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한국은 지구화를 가장 폭력적으로 체감하는 국가의 하나다. 근대 국가적 합의조차도 너무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이룩한 탓에 빈약한 민주주의의 축대를 기초로 하여 시민 사회가 허술하게 건조되었다. 게다가 새로운 시대의 주체로서 부상한 '시민'이라는 사회적 존재도 공공적 가치가 몸에 새겨지기 전에 소비 사회적 욕구에 물들어버렸다. 그리고 민주화와 거의 동시적으로 지구화의 광풍을 맞닥뜨렸다.
1997년, 이른바 'IMF 관리 체제'의 시작을 기점으로 하여 지구화는 민주적 제도화에 강력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노무현 정부를 끝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적 열망은 더 이상 시대를 이끄는 주된 동력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민주화 이후' 시대의 대두를 의미하며, 그 제1 추동인은 말할 것도 없이 지구화다. 특히 초기 국면을 주도하는 '시장 주도적 지구화', 혹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다.
말했듯이 현재까지 전개되고 있는 지구화라는 역사적 현상은 근대적 시민 사회의 합리성을 산산이 붕괴시키고 있다. 이러한 합리성에 언어를 부여하고 의미를 풍부하게 해온 주된 사회적 제도는 '대학'이었는데, 그러한 대학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다. 대신 오늘의 대학은 지구화의 새로운 합리성인 '시장적 합리성'으로 재무장화의 도정에 서둘러 들어서고 있다. 요컨대 시장 주도적 지구화를 대변하는 합리성에 대항할 만한 근대적 합리성의 언어는, 그리고 그러한 언어를 창출할 만한 합리성의 제도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
이렇게 시민적 합리성이 붕괴되고 시장적 합리성이 대세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하나는 시장의 합리성에 따라 자기 계발에 몰두하는 무한 경쟁의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투항하는 인간'의 대두이다. 근대적 시민성이 인간의 미덕을 '저항'에서 찾았다면, 하여 주류 세계에 휩쓸리지 않는 주체를 강조했다면, 시장적 합리성은 시장(의 원리)에 순응하는 인간, 그 투항성을 요청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합리성의 세계에서 안식처를 찾고자 영혼의 여행을 떠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글로벌 시대의 종교가 자리 잡고 있다. '순례하는/유랑하는 인간'의 대두이다. 저항이 아니라 탈주, 그것이 새로운 삶의 스타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둘이 전부는 아니다. 뚜렷하게 대두하는 징후들이 이 두 가지일 뿐이다.
▲ <종교, 심층을 보다>(오강남 지음, 현암사 펴냄). ⓒ현암사 |
그런 점에서 나의 이 책 읽기는 저자의 바깥에서 책의 의미를 들춰내는 작업이다. 나아가 독자에게 그 바깥을 상상하며 책을 독서하기를 제안하는 작업이다. 하여 독자들에게 던지는 나의 제안은 글로벌 시대의 종교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성찰하는 데서 이 책이 괜찮은 참고서가 될 것이라는 데 있다.
이 책은, 표제가 말하고 있듯이, 표층 종교를 넘어서 심층 종교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근대 사회와 가장 어울리는 종교 제도는, 오강남의 용어로 하면, '표층성'에 그 특징이 있다. 깊이의 종교, 심층의 종교가 발달하기보다는 표층의 문제가 가장 잘 반영된 제도가 근대적 종교라는 것이다. 가령 근대적 종교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어느 시대의 종교보다 더욱 치열하게 물었다. 그런 맥락에서 제도도 국가와 유사한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반면 깊이의 전문가들은 주변화되었다. '좀 튀는 괴짜' 예언자쯤으로 치부된 것이다.
한데 최근 들어 세계 각처에서 근대적 시민들의 종교심이 변화하고 있다. 내면의 깊이를 추구하는 현상이 폭넓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에 대한 존경심의 변화를 수반한다. 오랫동안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깊이의 전문가들이 새삼 추앙된다. 그리고 기성의 종교 제도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있다. 이와 아울러 성직자들과 지배적인 종교 기구들이 얽힌 각종 추문들이 널리 회자된다. 하여 심층에 대한 시민적인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키기에 기성의 종교 제도들은 마땅치 않다.
지구화와 더불어 시민 사회적 합의들이 붕괴되고, 사람들은 존재 파괴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한 위기에서 탈주하는 합리적인 대안은 부재하다. 해서 사람들에겐 어느 때보다 종교가 필요하다. 한데 기성의 제도 종교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었으니 사람들은 다른 데서 종교성을 찾는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표층 종교의 제도들이 아닌, 깊이의 전문가들을 재발굴하려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오강남이 인용하는 표현에 따르면 그러한 현상은 신비주의(mysticism)로 요약된다. 조금 더 명료한 함의를 그는 독일어 인용에서 보여주는데, 표층에서 벌어지는 신비한 마술 행위를 의미하는 'Mystismus'가 아니라 존재의 깊이를 추구하는 영적 관심을 뜻하는 'Mystik'가 오늘 우리 시대의 종교 현상을 지칭하는 적절한 용어다. 오강남이 인용하고 있는 바, 현대 가톨릭 신학을 한 단계 격상시킨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의 "미래의 그리스도인은 신비주의자(Mystik)가 되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라는 진단은 바로 그것을 적절히 보여준다.
라너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가 활력을 잃은 것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그토록 목말라하는 영성적 욕망을 채워줄 능력을 교회가 잃어버린 탓임을 문제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강남은 그 진단이 가톨릭 교회만의 문제가 아님을 전제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개신교도 공유하는 문제다. 그밖에 세계의 많은 종교들이 그러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가 사용하는 방법은 깊이의 전문가로 볼 수 있는 세계의 위대한 철학자들과 종교적 선각자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총 60명의 인물을 다루는데,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에서부터, 중국과 인도의 사상가와 영성가들, 유일신 종교들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위대한 인물들, 불교의 선각자들 그리고 한국의 영적 스승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망라하여 선별한 인물들이다.
물론 이들 외에도 심층 종교의 스승들로 참고할 만한 이들은 훨씬 많다. 그 많은 이들 가운데 단지 일부에 불과하지만, 종교적 상식에서 평균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가졌을 것인 나에게도 60명 가운데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다. 또 많은 이들은 겨우 이름만 알고 있을 정도로 생소하다. 해서 이 책은 나에게도 세계의 다양한 종교와 사상의 스승들을 비교적 손쉽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너무 간략하게 다뤄진 탓에 대체 이것으로 뭘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손쉽고 간편한 인물 노트다. 하여 이들 심층 종교의 선각자들로부터 깊이를 성찰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첫 번째 징검돌이면 좋을 듯하다. 여기서 출발해서 더 많은 독서와 생각이 필요하다.
한편, 오강남의 책은 세계의 다양한 영역에서 선별하여 신앙적 깊이의 모범들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국가와 종교의 범주에 국한되어서 과잉 발전했던 근대적 종교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는 글로벌 종교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은 우리 시대에 대단히 중요하다. 왜나면 지구화 시대의 탈국경화에 대한 반대 급부적 현상의 하나로 이른바 '신부족주의'(neo-tribalism)가 활성화되고 있는데, 이것은 국가가 분할해왔던 경계(국경) 밖에 대한 배타주의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적 부족주의는 너무 심각한 배타주의적 폐해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의 종교적 분쟁은 배타성을 거의 전쟁화하는 토양처럼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적 부족주의를 넘어서는 글로벌 종교의 상상력은 대안적인 시민 종교다운 영적 성찰을 자극할 것이다. 부족적 종교를 아우르는, 타종교에서 배우는, 나아가 타사상에서 배우는 깊이의 신앙은 숱한 배타주의적 경계를 해체하는 영적 각성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강남은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를 인용하면서 '신비주의의 민주화'를 말한다. 그것은 글로벌 종교의 시민적 경계 넘기가 각종 부족의 이름을 부여받고 있는 집단들, 개인들 간의 민주화만이 아니라, 이름을 빼앗긴 익명의 존재들, 그 '벌거벗은 존재들'과 시민을 갈라놓고 있는 계급적 계층적 경계선까지 넘어서도록 이끈다.
분명 오강남이 제안하는 심층 종교는, 단순한 현대인의 신비주의 현상에 부합하는 종교론적 제안임을 넘어서, 부족 간 분쟁과 계급, 계층 간 긴장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민주주의를 향한 영적 성찰에 관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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