명으로 늘어난다는 건 100명이 아흔 명으로 줄어든다는 게 아니라 200명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난 처음에 (열 명이 한두 명으로 줄어도 좋으니) 나머지 100명의 삶이 좀 더 안정되었으면 좋겠고, 그걸 위해 그들이 나눌 수 있는 자원이 두 배쯤 늘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읽었다. 아마 우석훈의 의도도 그랬을 거라 감히 짐작한다. (정말로 '열 명이 스무 명으로 늘었으면 좋겠다'는 게 저자의 의도였다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서술은 그 의도와는 영 거리가 먼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말았다. 게다가 서술의 일관성이 확보되었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음직한 그런 막연한 '희망 사항'을 피력하기 위해 이 두꺼운 책이 필요했을지에는 여전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다른 분야야 내가 잘 모르니 그저 출판에 관해서만 말하더라도, '출판으로 먹고 살기'의 핵심은, 적어도 지금보다 딱 두 배만이라도 고용이 늘 수 있으려면, 그것을 위한 매우 구체적이고도 정교한 정책적 대안이다. 그중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요구해야 할 내용도 있을 것이고, 시민 사회에 제안해야 할 내용은 그보다 훨씬 풍부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안들이 하나하나 조금씩이라도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또 때로 그 실천에 참여하면서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자고 말했더라면, 또는 젊은이들의 그런 희망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해결해야 할 일들을 좀 더 분명한 어조로 주장했더라면, 아니면 차라리 '문화로 먹고 사는' 게 지금의 현실에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그쯤은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겠다고 일러주는 내용이기라도 했더라면, 훨씬 알찬 책이 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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