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8월 12일
8월 13일자 <동아일보>에 특이한 기사 하나가 "외안(外眼)에 비친 조선 자태"란 제목으로 실렸다. 로렌스란 사람의 <극동별견(極東瞥見)>이란 책에서 조선인에 관한 견해를 뽑은 것인데, 저자와 책에 관해 다른 자료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로렌스가 <중국인의 성격>이란 책도 썼다고 하는 말이 기사 도입부에 있는 것을 보면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경험과 지식은 꽤 가졌지만 학식은 별로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책 한 권으로 <중국인의 성격>을 논하다니.
천박하건 어쨌건 이런 사람의 관점이 당시 조선을 좀 아는 서양인들의 일반적인 시각을 어느 정도 대표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그 내용을 옮겨놓는다.
조선인의 최대의 결점은 그 능감(能堪)한 허언술(虛言術)이겠다. 묘액대(猫額大, 조그만)의 이 반도가 지나와 일본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변 유목 민족의 제국주의적 행세의 대상으로 전락하자 실력의 빈곤을 구변과 아부로써 호도해 온 것이다. 급박한 당면의 난관을 수습하기 위하여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의 영달과 상대편의 굴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허언을 토한다는 것은 결코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 아니다.
그 선미(善美)한 유교적 윤리 강령은 허언을 토하는 사람에게는 그 비도덕적 요소를 도리어 양심적 자위에까지 인도하는 동시에 허언에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가령 말하자면 교언영색에 빠지기 좋도록 성격의 '사무사(思無邪)'를 항상 훈순(訓馴)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비참한 사태가 발생한다. 이 사회의 자연도태는 결코 우수유능이 열등무지를 대사(代謝)하는 것이 아니라 휼사간계(譎詐奸計)가 순진충실을 제압하게 된다. 그 결과 마키아벨리가 통탄하던 16세기 이태리 사회를 동양적 조건하에서 재연하고 있었다. 분리 원한 무질서 그리고 피압박 민족의 비애……이것이 이 민족의 운명 계열이었다.
실로 조선인과 접촉해 보면 그 삼엄한 자기 경계는 가경(可驚)할 만하다. 일부러 성을 쌓아 상대자로 하여금 용이하게 접근 못하게 잔뜩 시침을 떼는 것 같다. 이것이 최초의 인상이다.
그러나 일차 교제가 시작되어서 왕래가 있게 되면 이번에는 그 개방성에 또 한 번 놀란다. 혼자만 알고 있어도 좋은 개인적 비밀 이야기, 할 필요 없는 사실의 제시 등등……있는 것 없는 것 모조리 다 상대자에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상대자에 대한 신뢰감을 자기 자신의 주관적 해석 속에서 우렁차게 느끼곤 한다.
그 결과는 대개 다음과 같다. 무자각한 자기 폭로가 상대자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상대자에 대한 과신이 판명될 때 지극히 분노하며 한탄하는 것이다.
중국을 '지나'라 한 것도, 조선인을 바라보는 시각도, 일본의 입장을 떠올려준다. 확인할 길은 없어도 저자가 일본에서 오래 지낸 선교사라는 데 돈 1만 원 걸 용의가 있다. 지금은 이런 시각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아마존에서 "glimpse, far east"로 검색하니 존 톰슨(John Thomson)의 1865년 책만 나온다.) 1946년 당시에는 조선에 관심을 가진 서양인들이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였을 것이다.
해방 1주년 시점에서 조선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수필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일기를 대신한다. <신천지> 제1권 제7호(1946년 8월)에 실린 오기영의 "실업자". 오기영, <진짜 무궁화>(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펴냄) 15~18쪽에서 옮겨온다.
해방된 지도 어언 일 년이 가깝지마는 아직도 해방 직후 정돈된 산업 기관의 부흥은 까마득하여 실업자 구제 대책은 의연히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의 하나다.
이미 관중은 싫증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정치 무대에서는 여전히 파쟁극만을 연출하고 있으니 이들의 눈에는 민족 반역자와 반동분자와 빨갱이 극렬분자만 보이는 모양이고 그 많은 실업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가 보다. 이 실업자들이야말로 일제의 잔재가 아니라 일제의 희생자요, 파쇼 분자도 아니며 민족을 반역한 일도 없는 소박하고 선량한 조선 동포들인데 어찌하여 민중을 위하노라는 애국자들인 정치가들에게서 이 가엾은 동포들이 간과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천만 가지 화려한 이론이 제각기 제가 옳고 남이 그르다고 주장하지마는 실상은 제가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이론의 골자인 양하다. 제가 정권을 잡는 것이 대중의 복이 되는 것이요, 남이 정권을 잡으면 대중은 불행하리라는 것이 주장의 알맹이가 되어 있다.
그럴는지도 모르기는 하다. 하지마는 그렇게 대중을 사랑하는 정치가들이면서 어찌하여 실업 대중은 몰라보며, 조국을 위한다면 그 조국이 '실업 자국'이 될 지경으로 지금 인민의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어 있는 현실을 광구할 역량을 발휘하지 않고 있는가 의문이다.
하물며 이 실업자들도 정권을 맡길 사람을 선택할 권리의 소유자들이요, 이들의 투표도 인민의 의사로써 표현될 것이고 보면 이들에게 아무런 생활의 방도도 열어주지 아니하고 그저 덮어놓고 내가 잘났으니 나를 대통령으로 투표하라는 주문은 천부당만부당한 몰염치가 아니겠느냐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민은 식이 위천(民食爲天)이라니 먹을 것 주는 이가 우선 대통령이 되어야지 이론만으로 배가 부르지 않는 것 아닌가. 독립도 고목에 필똥말똥한 꽃인지 될듯 말듯한데 정치가의 극성스런 아우성 틈에 배곯은 실업자의 처지로서는 밥 주는 곳으로 쫓아가는 수밖에 없이 되어 있다.
그런데 괘씸한 것은 "내가 정치가요" 하는 점잖은 양반들이 이들 실업자를 정당한 방법으로 구제할 생각은 아니하고 밥을 미끼로 하여 자기 대신 제 욕심대로 폭력주의를 행사하는 것이다. 테러에도 색별이 자연한 듯하여 백색 테러니 적색 테러니 하지마는 실상은 폭력 행사자 자신에게는 이런 사상적 근거보다도 배고픈 원인이 좀 더 정당한 원인이라 보아야 옳을 상 싶다. 배고픈 사람에게 한 때 밥을 주니 은혜요, 게다가 동지의 명예와 애국자의 공명까지 곁들여 주면서 "저놈이 나쁜 놈이다, 쳐라!" 하니, 안 치는 사람보다는 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리에 그럴 듯하다.
이래서 이들은 실업한 탓으로 배고픈 약점에 잡혀 모략에 이용되고 저도 모르는 새에 동포상잔의 죄를 범하는데, 한 번 더 괘씸한 것은 이들을 이렇게 이용하면서도 언제 제게도 남이 이용하는 테러가 닥칠지 몰라서 테러는 금물이라고 바로 점잔을 빼는 양반들이다. 뱃속을 들여다보면 내 테러는 애국심에 불타는 의거요, 저편의 테러만은 배격하자는 것일거니 사리가 여기 이르면 가위 언어도단이다.
이런 인물이 정치 무대에서 날뛰는 날까지는 암만 민중이 속을 태워도 통일은 무망이요, 독립도 피안의 신기루다. 이따위 정치가는 자기의 정치적 실업을 겁내서 정작 민중의 실업을 고려하지 않는 것인데, 하기는 내 코가 석자면 하가(何暇)에 남의 걱정을 하리요마는, 그런지라 이따위 정치가는 모조리 면직처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략과 욕설과 폭력 지도에는 우등생이요, 정작 정치에는 낙제생인 자들에게 이용되고 있는 실업자가 가엾다면 이것은 조선 전체의 불행이지 결단코 한 개인 개인의 불행이 아니다. 더구나 사흘 굶어 담 넘어가지 않는 사람 없다고 절도, 강도가 부쩍 늘었는데 이것을 거저 국민의 도의심이 없어진 탓이라고 간단히 밀어버리고 바로 장탄식을 하는 도의정치가들은 우선 자기 자신이 한 사날 굶어보란 말이다.
노예로는 36년이나 살아 견디었지만 밥을 굶고야 무슨 수로 견딜 수 있겠는가. 한 번 체험해보게 되면 어시호(於是乎) 배곯은 민중에게 도덕을 요구하고 비판을 요구하고 그뿐인가, 지지를 강요하니 때는 정히 민주주의 시대로서 그도 케케묵은 옛날의 자본가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가장 진보적 민주주의 시대라면서 이건 막 민중을 일종의 도구로 알지 않고는 못할 노릇이다.
그 많은 직장 그 많은 일감을 내놓고 왜놈은 쫓겨 갔으니 응당 일자리가 많아지고 사람이 귀해야 옳겠는데, 어떻게 된 심판인지 사람은 똑같이 천하고 일자리만 귀하니 무슨 요술 판인지 모를 일이다. 이만하면 아심즉하니 정치가 여러분은 제발 민족반역자 반동분자 극렬분자만 찾지 말고 죄 없는 실업대중을 건져낼 도리를 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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