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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 올림픽 '3수'에 실패했다면…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7월 7일 새벽 1시 16분,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2018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이 결정되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이로써 평창은 세 번의 도전 끝에 동계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선정되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나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경우 우리보다 먼저 개최권 도전을 선언한 일본보다 뒤늦게 출발했지만 일사천리로 성공적인 절차를 밟아감으로써 초기에는 거의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던 목표를 도달한 바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큰 국제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음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지난 반세기에 걸친 경제 발전을 통해 각 분야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1999년, 평창에서 개최된 동계 아시안게임 폐막식에서 김진선 강원도지사가 평창에 동계 올림픽도 유치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동계 스포츠 인프라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먹었다 하면 해내고야 마는 국민들의 성원과 지난 두 차례의 성공 사례를 발판으로 평창은 동계 올림픽 유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지난 두 번의 도전에서 손에 잡힐 듯한 개최권을 놓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올림픽 유치를 향한 길은 멀기만 했습니다.

12년 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자는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그 과정이 이렇게 험난할 것임을 관련자들이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올림픽 유치라는 숙원 사업이 완성된 지금은 고생을 해야 더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이룬 동계 올림픽 개최

평창이 2010년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한 첫 도전에서 실패했을 때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당시 국제 스포츠계에서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김운용 IOC 위원이 조금만 더 열심히 뛰었더라면 1차 투표에서 밴쿠버에 51대40으로 앞서놓고(다른 경쟁도시인 잘츠부르크는 16표) 최종 투표에서 53대56, 세 표차로 뒤지는 실패는 없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처음 도전 의사를 밝혔을 때 김운용 위원이 "평창을 지지할 IOC 위원은 나를 포함하여 세 명밖에 없다"고 이야기한 것을 감안하면 그나마 선전했다는 이야기도 나왔지요.

평창의 첫 도전이 실패하자 1997년에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유치한 바 있는 무주에서는 "이번에는 우리 차례"라며 도전 의사를 밝혔고, 두 번째 도전에 앞서서는 국내에서 어느 지역이 동계 올림픽 도전권을 쥘 것인가가 큰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국제 무대에서 새로운 도시(지역)의 지명도를 높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므로 한 번 도전한 곳이 재도전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 평창은 2014년 동계 올림픽 개최를 위해 뛰어들었습니다.

2010년 개최지 결정에서 평창에 한 수 뒤진 잘츠부르크와 2파전이 예상될 때만 해도 평창이 유리한 듯이 보였으나 뒤늦게 러시아가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뛰어들면서 상황은 예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도시가 있는지조차도 확실치 않은 곳에서 동계 스포츠 기반이라고는 전혀 없이 유치 경쟁에 뛰어들 때만 해도 무슨 돈키호테 같은 도전인가 하는 생각을 가졌지요.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앞장선 러시아는 국가 브랜드를 앞세우고, 더운 나라 과테말라에 인공 동계 스포츠 시설을 설치하는, 약간은 무모하다 싶은 노력을 하면서 평창을 쫓아왔습니다. 그리하여 평창은 1차 투표에서 36대34(잘츠부르크는 25표)로 소치를 앞섰지만 최종 투표에서 51대47, 네 표차로 또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보다 앞서 실사단이 평창을 방문했을 때 눈이 펑펑 내리는 날씨에 태극기를 비롯한 많은 깃발을 들고 이들을 환영해 주던 평창 주민의 모습이 외국 방송에 소개되는 것을 보며 '날씨도 평창 주민들의 소망을 들어 준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강대국의 논리에 국제 사회가 빠져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으며 두 번째 도전에서도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두 번의 도전에 실패한 직후 외국의 한 IOC 위원은 "평창이 동계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려면 모든 걸 바꾸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충고인지 비판인지 모를 말을 남겼습니다. 8년간의 도전은 평창의 모습을 꽤나 바꾸어 놓았지만 그 덕분에 알펜시아리조트는 강원도의 애물단지가 되어 다른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지방자치단체 파산이 강원도에도 현실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져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평창은 세 번째 도전을 선택했고, 결과는 성공이었습니다. 동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겠지만 문제는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 만큼 개최권을 얻기 위해 발휘한 노력을 성공적인 개최에 쏟음으로써 30년 전 서울 올림픽과 16년 전 한일 월드컵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힘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AP=연합뉴스

좌절과 영광을 맛본 나라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두 번의 올림픽이 취소된 후, 1948년 1월에 개최된 동계 올림픽은 중립국인 스위스의 생모리츠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생모리츠로서는 1928년에 이어 두 번째 개최였으며, 개최지로 결정된 것이 1946년 9월의 일이었으니 1년 4개월 만에 큰 행사를 치른 셈입니다.

1952년부터는 개최 신청을 한 후 경쟁을 통해 개최지를 결정해 오고 있습니다. 만약 평창이 세 번째 도전에서 또 동계 올림픽 유치에 실패했다면 네 번째 도전에 나설 수 있을까요?

해답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네 번의 도전 끝에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나라는 한 나라도 없다는 점에서 평창의 실패는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소치처럼 첫 도전에서 강력한 경쟁자 평창을 물리치고 유치에 성공한 경우가 있고, 1960년의 스쿠아밸리처럼 거주민이라고는 단 한 명밖에 없는 불모지에서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고, 그 때부터 모든 시설을 준비하여 동계 올림픽을 치른 예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실패를 거듭하다 결국을 유치를 포기해 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동계 올림픽 개최를 위한 도전에서 좌절을 맛본 대표적인 나라는 스웨덴입니다. 이웃 나라 노르웨이는 1952년과 1994년 동계 올림픽을 각각 오슬로와 릴리함메르에서 개최했지만 스웨덴은 여섯 번의 도전을 모두 실패로 장식했습니다. 1984년에 동계 올림픽 후보지로 나선 고텐부르크는 3위에 그친 후 1988년에는 캘거리에 맞서 2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역부족을 실감하고 물러나야했습니다.

후보지를 팔룬으로 바꾼 스웨덴은 1992년에 세 번째 도전에 나섰지만 프랑스의 알베르빌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동계 올림픽 개최의 염원을 품고 스웨덴의 세 번째 후보로 나선 곳은 외스트순드였습니다. 1994년 올림픽 개최지 결정 직전까지만 해도 외스트순드의 개최지 결정이 유력해 보였으나 45대39로 막판에 릴리함에르에게 역전당하고 말았습니다. 외스트순드는 1998년과 2002년에도 후보로 나섰으나 각각 3위와 공동 2위에 머물면서 스웨덴은 총 여섯 차례의 도전에서 실패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외스트순드처럼 세 번의 실패만 맛보고 물러난 도시로는 스위스의 시온을 들 수가 있습니다. 1976년 개최지 후보로 나섰다가 인스부르크에 밀려 2위에 그친 시온은 2002년과 2006년에도 후보로 나섰으나 솔트레이크시티와 토리노에 밀려 세 번의 도전 끝에 현재는 도전을 중지한 상태입니다.

핀란드의 라티도 세 번의 실패를 맛본 곳입니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 3회 연속 동계 올림픽 개최를 위해 도전했으나 모두 탈락했고, 특히 1968년에는 선거에서 한 표도 얻지 못함으로써 개최지 결정 투표에서 유일하게 한 표도 얻지 못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핀란드는 라티 대신 탐페레를 내세워 1976년 동계 올림픽 개최에 나섰지만 3위에 그친 후 약 40년간 동계 올림픽 개최에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실패 끝에 유치에 성공한 대표적인 나라로는 캐나다를 들 수 있습니다. 1988년에 캘거리, 2010년에 밴쿠버에서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 캐나다이지만 캘거리 동계 올림픽 이전에 여섯 차례의 실패를 거두어야만 했습니다.

1956년에 퀘벡, 1964년과 1968년에 캘거리, 1972년에 반프, 1976년과 1980년에 밴쿠버가 각각 개최에 실패하면서 동계 올림픽 유치 경쟁에서는 실패만 하던 캐나다는 6전 7기 끝에 1988년 동계 올림픽을 캘거리로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2년 만에 다시 한 번 밴쿠버에서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으니 과거의 도전 실패에 대한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을 것입니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 대한 기대

1980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인 미국의 레이크플래시드는 1948년, 1952년, 1968년 등 세 번에 걸친 도전에서 실패를 했던 곳입니다. 동계 올림픽 역사상 유일하게 네 번의 도전을 했던 곳이며, 32년 만에 개최의 숙원을 이루었습니다.

레이크플래시드는 이보다 훨씬 앞선 1932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 곳이기는 하지만 당시는 하계 올림픽 개최국에서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경쟁 없이 대회를 유치했고, 1950년대 이후 올림픽 개최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후로는 세 번의 실패만 기록한 바 있습니다.

동계 올림픽 실사단이 이야기한 것처럼 상전벽해가 될 만큼 12년간 준비를 잘해 온 걸 생각하면 그동안의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다시 도전하여 레이크플래시드가 그랬던 것처럼 네 번째 도전에서 성공을 해야겠지만 아마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웃으면서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으니 세 번의 도전 만에 이룬 성공이 값지고 달콤한 것이기는 분명합니다.

이미 강원도는 빚더미에 올라 있고, 2018년 올림픽에서 중추 역할을 해야 할 알펜시아리조트는 파산 지경에 몰려 있습니다. 환경 문제도 남아 있고, 20조 원 (혹은 60조 원이 넘는다는) 경제 효과는 잘못하면 20조 원 혹은 그 이상의 빚더미가 될지도 모를 위험 가능성도 있습니다.

1976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몬트리올이 빚으로 수십 년간 허덕인 것을 감안하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흑자로 마무리한 피터 위베로스 조직위원장의 능력이 대단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올림픽은 적자일 수밖에 없다는 시각을 바꿔 놓았으니까요.

1968년의 멕시코시티 이후 두 번째로 선진국이 아닌 나라에서 개최된 1988년 하계 올림픽을 통해 온 나라가 한층 업그레이드되는 기회를 가진 것처럼 서울 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개최되는 평창 동계 올림픽을 통해 대한민국은 지금부터 해결해야 하는 산적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한 후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를 것을 기대해 봅니다.

전 세계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할 정도로 성대한 축제 분위기의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국가의 브랜드를 한층 끌어 오렸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거리 응원을 비롯하여 한국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 줌으로써 세계인들에게 대한민국의 존재 가치를 부각시켰듯이 2018년에는 동계 올림픽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한국인들이 지닌 가치와 능력을 세계에 자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최근에 동남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상륙한 한국 문화가 한류 바람을 몰고 오는 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21세기에는 우리나라가 지구상에서 작지만 더 중요하고 관심을 끄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2018년에 평창에서 개최되는 동계 올림픽도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더 부각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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