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소장 엄구호)는 지난 4월 6일부터 5월 25일까지 총 8회에 걸쳐서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 시민 강좌를 진행했다. 이 강좌는 러시아·유라시아 전문 연구 기관을 표방한 아태지역연구센터가 고선지, 혜초 등 역사 속 인물을 통해서 실크로드의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마련되었다. <프레시안>과 아태지역연구센터는 매주 한 차례씩 이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역사학자 김기협 프레시안 상임기획위원, 지배선 연세대학교 교수, 김규현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장, 김호동 서울대학교 교수, 이희수 한양대학교 교수, 성동기 인하대학교 교수에 이어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이 강의의 핵심 내용을 글로 정리했다. 정수일 소장의 이번 글은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 시리즈의 마지막 글이다. 연재 이후에도 유라시아와 실크로드에 대해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관련 기사 :"'빨갱이', '스킨헤드'의 나라? 美·中 견제할 새 파트너!") |
정화(鄭和). 10여 년 전만 해도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다가 두 가지 '폭탄 선언'으로 일약 희세의 위인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97년 미국의 학술지 <라이프>가 새로운 세기를 맞으면서 학자들의 설문조사를 통해 지난 1000년 동안 '역사를 만든' 위인, 이를테면 '사건 창조적 인간' 100명을 순위를 매겨 뽑았다. 동양인은 11명밖에 오르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제대로 된 인물을 찾았다는 데서 일말의 위안을 느꼈다. 이 11명 가운데 간디나 쿠빌라이, 마오쩌둥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멀리 제치고 단연 선두(14위)에 오른 사람은 다름 아닌 정화다. 바꿔 말하면, 지난 1000년 동안 동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바로 정화라는 것이다.
또 하나 지난 2003년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의 왕립 지리학회에서 영국 해군 잠수함 퇴역 장교인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가 '신대륙' 발견자는 콜럼버스가 아니라 정화 함대라고 장엄한 선언을 한다. 불과 5년의 시차를 두고 터진 이 두 가지 사건은 중세 대항해 시대에 대한 지금까지의 통념을 일시에 날려 보내는 명실상부한 '폭탄 선언'이다. 충격을 받은 동서양 학계는 저마다 그 해명에 골몰하고 있다. 과연 실(實)인가 허(虛)인가?
▲말레이시아의 사당에 있는 정화의 석상. ⓒnavercast.naver.com |
정화의 이러한 승승장구는 성조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천부적 재질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열한 살 위인 주체가 정변을 일으켜 황제가 되기 전 연왕으로 있을 때부터 그를 밀착 경호하는 환관으로서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면서 한문도 익히고 여러 나라 말도 배워두었다. 키가 9척(180센티미터)이고 허리 둘레는 10위(150센티미터)의 거부인데다가 미목이 수려하고 호랑이처럼 걸으며 목소리는 낭랑하니, 실로 재질과 용모가 구전한 거장의 귀상(貴相) 모습 그대로다.
개인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언필칭 '시대'다. 명대 초기에는 건국 지반을 다지고 성가신 왜구의 소요를 막기 위해 해금(海禁)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결과 국제 무역이 줄어들어 재원이 쇠잔해지고 중화의 국제적 위상이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좌시하지 못한 성조는 등극하자마자 동남아 각국에 사절을 보내고 동남해안 지역 여러 곳에 무역을 관정하는 시박제거사(市舶提擧司)를 설치하면서 해금을 풀고 해외진출을 권장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성조의 신임이 두터운 정화는 그의 명을 받들어 일곱 차례나 '하서양', 즉 해로를 통해 서양에 파견된다. 당시의 서양은 오늘날의 서양 개념과는 달리, 보르네오 서쪽에서 아프리카 동해안까지의 인도양 해역을 말한다. 정화가 이끄는 대규모 선단은 28년 동안(1405~1433년) 일곱 차례에 걸쳐 남경에서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무려 30개국, 500여 개 지방, 총 18만5000킬로미터나 되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항해를 단행했다.
바다의 풍운아 정화도 구경은 죽음으로 그 운세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제7차 '하서양' 중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어디서 어떻게 사망해 어디에 묻혀있는지는 지금껏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회항 중 인도 캘리컷에서 사망했으며, 남경 중화문 밖 우수산(牛首山) 자락에 매장되었다는 것이 회자되는 설이다. 일세를 풍미했지만, 환관과 천민이란 굴레에 묶인 채 그의 종말은 이렇게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에게 600년이나 지난 오늘에 이르러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지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한 일이다.
정화는 '하서양'할 때마다 당시로는 명망 있는 학자나 문장가들을 대동해 기록을 남기게 하고, 자신이 직접 기념비 같은 것을 세워 장거를 알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가 지나간 동남아 곳곳에 그를 기리는 묘당이나 비석들이 세워졌다. 그래서 비록 훗날 조정의 무모한 분서로 기록들이 숱하게 소실되었지만, 적잖은 기록과 유물들이 남아있어 역사적 '하서양'의 전말을 그나마도 세세히 전해주고 있다.
마지막 제7차 '하서양'의 항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430년 12월에 남경을 출항해 중국 동남해안과 베트남의 참파, 자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해협, 스리랑카,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을 거쳐 이란의 호르무즈까지 갔다가 거의 같은 항로로 회항해 1433년 7월 남경에 도착한다. 가는 길에 2년, 돌아오는 길에 5개월이 걸렸다. 매번 정화 휘하의 선단은 대종(大䑸)과 소종의 두 편대로 나눠 활동한다. 대종은 전체 선단이고, 소종은 대종에서 각지에 파견된 분견대다. 분견대는 활동을 마친 후 분견지에 돌아와 여러 소종들과 합류해 대종을 이루어 회항한다.
마지막 '하서양'을 떠나기 직전, 정화는 친히 복건성 장락현에 <천비지신령응기(天妃之神靈應記)>라는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즉 "나 정화는 영락 4년(1405년)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동료들과 함께 이민족 나라들을 방문했다. 그 후 지금까지 모두 일곱 번 항해했는데, 그때마다 수백 척의 대선단과 수만 명의 병사를 거느렸다 (…) 수평선 넘어 세상의 끝에 있는 나라들이, 서쪽에서는 서쪽 맨 끝이, 동쪽에서도 동쪽 맨 끝이, 우리가 도달하려는 항해의 목표였다 (…) 우리가 찾아간 서방이라는 국가는 3000여 개국에 이르렀고, 거대한 대양을 10만 리나 넘게 항해했다 (…) ". 7차 '하서양'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이다.
각설하고, 여기서 <라이프>의 '폭탄 선언'으로 화제를 돌려보기로 하자. 왜 지난 1000년 동안의 동양 최고의 인물로 정화를 꼽았을까? 지금까지 신대륙의 발견이나 인도해로의 개척으로 중세의 서막을 열어놓았다고 우겨대던 서구가 자존심과 '중심주의'를 내려놓고 정화를 앞세울 수밖에 없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정화의 '하서양'은 15세기 말 소위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콜럼버스나 '인도항로'를 개척했다는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보다 시간적으로 근 한 세기 앞섰을 뿐만 아니라, 선단의 규모나 선박의 구조면에서도 그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월등하다. 제1, 3, 4, 7차 출해 때 매번 선단의 승선 인원이 2만7000명이나 되었고, 매번 출동 선박은 대소 200여 척이나 되었다. 선박 중에서 기함격인 보선(寶船)은 매번 20~30척씩 참가하는데, 보통 보선의 길이는 약 138미터이고 너비는 56미터쯤 된다니 어림잡아 축구장 크기다. 적재량은 1500톤으로 1000명이 승선할 수 있으며, 9주의 돛대에 12장의 대형 돛을 단 대범선이다.
이에 비해 87년이나 뒤늦은 1492년에 대서양을 횡단한 콜럼버스의 선단은 고작 3척의 경범선에 90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으며, 기함의 적재량은 250톤에 불과했다. 이어 1498년 인도양 항해에 성공한 다 가마의 선단도 4척의 소범선에 승선인원은 160명이었으며, 길이가 25미터도 채 안 되는 기함의 적재량은 겨우 120톤이었다. 정화보다 약 100년 후에 환지구 항행을 단행한 마젤란 선단의 겨우도 5척의 소범선에 265명이 승선했으며 적재량도 최대가 130톤이었다.
실상을 밝히기 위해 조금은 지루하리만치 수치들을 나열했다. 사실 이러한 어마어마한 대범선의 건조 문제를 놓고 그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이 시점까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필자는 그 가능성을 다음과 같은 논리에서 찾고 있다. 즉 1957년 명대에 건설된 남경 용강(龍江) 조선소에서 길이 11.1미터의 조타대(키)가 발견되었는데, 이 크기의 키라면 보선 같은 대형 범선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수행한 사람들이 여러 저서에서 이러한 실록을 남겨놓고 있다.
게다가 명대는 대형 선박을 건조한 전대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당대에 길이 20장(약 62미터, 600~700명 탑승)의, 송대에 40장의 배를 건조했으며, 북송 때 고려에 파견한 신주(神舟)의 길이도 30여 장이나 되었다. 이상의 몇 가지 점으로 미루어 명대에 정화의 보선 같은 대형 선박은 건조 가능하였다고 추론한들 별 무리가 없을 성싶다.
▲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개빈 멘지스 지음, 조행복 옮김, 사계절 펴냄). ⓒ사계절 |
그의 말대로라면, 앞에서 지적한 것 말고도 정화 선단은 쿡 선장보다 300년 앞서 호주를 탐사했고, 유럽인들보다 무려 400년 전에 남북극에 도달한 셈이다. 멘지스는 다른 저서 <1434, 증국의 정화 대함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불을 지피다>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동력은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명이 아니라 정화의 함대에 의해 전수된 중국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화는 왜 이러한 전무후무한 대규모의 항행을 단행했을까? 그 원인에 대해 이론이 구구하지만, 종합하면 몇 가지다. 다들 첫째 원인으로 후환이 걱정되어 '정란지변' 때 해외로 도주했을 건문제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을 꼽고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회적이거나 부차적인 동인은 될 수 있어도 항시적인 주원인은 아닐 것이다. 실제적 주요인은 해금으로 인해 추락된 국위를 선양하고, 경제적으로 대외 무역을 진작시키기 위함이었다. 때마침 북방에서 중앙아시아 일원을 장악하고 있는 타타르와 티무르에 의해 오아시스 육로를 통한 대서방 교역이 저애를 받자 해로를 통한 교역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7차 '하서양'은 대규모 해상 교역이라고도 말한다. 이밖에 황족과 귀족 등 특권층의 부귀영화에 필요한 이방의 보물을 얻어오기 위한이란 분석도 가능하다.
<라이프>와 멘지스의 두 갈래 '폭탄 선언'을 유도케 한 기폭제는 아무래도 정화의 7차 '하서양'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일 것이다. 이 '하서양'을 계기로 중국과 해상 실크로드 연안 여러 나라들과의 통교와 교류가 전례 없이 활성화되었다. 해마다 내화 사절이 끊이지 않고, 180여종의 각종 외국 물품이 수입되었으며, 중국인들의 남양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정화의 '하서양'은 중세 대항해의 서막을 열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해상 실크로드사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항정 거리나 항행 기간, 선박의 규모와 수량 및 적재량, 승선 인원수, 선단 조직, 항해술 등 모든 면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원양 항해로서 서구를 멀리감치 앞질렀으며 목선과 범선 항해의 기적을 이루었다. <정화항해도>에 500여개의 지명(외국 300여개)과 방위, 항구, 암초 등 표식물이 오롯이 명기됨으로써 세계 원양 항해사의 진귀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화의 이러한 혁혁한 업적은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더욱이 값지게 이어진 것도 아니어서 우리에게 통절한 역사적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다. 제6차 '하서양'이 한창이던 1421년 4월 북경의 황국이 불에 타는 사건이 일어나자 한림원의 한 유지는 중화제국의 전통을 무시하고 함부로 서양에 함대를 파견한데 원인이 있다고 강변하면서 선단의 항해 중단을 건의한다. 분별력을 잃은 성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정화를 중도에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의 사후 44년 만인 1477년 병부는 문신 세력을 등에 업고 '하서양'은 막대한 전량을 낭비하고 1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도 국익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된 무모한 행동이라는 비난을 했고, 더불어 환관 세력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정화의 '하서양'과 관련된 기록, 특히 조선 관련 기록을 몽땅 불살라버렸다. 이 분서 사건은 지난 1000년 동안의 중국의 최대 비극이라는 데 중국학계는 입을 모으고 있다. 필요한 설계 문헌의 소진으로 인해 더 이상 대형 선박을 건조할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 30년 후에 왜구가 침입해 왔고, 그로부터 장장 600년 동안 강대국 지위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번번이 바다로부터 외세의 내침을 받아오다가 끝내는 망국의 비운을 면치 못했던 해양국인 우리로서는, 조선 산업을 비롯한 강력한 해양력 배양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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