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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도 지지한 좌우 합작, 반대한 세력은?

[해방일기] 1946년 7월 22일

1946년 7월 22일

좌우 합작 회담 대표 10인이 7월 10일경까지 정해져 있었다. 그 구체적 선출 과정은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 이 대표들이 공식적 선출을 통해 특정 기관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우익은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좌익은 민전 지도부에서 비공식 논의로 적당한 인물들을 뽑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인물들이 형식상으로는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회담 결과는 대외적 구속력을 가지지 않았을 것 같다.

우익 대표로는 민주의원에서 김규식, 원세훈, 김붕준, 비상국민회의에서 안재홍, 최동오가 선출되었고, 좌익 대표로 민전에서 여운형, 허헌, 정노식, 이강국, 성주식이 결정되었다. 백남운과 김원봉이 좌익 대표로 보도되기도 했는데, 합작에 열성적이고 비중도 큰 두 사람이 결국 빠진 것은 공산당의 좌우 합작 견제 의도가 개재된 때문이 아닌가 서중석은 추측했다(<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409쪽)

7월 13일 결정된 대표들의 첫 모임이 있었지만 김규식, 원세훈, 허헌 3인이 결석했고 22일에야 정식 예비 회담이 열렸다. 닷새 전 험한 테러를 당했던 여운형과 막 퇴원한 김규식의 회담에 대한 열의를 느낄 수 있다. 김규식의 사회로 진행된 이 회담의 결정 사항은 이튿날 김규식, 여운형 양인 명의 공동 성명으로 발표되었다.

1) 회의 장소는 덕수궁으로 할 것
2) 회의는 매주 2회로 할 것
3) 의장에는 金奎植 呂運亨 양씨를 선거함
4) 미소 양방의 연락장교 1인씩 파견하기를 요청함

1946년 7월 23일 金奎植·呂運亨 (<서울신문> 1946년 7월 24일자)


제4항의 연락장교 파견 요청이 눈길을 끈다. 하지의 6월 30일 지지 성명이 아니라도 이번 좌우 합작이 미군정의 지원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알고 있었다. 미군 연락장교 역할은 버치 중위가 벌써부터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정식 회담에서는 소련군의 연락장교도 참석시켜 균형을 잡겠다는 것이다.

지금 독자들 중에도 미군정의 지원 사실을 알고 "그것도 자주적인 움직임이 아니었구나" 하고 실망감을 표출하는 이들이 있다. 출범 과정만 갖고 지레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치 상태에 변화를 일으키는 실마리는 어느 쪽에서라도 나올 수 있다. 그 실마리를 키워나가는 과정이 공정하게 진행되면서 민의를 충실히 반영한다면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여론협회에서 7월 12일 서울 시내 통행인 7709인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1) 신탁 논의는 정권 수립 후에 하고 우선 좌우 합작하자는 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절대찬성. (3825 / 50%)
실효가 없을 것이다. (196 / 2%)
모르겠다. (3688 / 48%)

(2) 3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탁치는 천만부당 (2726 / 35%)
탁치지지 (704 / 9%)
김-여 양씨에게 일임 (591 / 7%) (<동아일보> 1946년 7월 16일자)


제1문에서 신탁 논의를 앞세울 필요 없다는 의견은 극우파의 탁치 '절대 반대'를 불신하는 민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제2문에 대한 응답자의 3분의 2 이상이 "탁치는 천만부당"이란 의견을 보였지만, 그것 때문에 좌우 합작 내지 임시 정부 수립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당시 민의의 주류였음을 알아볼 수 있다.

조사 방법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일인지 알 수 없어도 제1문에서 48퍼센트가 "모르겠다"는 대답을 하고 제2문에 49퍼센트가 응답하지 않은 사실이 눈길을 끈다. 1945년 연말 이래 신탁 통치 문제는 좌우 대립을 격화시키는 뇌관이었다. 극우파는 신탁 통치가 식민지 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선전해 왔다. 그런데 민의는 냉담했다.

조선인의 대다수가 신탁 통치보다 독립을 바라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굳이 여론 조사 필요도 없이 빤히 짐작되는 사실이다. 그런데 "천만부당" 응답이 35퍼센트에 그쳤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애초에 신탁 통치 '절대 반대' 민의에 거품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동원 깡패들이 '반탁' 깃발을 휘두르며 사회 질서를 짓밟아 온 지난 반년간의 행태에 염증을 느낀 것일까?

<서울신문> 1946년 7월 14일자에 몇몇 정치인들의 좌우 합작에 대한 견해가 소개되었다. 먼저 중도 우파라 할 수 있는 이극로의 견해를 본다. 한글학자이자 민족주의자인 이극로는 신탁 통치 반대 국민총운동본부 위원으로 반탁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민족적 노선에 반발, 1948년 4월 남북 협상 위원으로 평양에 간 길에 그대로 눌러앉은 인물이다.

"불행히 좌우가 나누어져 있는 만큼 합작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번 합작 운동을 대찬성한다. 이번 합작 운동이 성공하리라고는 아직 단언할 수 없으나 다만 도탄에 빠진 민중이 좌우 합작으로 말미암아 임정이 수립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공 여부는 불문하고 민의에 쫓아서 합작 운동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현금 합작의 암(癌)은 무엇인가 하면 솔직히 말하면 내부적인 것보다도 외부적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합작의 원칙 문제는 조선 민족의 양심만 발로되면 된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에 대해서는 지금이라도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서 곧 처단하는 혁명 정신과 수단이 필요할 줄로 안다. 다시 말하면 한 번은 혁명적인 숙청 공작이 없이는 건국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신탁이니 후견이니 하는 문제는 별문제로 조선 민족은 완전 자주 독립할 실력이 충분히 있다. (…) 최근 떠드는 입법 기관은 이 좌우 합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부 문제보다 외부 문제를 중시한 점이 눈에 띈다. 민족 분단에 대해 아직도 내인론과 외인론이 맞서고 있거니와, 나는 이번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외부 문제를 압도적으로 중시하게 되었다. 당시 정치인들은 책임감 때문에도 내부 문제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을 것 같은데, 이극로가 외부 문제를 중시한 관점은 길이 있다면 더 상세히 살펴보고 싶다.

의심의 여지없는 민족주의자였던 만큼 소신을 거침없이 밝힐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 처단을 미룰 일이 아니라는 주장, 독립의 실력이 충분한 민족이므로 신탁 문제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 모두 한국민주당 극우파의 주장에 정통 우익 입장에서 맞서는 것이었다.

남조선신민당 백남운은 좌우 합작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경제사학자로서 유물사관의 최고 권위자였던 백남운은 이북에서 공산당과 연합해 임시인위를 이끌고 있던 독립동맹(신민당) 노선을 이남에서 대표하고 있던 인물이다.

"좌우 합작에 대해서는 물론 찬성이다. 그리고 현재 진척 중에 있는 합작 공작을 지금 곧 성공하리라고 믿는다는 것보다도 우리는 그것이 성공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합작 공작을 방해하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동적 파쇼 분자들이 있는 것을 우리는 엄중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현재의 좌우 합작이 성공되어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만치 어떻게 하여서라도 이를 파괴하려고 준동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민족적 거족적 압력으로 단연코 이를 배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좌우 합작과 삼상 회의 결정과의 관계는 가장 중요 문제인데 이는 아놀드 소장의 언명과 같이 조선 독립을 위한 불변의 법률인 바 삼상 회의 노선에 의해서 합작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새로이 문제되고 있는 입법 기관 설치와 좌우 합작과는 별개문제로 아직 그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동적 파쇼 분자"를 묶어서 극우파에 대한 경계심을 앞세웠다. 그리고 입법 기관 문제를 좌우 합작과 별개로 보는 것은 이극로와 마찬가지다. 이것은 공산당의 이승엽, 인민당의 장건상도 마찬가지이며, 3상 회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점도 백남운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전쟁 중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을 지낼 이승엽은 박헌영 계의 핵심 인물이었고, 임정 국무위원이었던 장건상은 지난 1월 비상국민회의와 결별한 후 여운형의 인민당에 합류해 있었다.

◊ 이승엽의 견해

"좌우 합작 문제는 민주주의 원칙 하에서 논의되는 한 물론 찬성하는 바이다. 그러면 우리가 항상 강조하고 있는 그 원칙이란 것은 동일 목표를 향하여 공동의 행동과 실천을 취하는 것인데 그에는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즉 첫째로 친일파 파시스트 분자를 제외할 것, 둘째 테러 중지와 민주주의자를 석방할 것, 셋째 삼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할 것 등인데 오늘날 조선에서 이 원칙을 떠나서는 좌우 양익을 불문하고 정치적 행동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만약에 우익 진영이 이 행동의 원칙을 승인하고 그 실천이 실제로 보장된다면 좌우 합작 공작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를 방해하는 암(癌)이 있으니 그는 즉 친일파 친파시스트 분자의 준동이다.

이들은 민족의 이익보다도 삼상 결정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 수립으로 말미암아 파괴되는 자기들의 특권적 지위 옹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이들의 제외 없이는 조선 문제의 해결은 바라기 어렵다. 그리고 입법 기관 설치 문제는 좌우 합작과 별개 문제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장건상의 견해

"좌우 합작 문제에 대하여 이를 찬성치 않는 조선인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3000만은 다 같이 이의 성공의 충심으로 희망할 것이니 만치 우리로서 반드시 이번 기회에 성공되어야 되겠다고 희망하는 바이며 이는 성공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합작 공작에 있어 좌익 진영 내부에서는 완전히 의견의 일치를 보고 일사불란한 태세를 갖추고 있으나 듣건대 우익 진영 내부에서는 합작 공작을 반대하는 일부 요소가 있어 우익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합작 공작의 하나의 암적 존재로서 매우 유감되는 바이다.

합작에 있어서는 반드시 원칙이 있는 것이니 그는 조선공산당에서 발표한 세 가지 원칙을 우리 좌익 진영의 공통된 원칙으로서 제시하는 바이다. 그러니 만치 좌우 합작은 반드시 삼상 회의 원칙 하에서 진척되어야 할 것은 췌언을 요치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현혹을 일으킬 문제가 생겼으니 그는 입법 기관 설치 문제인데 우리로서는 이 양자를 전연 별개문제로서 생각하고 있다. 즉 먼저 좌우 합작부터 성공시켜 놓고 연후에 입법 기관 문제를 토의하여야 한다."


우익 인사로는 독촉국민회의 신익희, 비상국민회의의 조소앙 그리고 한민당의 김약수가 눈에 띈다. 신익희는 임정 출신이지만 독촉국민회 출범 과정에서 김구와 결별하고 이승만과 밀착 관계를 맺었다. 장준하의 중경 시절 회고에서 임정 내의 파당적 활동이 제일 극심한 인물로 지목된 바 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서는 목적이 항상 전체적 국민운동이므로 이에 물론 관심을 갖는 바이다. 그러나 좌우 양 요인은 특히 자기 선입주견의 고집을 포기하고 전 민족의 요구와 전체적 입장을 위주로 하는 통일 공작을 도모할 것이다. 여기 잡음의 파생은 절대로 불필요하다. 합작의 조건이니 원칙이니 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바이므로 合作이란 명칭부터 나는 시정할 필요성을 느낀다.

우리는 합작이 아니라 단결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원칙론 운운 설과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배제 등을 논하는 것은 경중을 모르는 행동이다. 그리고 입법 기관설과 합작 문제와는 별다른 의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입법 기관은 러취 장관의 성명문과 같은 의도에서 구성한다면 동 기관이 성공되기를 희구하는 바이다."

친일파 우선 배제에 반대하고 입법 기관을 지지하는 점이 눈에 띈다. 이 기사에 소개된 인물 중 김구와 제일 가까운 입장에 있던 조소앙은 '절대 반탁'의 입장을 보였다.

"좌우 합작에 있어서도 결국은 반탁성이 보장되느냐 안 되는냐 문제이다. 이 반탁성의 승리가 보장된다면 좌우 합작에 물론 찬성한다. 현재 진행 중인 좌우 합작은 성공할 가능성도 있으나 가능 불가능의 문제와는 그 시비 문제와는 다르다. 현재 진행 중인 좌우 합작으로서는 성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지금 좌우 합작은 고름을 짜고 합창(合瘡) 제일주의로 출발하는 것으로 나는 보고 있다. 고름이란 곧 찬탁성을 이름이다. 합작은 다만 민족적 자주성을 양심적으로 실행할 결심을 보증하는 조건으로서 출발하여야만 될 것이다. 반탁성을 갖고 자주 독립을 찾으려는 합작만이 우리 민족의 과제를 옳은 길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김구의 한독당에서 좌우 합작보다 반탁을 중시하던 관점을 조소앙의 견해에서 읽을 수 있다. 한편 한민당의 김약수는 좌우 합작이 "지상 명령"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진행에 의구심을 표하고, 3상 회의 결정 자체를 배격하는 견해를 밝혔다. 입법 기관에 대해서는 신익희와 같이 지지 입장이었다. 좌우 합작에는 부정적이면서 입법 기관에는 눈독을 들이던 극우파의 일반적 태도를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 대중은 여론을 일으켜 좌우 합작이 성공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좌우 양 진영에서도 정도와 성질상 차이는 있을 것이나 그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어 합작은 지상 명령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만큼 金奎植 呂運亨 양씨를 중심으로 진행 중에 있는 합작 공작에 대하여 좌우 양익에서 표면으로 위장한 태도를 갖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 간부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된 것은 막부 삼상 회의 결정이 조선 현상에 있어서 실천이 잘 안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 불완전한 것이 무엇인가를 구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만큼 지금 삼상 회의 결정 이행을 맹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본다.

(…) 그리고 남조선에 있어서의 입법 기관은 좌우가 완전히 합작이 되어 완전 독립을 성수하다면 문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에 합작이 되지 않고 현상대로 모호하게 나간다면 그러한 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약수(1890~1964년). 그 기구한 시대 속에서도 가장 기구한 행적을 그린 인물의 하나다. 김원봉과 절친한 사이로 김원봉이 '약산(若山)'을 가명으로 취할 때 함께 취한 '약수(若水)'란 이름을 본명 김두전 대신 썼다. 일제 시대에 공산당 활동으로 6년간 복역했고 해방 후 건준에 참여해 좌익 활동을 하려다가 앙숙인 박헌영 세력이 건준을 장악하자 이에 반발해 한민당 설립에 참여,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1946년 10월 한민당이 좌우 합작을 등지자 원세훈 등과 함께 한민당을 탈당하고 좌우 합작 사업에 나섰다. 1947년 말 좌우 합작 사업이 좌절된 후에는 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해서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국회에서는 미군 철수 요구, 정부 불신임, 반민특위 등 이승만이 미워할 짓만 골라서 하다가 1949년 6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체포당했다. 전쟁 중 풀려나 북한으로 가서 정치 활동을 하다가 반 김일성 활동으로 인해 1959년 숙청되었다고 한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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