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때마다 일상이 된 외부 인사 영입도 거론된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정운찬 전 총리 등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영입 대상 인사로 꼽힌다. 지금 분위기대로라면 앞으로 2개월간 대한민국은 서울 시장 보선을 놓고 예비 대선을 치를 태세다.
이런 상황에서 눈에 띈는 책이 있다. 1995년 <김대중 죽이기>(개마고원 펴냄)를 펴낸 이래, 국면마다 한국 사회를 도발하는 의제를 제기해온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가 최근에 펴낸 <강남 좌파>(인물과사상사 펴냄). 이 책에서 강 교수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와 각 진영의 열성 지지자들은 대선의 향방에 따라 이 나라가 흥하거나 망할 것처럼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혈투를 벌일 임전태세(臨戰態勢)를 다지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 되건 '정치의 이권화' '엘리트의 지대(地代) 추구' '승자 독식주의'를 없애거나 완화하지 않는 한 대선은 '밥그릇 싸움 도박판' 이상의 의미가 없다." (12쪽)
ⓒ연합뉴스 |
<강남 좌파>는 2012년 총선, 대선의 중요한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한국 사회가 어떤 지도자를 선택할지를 놓고 심사숙고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를 제시한다. 이 책은 동시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기득권을 가진 엘리트만 경쟁하는 장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논의의 단초를 제공한다.
원조 '강남 우파' 오세훈 시장은 과연 몰락하는가? 그가 몰락한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대중이 '강남 좌파' 조국, 안철수 등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대중이 원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결정적인 순간에 '강남 ○파'의 발목을 잡는 그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강남 ○파' 없는 한국 정치는 가능한가?
이렇게 '프레시안 books'는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팅 민' 대표와 함께 <강남 좌파>를 읽고서 책 안팎을 넘나들며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했다. '프레시안 books'는 앞으로도 '정치의 계절'을 앞두고 쏟아지는 책들을 놓고 한국 정치와 한국 사회를 읽는 대화를 계속 지상 중계할 예정이다.
8·24 주민 투표, 노선이 아니라 IQ가 문제!
프레시안 : 24일 무상 급식 지원 범위를 놓고 진행한 주민 투표 최종 투표율이 25.7퍼센트로 나왔습니다. 유효 투표율 33.3퍼센트를 채우지 못해서 투표함을 열지도 못했는데요. 결국 주민 투표에 시장을 걸었던 오세훈 시장은 26일 자진 사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세훈 시장은 '강남 좌파'에 빗댄 '강남 우파'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이런 몰락의 의미를 한 번쯤 짚을 필요가 있어요. 우선 오세훈 시장 얘기를 하기 전에 이번 주민 투표의 의미부터 한 번 짚어보죠. 당장 오는 10월 26일 있을 서울 시장 보선에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만.
박성민 : 좀 있다 얘기하겠지만, 저는 아직 '오세훈의 몰락'을 얘기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해요. 그 얘기는 다시 하기로 하고요.
이번 주민 투표는 일단 긍정적, 부정적 의미가 다 있어요. 긍정적인 부분부터 살펴봅시다. 무상 급식이라는 구체적인 복지 정책을 놓고 논쟁이 있었고, 그 최종 결정을 주민에게 직접 물었잖아요. 야당이 주민 투표 '반대'를 들고 나온 건 좀 옹색하긴 했지만, '불참'이 곧 '반대'와 등가가 되는 효과가 있었으니 주민 투표의 의의는 충분했습니다.
다만 부정적인 부분도 없지는 않아요. 우선 이것이 주민 투표를 할 만한 사안이었는지, 더 나아가 오세훈 시장이 시장을 걸고, 여당이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핏대를 세울 만한 것이었는지 한 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지나친 이념 대립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요. 충분히 생산적인 절충안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진영 논리에 휩쓸린 측면이 있어요.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거 같습니다.
사실 서울시 교육청 안도 2012년 중학교 1학년, 2013년 2학년, 2014년 3학년 등 사실상 단계적인 안이거든요. 곽노현 교육감이 당선되고 나서 현실을 감안해 일정을 다소 늦춘 거죠. 오세훈 시장도 선거 때는 하위 30퍼센트까지만 하자고 했다가 선거에 나타난 민심과 의회현실을 감안해 50퍼센트로 올린 겁니다.
그렇다면 오세훈 시장과 여당이 "망국적" 운운하면서 날을 세울 필요가 전혀 없었던 사안이에요. 오히려 재정 상황을 지적하면서 2016년 정도까지 단계적으로 완성하는 전면 무상 급식을 역으로 제안했더라면 훨씬 더 시민의 공감을 살 수 있었을 거예요.
사실 오세훈 시장 안이 채택되었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겼을 거예요. 상위 소득과 하위 소득 50퍼센트를 공정하게 나눌 방법이 현실적으로 있나요? 결국 월급쟁이는 내고 돈을 더 버는 자영업자는 안내는 일이 벌어졌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도 정치적으로 타협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좋았을 겁니다.
프레시안 : 노무현 정부 때 노인 복지를 놓고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대립했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런 대립이 우스워 보입니다.
박성민 : 맞아요. 2006년이던가요? 한나라당이 60세 이상의 노인 모두에게 2028년이 되면 월 30만 원을 지급하는 내용의 안을 내놓았잖아요. 이게 지금 무상 급식과 뭐가 다릅니까? 반면에 당시 노무현 정부, 열린우리당은 65세 이상 노인 중 중·하위 45퍼센트에게만 매월 일정액을 지급하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결국 65세 이상, 하위 70퍼센트로 타협이 되었는데요. 이번 사안도 그 정도로 접근했으면 타협이 가능했던 거죠. 정치력만 있었으면….
프레시안 :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가 한나라당 안을 결사반대했어요. 많은 보건복지 전문가는 유 대표 때문에 결국 기초 노령 연금이 '용돈 연금'이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박성민 : 네, 그게 불과 몇 년 전 일이거든요. 그 때의 주역들이 지금도 한나라당, 민주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데, 이렇게 대립하는 걸 보면 이건 노선의 문제가 아니라 지능 지수(IQ)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웃음)
오세훈의 몰락, 아직은 아니다
프레시안 : 본격적으로 책 얘기로 넘어가기 전에 주민 투표 얘기를 더 해보죠. 아까 아직은 '오세훈의 몰락'을 얘기하기는 이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박성민 : 그렇습니다. 일단 투표율 '25.7퍼센트'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이 숫자가 참 애매합니다. 한편으로는 조·중·동, 거기다 <매일경제>, <문화일보>와 일부 방송 등 보수 언론의 여론 주도 능력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입니다. 한국 사회의 역학 관계가 '보수>진보'에서 '보수≒진보'가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진보 진영이 희희낙락할 정도의 숫자는 아닙니다. 막판에 어차피 유효 투표율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투표를 포기한 이들까지 염두에 두면, 이번 투표율은 여전히 보수 언론이 한 30퍼센트 정도는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명확히 보여줍니다. 만약에 투표 의제가 달라진다면, 보수가 방어하는 게 아니라 공격하는 위치가 된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자면, 10월 26일 서울시장 보선에서 야당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를 이길 수 있을까요? 저는 누구를 내세운다 한들 결과를 낙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아직 '오세훈의 몰락'을 얘기하기 어려운 겁니다. 사실 주민 투표를 보면서, 카를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했던 말("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의 큰 사건과 인물은 두 번 등장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헤겔은 첫 번째 인물은 비극으로, 두 번째 인물은 희극으로 등장한다고 덧붙이는 걸 잊었다")이 생각났어요.
2004년에 오세훈 시장이 한나라당 개혁을 위해서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 '비장'하게 보였다면, 눈물을 보이고 무릎을 꿇고 시장 자리를 던진 이번의 대선 불출마 선언은 마치 '개그'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투표율을 보면서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이번 일을 계기로 오세훈 시장이 '보수의 아이콘'으로 등장할 여지도 충분히 있다는 겁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오 시장이 자신이 '보수의 아이콘'이 되는 걸 과연 원할까, 이런 의문도 들고요. 아마 오 시장도 지금 생각이 많을 거예요.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는가?' 본인의 의도인지, 떠밀려 왔는지…. 오 시장의 행보를 보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입니다.
오세훈이 '강남성'을 잃었더니…
프레시안 : 주민 투표 얘기를 하느라 서론이 길었네요. (웃음) 하지만 앞에서 주민 투표와 오세훈 시장 얘기를 한 것은, 이번 일이 <강남 좌파>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방금 오세훈 시장이 '보수의 아이콘'으로 떠오를 수도 있다고 언급했는데, 주민 투표를 계기로 오세훈 시장은 '강남 우파'에서 '강북 우파'로 변했습니다.
▲ <강남 좌파>(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물과사상사 |
프레시안 : 네, 오세훈 시장은 이번 주민 투표를 계기로 그런 강남성을 잃어버렸어요. 강북 우파가 한국을 지배해온 전통적인 보수들 (상대편에서는 흔히 '수구 꼴통'이라고 부르죠) 즉 '안보 보수' '시장 보수'라면 오세훈 시장으로 상징되는 강남 우파는 그런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합리적인 보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왔는데, 본인이 그런 이미지를 버린 겁니다.
오세훈 시장이 (실제로 시정을 어떻게 해왔는지와는 무관하게) 세련된 외모와 화려한 달변으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또 가진 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강조할 때,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여성, 젊은 시민들이 열광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민 투표를 계기로 그걸 잃어버린 것이지요.
박성민 : 그래서 <강남 좌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열쇳말은 '좌파'가 아니라 '강남'입니다. 바로 강남성이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왜 대중을 유혹하느냐, 그걸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건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요. 우선 '공급' 측면에서 살펴볼까요? 강남 좌파나 강남 우파나 공통적으로 전통적인 좌파, 우파 정치인의 대체재로 등장했어요.
강남 좌파를 상징하는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나 강남 우파를 상징하는 오세훈 시장이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단 화려한 스펙(specification)을 자랑합니다. 당연히 그에 부합하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요. 잘 생긴 외모와 세련된 화법도 필수고요. 거기다 '강북 우파'의 졸부 이미지와는 다르게 문화적 취향도 남달라 보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강남 좌파는 심지어 '진보적'이기까지 해요. 즉, 사회의 약자와 연대한다는 마음가짐 더 나아가 실천을 하기도 합니다. 강남 우파도 '대립이 능사인가', '돈이 최고인가' 이렇게 기존의 '안보 보수', '경제 보수'가 고집했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소통 지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좌파만 놓고 얘기를 해보면, 강남 좌파의 이런 모습을 이른바 강북 좌파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김근태, 노회찬, 심상정 전 의원 같은 이들은 절대로 따라갈 수 없어요. 노회찬 전 의원이 자신의 책 표지에 첼로를 켜는 모습을 등장시키면서 이런 강남성을 획득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이미지의 원형이 다르니까요.
조국, 안철수, 박경철, 김제동 씨 같은 분이 강남 좌파의 대명사라면 강남 우파는 오세훈, 홍정욱, 조윤선 의원 같은 이들이겠지요. 전통적인 정치인들이 이들을 아무리 질시하더라도 흉내를 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에게 강남성은 고유한 정치적 자산인 거죠.
노원은 왜 노회찬 아닌 홍정욱을 택했나?
프레시안 : 또 대중은 이들에게 열광하고요. (웃음)
박성민 : 그게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대중은 이렇게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강남성을 가진 엘리트에게 열광하느냐, 이것부터 살펴봅시다. 우선 시대가 변했어요. 지금 이 시대 시민의 정체성은 '소비자'로 규정됩니다. 이들은 세상사를 다른 무엇보다도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으로 살핍니다. 전에는 '국민'이나 '시민'으로 규정했었거든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지금 강남 좌파로 언급되는 이들 중에는, 아까도 언급했듯이, 일반 시민이 상상할 초월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고, 고가의 강남 고급 주택에 살고, 자기 아이들은 외국어고등학교나 유학을 보냅니다. 만약 1980~1990년대라면 이것만으로도 이들이 좌파 행세를 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의 대중은 '능력 있어서 돈을 벌고, 세금도 제대로 내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 이런 식으로 '쿨'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진중권 씨가 취미로 고가의 경비행기를 운전한다고 할 때도 그것은 오히려 그의 매력을 높이는 요소가 된다는 겁니다.
프레시안 : 닮고 싶다, 이런 욕망이 있는 거죠. 기성세대의 경우에는 나는 몰라도 우리 애들은 '강남' 좌파, '강남' 우파로 키우고 싶다는 겁니다.
박성민 : 2008년 노원구(병)에서 노회찬과 홍정욱의 대결은 바로 그걸 명확히 보여준 사례죠. 당시 노원구에는 계층적 위치나, 역사적 경험이나, 이념적 성향이나 강북 좌파인 노회찬 전 의원에 가까운 시민들이 꽤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노회찬 대신 홍정욱을 선택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요.
그들의 마음이 딱 '강남성'에 대한 동경이었을 거예요. '나는 비록 늦었지만 우리 아이는 (좌파든 우파든 상관이 없으니) 홍정욱과 같은 강남성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 바로 이런 '강남(성)에 대한 동경'이야말로, 강남 좌파/강남 우파에 대한 열광의 실체입니다. 정치권이 자꾸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바로 이런 대중의 욕망을 알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 왜 문제인가?
프레시안 : 그런 논의에서 빠진 대목이 있어요. 그런 대중의 욕망을 염두에 두더라도, 왜 이런 강남 엘리트들이 현실 정치에서 급속히 등장할 수 있었는지,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강남 좌파>도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의 문제점을 따져본다고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이 부분은 파고들지 않아요.
박성민 : 동감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한국의 정당 정치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당이 '무릎팍 도사'만큼의 영향력도 없으니, 당연히 정당 외부에서 시쳇말로 '뜬' 스타들을 정치인으로 충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안철수, 박경철, 한비야 씨의 한마디가 기성 정치인의 말보다 영향력이 훨씬 크니까요.
그간 한국은 비교적 양질의 훈련된 정치 엘리트를 현실 정치권으로 충원하는 메커니즘이 있었어요. 1970~80년대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정치 엘리트를 충원하는 역할을 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체계적으로 리더십 교육을 받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이른바 학생 운동을 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비교적 일찌감치 정치에 눈을 떴던 이들은 육군사관학교 출신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훈련된 정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가 되면서 이런 정치 엘리트를 충원하는 메커니즘이 망가진 거예요. 그러다 보니, 교수·변호사·의사와 같은 금력 있는 이른바 전문직들이 대거 정치권으로 들어왔지요.
프레시안 : 연예인도 있고요. (웃음) 그렇게 정치인으로서 훈련이 전혀 안 된 이들이 정치권에 유입되는 현상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요?
박성민 : 그렇습니다. 언젠가 "인턴 헌법 기관"이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국회의원을 자주 안 바꿔요. 5선 의원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들은 10~20년 동안 특정 분야에 대한 노하우를 갖고 있어요.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이 이런 노하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국은 어떤가요? 정치 안 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모신' 이들도 포함해서 교수·변호사·의사 혹은 연예인을 하던 이들이 국정에 대해서 뭘 알겠어요. 그러니 20~30년 동안 자기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관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관료 손에 농락당하는 거지요. 감히 말하건대, 부처의 일개 과 하나도 상대 못할 거예요.
그렇게 인턴 국회의원을 하다 보면 4년이 훌쩍 갑니다. 거기서 또 물갈이 대상이 되어서 공천에 탈락하거나, 선거에서 패배하면 또 다른 인턴 국회의원한테 바통이 넘어가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대중이 열광한다고 강남성을 가진 엘리트를 정당이 선호하기 시작하면, 이런 문제는 더욱더 커지겠지요.
인턴들이 지배하는 나라
프레시안 : 정당이 자체 내에서 차세대 정치인을 키우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런 악순환이 계속 될 게 뻔합니다. 최근에 노르웨이 테러를 봐도, 총기 난사가 일어난 우퇴위야 섬에서 집권당인 노동당이 청년 당원을 상대로 여름 캠프를 열었어요.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정치인들이 발굴이 되어야 합니다.
박성민 : 미국, 유럽에서는 정당이 바로 그렇게 차세대 정치인을 발굴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정당도, 대학도, 사회도 정치인을 키우는 역할을 하지 않아요. 자,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군인은 사관학교가 있어요. 의사는 의과 대학이 있습니다. 법조인도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아요. 그리고 20대 후반부터는 사회에서 경력을 쌓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키우는 기관도 없고, 또 너무 늦게 시작해요.
버락 오마마 미국 대통령이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40대에 대통령, 총리가 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이미 10대 때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입문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나이는 40대지만 한국 정치인의 '정치 연령'과 비교해보면 한 60대 이상이 된 이들입니다. 한국에서는 다른 일을 하다가 40~50대에나 정치에 입문하니까요.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훈련된 정치인이 필요한 나라가 어디인가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강대국에 섬처럼 낀 분단국가 대한민국입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의 정치인이 가장 미숙해요. 이러니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리더로서의 교육을 받은 미국, 중국 더 나아가 북한의 정치인을 어찌 상대하겠어요.
프레시안 : 사실 그렇게 정당 정치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은 정당 스스로 자초했어요. <한겨레>와 같은 진보 언론도 그걸 도왔고요. 예를 들어서, 노무현 정부 때 열린우리당이 했던 이른바 '정치 개혁'이 대표적인 헛발질입니다. 정치자금법 개정, 지구당 폐지, 국민 참여 경선제, 당 외부인이 주도하는 공천심사위원회 같은 것들이요.
박성민 : 맞습니다. 어리석은 짓이었어요. 그것의 문제점을 다루려면 별도의 자리가 필요할 테지만, 일단 지금이라도 다시 여야가 의논해서 다 되돌려야 합니다. 당장 정치자금법부터 개정해서 개인이 쌓아둔 돈이 없더라도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야 지금처럼 돈 좀 있는 사람만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수 있는 현실을 바꿀 수 있어요.
지구당도 살려야 합니다. 일상의 정치가 민주주의의 근간이잖아요. 정치인이 골목골목마다 시민을 만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고리가 되는 지구당을 폐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지요. 선거 운동을 옥죄는 각종 규제도 다 풀어줘야 합니다. 어디서든 정치인이 시민과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그래서 20대부터 선거에 나와야 합니다. 또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야지요. 그런 게 가능할 때 한국 정치의 질이 획기적으로 나아질 수 있어요.
자꾸 '고비용 정치'라고 하는데,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 정도의 비용은 당연히 감수해야죠. 시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양질이 되면, 관료들이 세금으로 장난하는 일을 막을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시민에게 이익입니다. 정당 외부의 스타에 열광하며 현실 정치인을 조롱할 때, 정작 뒤에서 웃고 있는 건 관료, 판·검사 같은 비선출 권력이라는 진실을 알아야죠.
프레시안 : <강남 좌파>에서 강준만 교수가 정작 그런 문제는 외면해서 실망스러웠어요.
박성민 : 손학규(7장), 유시민(8장), 문재인(9장) 등의 부분은 사실 <강남 좌파>의 전체 흐름을 염두에 두면 튑니다. 다른 부분과 유기적으로 연결이 안 됩니다. 그러니 그런 부분을 빼고 차라리 이런 얘기를 더 깊이 다뤘더라면 애초의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라는 이 책의 주제에 더 부합했을 텐데요.
'강남 좌파' 대통령은 가능한가?
프레시안 : 얘기를 쭉 하다 보니, 지금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는 강남성을 가진 엘리트, 즉 강남 좌파, 강남 우파의 득세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강남성을 획득할 수 없는 정치인의 성공은 기대할 수 없는 건가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어떤가요? 박근혜 전 대표는 강남 우파라고 하기에는….
박성민 : 강남에 살기는 하지요. (웃음) 지도자, 리더의 조건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어요. 이미지, 업적, 비전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이미지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이 업적이고, 비전이 영향력이 제일 작아요. 박근혜 전 대표는 지도자, 리더로서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대통령 박근혜' 하면 사람에 따라서 거부감은 있을지언정 낯설지는 않잖아요.
김대중, 김영삼 두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두 사람의 경력은 지도자, 리더로서의 이미지를 강하게 대중에 각인시켰어요. 역시 둘 중에 누구라도 앞에 대통령이 붙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이명박 대통령은 좀 느낌이 다릅니다.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현대건설 CEO, 서울시장으로서의 업적으로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으니까요.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대통령이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비전을 제시해서 최고 지도자가 된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처럼 이미지, 업적, 비전이야말로 대중이 지도자를 승인하는 필수 조건들이에요. 그렇다면 강남 좌파, 강남 우파들이 이런 지도자의 조건을 획득할 수 있을까요?
프레시안 : 강남성은 방금 언급한 지도자의 조건과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이긴 합니다만….
박성민 : 맞아요. 강남 좌파, 강남 우파들이 국회의원을 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들이 지도자, 리더가 되려면 '강남성' 외의 다른 조건들이 더 필요합니다.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서 헌신한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원칙을 위해서 패배가 뻔한 지역에 출마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같은 비장한 모습이요.
그런데 강남성은 그런 헌신성, 비장미와 어울리지 않아요. 개인의 자유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소신과는 어긋나지만 아이를 위해서 외국어 고등학교에 보냈어요", "클래식 좀 좋아하면 어때요", "나는 나고 가족은 가족이죠." 이런 식의 입장으로는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는 있어도 지도자가 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프레시안 : 여기서 또 딜레마가 발생하네요. 만약에 그런 것을 버리는 순간, 그건 세련되지 못한 촌스러운 모습이 되니까요. 즉,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던 강남성을 잃어버리는….
박성민 : 맞아요. 오세훈 시장의 예가 대표적이에요. 오 시장이 안보 보수, 경제 보수와 거리를 두지 않고 보수의 아이콘이 되려는(되는) 순간, 바로 강남 우파로서 가졌던 강남성이 사라져버렸잖아요. 제명이 된 거죠.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가졌던 가장 중요한 매력 요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건 아직 장외에 있는 혹은 큰 꿈을 꾸는 강남성을 가진 엘리트들에게 반면교사가 될 것 같습니다. 조국, 안철수, 박경철, 김제동 씨 등은 바로 강남성 때문에 대중의 열광을 받고, 정치권으로부터 러브 콜을 받아요. 그런데 그들이 현실 정치로 들어와서, 각각의 진영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맡는 순간 그 강남성은 사라지게 될 테니까요.
중요한 호남 변수, 몰락한 호남 정치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강남 좌파>에 투영된 강준만 교수의 욕망, 이런 것도 한 번 읽어볼까요? (웃음) 강 교수가 2006년에 <인물과 사상>에서 강남 좌파를 언급할 때만 해도, 입장은 강남 좌파 '옹호'에 기울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은 대체로 강남 좌파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입장 변화가 이른바 강남 좌파로 거론되는 이들 중에 호남 정치인이 없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웃음) 아까도 얘기했지만 책의 주제와 다소 동떨어진 유시민 대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도 그런 인상을 부추기고요.
박성민 : 글쎄요. 강준만 교수가 <김대중 죽이기> 이후에 여러 차례 자신의 '친(親) 김대중(DJ)' '친 호남' 성향에 대한 바뀐 생각을 많이 얘기했어요. 그러니 책에 명확히 나오지 않은 그런 강 교수의 의도를 지레 짐작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다만, 독자 입장에서 그런 분위기가 감지되는 건 사실입니다.
사실 많은 정치 평론가는 침묵하고 있지만, 오는 2012년 대선에서도 호남 변수는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호남이 상수였는데, 지금은 변수가 되었으니 더욱더 중요해졌지요. 그럼에도 현실 정치에서 호남의 위상은 낮아졌어요. 차세대 지도자로 꼽힐 만한 정치인도 부각되지 않고, 영향력도 떨어졌어요.
그간의 대선 경험도 한몫 했지요. 1997년에 DJ가 JP(김종필)에게 내각의 절반을 내주고 연합을 했고, 상대방의 표를 갉아먹는 이인제 후보가 있었고, 심지어 구제 금융을 요청한 직후였는데도 고작 이회창 후보와의 득표율은 1.5퍼센트 차이였어요. 반면 2002년에는 '권영길 변수'가 있었음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회창 후보를 2.3퍼센트 차이로 눌렀어요.
또 2007년에는 이명박 후보에 맞서 손학규 의원 대신 호남 출신의 정동영 의원이 나섰지만 고작 26.1퍼센트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남 후보가 야권 후보로서 경쟁력이 있다, 이런 판단이 정치권에서 암묵적으로 있는 게 사실입니다. 거기다 장내, 장외의 영남 출신 정치인 혹은 엘리트들이 많이 거론되고 있고요.
프레시안 : 그런 분위기에 대한 반감이 책에서 읽힌다면 무리한 독해입니까? (웃음)
박성민 : 그거야 강준만 교수 본인만 확인해줄 수 있는 질문이라서…. (웃음)
프레시안 : 다음에는 또 흥미로운 책들로 조만간 또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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