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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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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

[해방일기] 1946년 7월 26일

1946년 7월 26일

좌우 합작 제1차 본 회담이 7월 25일 열리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해 본다.

5월 25일 김규식, 원세훈, 여운형, 황진남 모임. 버치와 아펜젤러 배석. 원세훈이 공개.
6월 14일 김규식, 여운형, 허헌 모임. 약간의 합의 도달. 원세훈이 공개.
6월 22일 김규식, 원세훈, 여운형, 허헌 모임. 버치와 아놀드 배석.
6월 30일 하지, 좌우 합작 지지 성명.
7월 10일 합작위원회 구성. 좌우 각 5인 대표와 2인 비서.
7월 17일 여운형 피습.
7월 22일 제1차 예비 회담. 우익 대표 전원과 좌익의 여운형, 정노식, 이강국 참석.
7월 25일 제2차 예비 회담에서 바로 본회담으로. 허헌 외 전원 참석.

7월 25일까지 진행이 순조로웠다. 매주 2회씩 회담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7월 29일과 8월 2일 예정되었던 회담이 좌익 대표들의 불참으로 유회되면서 정돈 상태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직접 원인은 민전이 7월 26일 발표한 '합작 5원칙'이었다. 어제 소개한 5원칙 내용을 다시 옮겨놓는다.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하는 삼상 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촉진 운동을 전개하여 남북 통일의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을 매진하되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 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적극적 행동 통일을 기할 것.
2) 토지 개혁(무상 몰수 무상 분여) 중요 산업 국유화 민주주의적 노동 법령 급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제 기본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3) 친일파 민족 반역자 친파쇼 반동 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러를 철저히 박멸하여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 석방을 실현하여 민주주의적 정치 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
4) 남조선에 있어서도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치 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토록 기도할 것
5) 군정 고문 기관 혹은 입법 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


민전의 5원칙 발표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합작 회담의 모든 발표를 김규식, 여운형 두 의장의 공동 발표를 통해 한다는 의사 규정을 어긴 문제. 둘째, 좌익을 대표하는 5원칙의 결정과 발표 과정에서 좌익 측 의장인 여운형을 배제한 문제. 셋째, 내용상의 문제.

첫째 문제에 대해 우익 대표 원세훈이 7월 27일 기자 회견에서 불만을 표시했다. 개인이나 소속 단체에서 개별적 담화를 발표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좌익 측이 이를 어겼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좌익 대표 이강국은 합작위원회의 규정이 다른 정당이나 사회 단체를 구속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둘째 문제에 대해 여운형이 직접 불만을 표시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5원칙의 결정과 발표 과정에서 그가 배제된 것은 확실한 일로 보이고, 그것은 좌익 측 의장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7월 29일과 8월 2일 예정되었던 회담에 그는 병을 칭하고 결석했다.

셋째 문제인 내용상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는 민전의 5원칙에 대한 대응으로 우익에서 내놓은 8원칙과 비교해 보겠다. 8월 2일 우익 측 비서 송남헌이 좌익 측 비서 김세용에게 건네준 것이다.

좌우합작위원회는 29일 하오 3시부터 덕수궁에서 제2차 정식 회담을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여운형이 미양(微恙)으로 출석치 못하여 좌익 측에서 정례 회의 연기를 요청하여 왔으므로 부득이 다음 정례 회합일인 8월 2일(금) 회담을 연기키로 되었다고 한다. 이날 회합 장소인 덕수궁 석조전에 우익 대표 전원 5씨만 출석하였고 좌익에서는 비서 금세용이 연락차로 출석하고 우익 측 원칙 제시를 요구하여 이를 우익 측 비서 송남헌이 휴대하고 동반하여 여운형에게 전달하였다. 그런데 우익 측에서 발표한 합작 기본 대책 8대 조항은 다음과 같다.

우익 합작의 대책

본 위원회의 목적(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의 완전독립을 촉성)을 달성하기 위하여 대내 대외의 기본 대책을 하와 여히 의정함

1)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에 노력할 것
2)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할 것
3) 소위 신탁 문제는 임정 수립 후 동 정부가 미소공위와 자주 독립 정신에 기하여 해석할 것
4) 임정 수립 후 6개월 이내에 보선에 의한 전국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
5) 국민대표회의 성립 후 3개월 이내에 정식 정부를 수립할 것
6) 보선을 완전히 실시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할 것
7) 정치 경제 교육의 모든 제도 법령은 균등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정할 것
8)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징치하되 임시 정부 수립 후 즉시 특별법정을 구성하여 처리케 할 것 (<동아일보> 1946년 7월 31일자)

좌우 합작에 관한 기초 조사를 할 때 나는 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을 놓고 그 정당성을 비교할 마음이 들었다. 예컨대 좌익 5원칙에서는 친일파 배제를 앞세웠는데 우익 8원칙에는 임시 정부 수립 후로 미뤄놓은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에서 좌익 5원칙이 더 정당한 원칙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동안 상황의 진행을 면밀히 살펴보다 보니 '정당성'보다 '타당성'을 더 중시하는 마음이 든다. 궁극적인 옳고 그름보다 당장의 상황에 도움이 되느냐 여부를 말하는 것이다. 5원칙 중 제4조가 극단적인 예다. 군정 종식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정당한 원칙이지만, 그 시점에서 그 원칙을 드러내 말하는 것이 합작 회담 진행에 무슨 도움이 되나?

그런 기준으로 다시 살펴보니, 민전 5원칙은 실제적인 효용성보다 선전용이라는 느낌을 여러 모로 준다. "3상 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는 말을 꼭 명시할 필요가 있는가? 극우파의 반발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넣은 말로 보이는 것이다.

친일파 문제도 그렇다. 주체적 처리가 가능하게 될 임시 정부 수립 후로 미루자는 우익의 주장이나, 임시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파의 입김을 배제하자는 좌익의 주장이나, 어느 쪽도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우익 대표들 중에도 아주 악질적인 친일파는 미리 배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앞장서서 주장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배제할 범위를 좌익이 구체적으로 주장하면 못 이기는 척하고 그보다 조금만 더 줄이자는 쪽으로 절충할 일이었다. 그런데 좌익은 "친일파 전면 배제"만을 거듭 외칠 뿐, 친일파 처리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 일이 없었다. 공산당이 여운형, 안재홍까지 친일파로 흑색선전을 벌인 것을 보면 '친일파'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정적을 때려잡는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각한 것 같다.

회담에 '원칙'이란 것이 왜 필요한가? 이런 원칙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회담에 응할 수 없다고 회담 성립 전에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 변화도 없는데 일단 성립된 회담장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떼를 쓰면 그게 회담인가? 선전의 무대일 뿐이지. 원하는 것을 서로 의제로 내놓고 절충을 하는 것이 회담 아닌가?

'박헌영의 사람들'은 합작 회담 좌초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어제 본 것처럼 허헌은 대표 자리만 하나 꿰차고 있으면서 예비 회담 이후 회담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민전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이강국은 5원칙의 결정과 발표를 주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운형이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결정적인 문제가 또 있었다. 이북에서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치는 북조선노동당(북로당) 창당 작업이 이미 궤도에 올라 있었고, 이남의 좌익 3당(공산당, 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합당 과제가 떠올라 오고 있었다. 이 과제는 8월 3일 인민당 중앙집행위가 다른 두 당에 합당을 제안하기로 결정하면서 표면화되었는데, 아마 7월 중순부터 논의가 시작되었던 일로 보인다.

여운형은 결국 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창당 과정에서 빠져나가게 되지만, 논의 시작 단계에서는 합당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단계에서는 비록 좌우 합작 저지를 꾀하는 박헌영 일파의 치사하고 악랄한 술수에 불만을 가졌어도 당을 함께 할 사람들을 등질 수 없었다. 박헌영 일파의 방해 공작을 무릅쓰고 좌익을 대표해서 합작 회담을 끌고 갈 인물도 없었다. 그래서 좌우 합작 노력은 꼬박 석 달 동안 마비 상태에 빠져 있게 되었다.

우익 8원칙에 대해 7월 31일 민전 사무국에서 반박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이름 석 자를 반동 노선의 대명사처럼 쓴 것이 흥미롭다. 그런데 8원칙 내용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승만과 같은 수준으로 몰아붙인 것은 그 작성자들에게 억울한 일 같다. 정말로 반동과 대결하고 싶다면 '덜 반동'을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텐데, 자기보다 오른 쪽을 모두 '반동'으로 몰아붙이는 것을 보면 자기보다 왼쪽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대한민국 극우파와 참 닮았다.

"우익에서 제시한 합작 기본 대책의 8개 조건에는 행동 통일의 원칙이 표명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8개 조건의 합작 기본 대책은 이승만 박사의 정치 노선에서 일보도 전진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 동포의 가장 시습한 사활 문제에 관한 개혁은 그대로 덮어 두고 모든 문제의 해결을 정부 수립 후로 미루어 정부 수립에만 급급한 것 같이 보이는데 이는 일견 민중의 요망에 영합하는 듯하나 이 8개 조건은 상술한 바와 같은 의도를 내포한 반동적 강령이다." (<서울신문> 1946년 8월 1일)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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