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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비디오방? 등록금 올리는 '놈'보다 미운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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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학=비디오방? 등록금 올리는 '놈'보다 미운 '분'은…

[프레시안 books] 빌 스무트의 <가르친다는 것은>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아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가르치는지 늘 궁금해 한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요즘같이 하루가 다르게 학생들의 감수성이나 문화가 변하는 시대에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수업을 하고 싶다면 도대체 잘 가르친다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그 비법을 전수받고 싶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수업을 하러 교실에 들어갈 때 늘 다른 교실을 힐끗 쳐다보곤 한다. 저 선생은 어떻게 하고, 이 선생은 어떻게 하는지 엿보면서. 그러나 대부분 다 비슷하다. 수업 종이 울리고 출석을 부르고 나면 강의실은 거의 대부분 불이 꺼진다. 그리고 파워포인트로 만들어진 수업 자료가 화면에 비추고 학생들은 영화관 같은 곳에서 수업을 '감상'하기 시작한다.

학생들에게도 가끔 물어보곤 한다. 다른 수업은 어떤지, 어떻게들 가르치는지. 그러나 재밌거나 많은 걸 배웠다고 말하는 친구보다는 "재미없다"는 반응이 많다. 어떤 선생들은 10년 전에 만든 파워포인트 자료를 똑같이 보여주기도 하고 어떤 선생들은 그냥 책을 읽는다고 한다. 비싼 등록금 내고 책보면 다 나오는 걸 왜 수업 때 그대로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학생들에게 이번에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등록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했더니 등록금 자체의 문제만큼이나 많이 쏟아져 나온 것이 재미없는 수업에 대한 성토였다. 성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수업을 시작할 시간은 지났지만, 다른 학생들은 떠들고 있고 나를 포함한 몇 명들은 "왜 안 오지?" 하는 말과 "담배나 피고 오자" 하는 말로 나가서 담배를 피고 온다. 그리고 잠시 뒤 들어오는 교수님은 바로 출석 체크를 하시며 수업을 진행했다. 순간 "모야 이사람? 10분이 넘어서 들어와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바로 수업을 하려고 하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으로 쉽게 넘어갔지만, 몇 차례 수업이 지나면서 점점 불만이 커져갔다. "아무리 바빠도 수업 시간은 지켜야 되는 게 학생과 교수의 약속이 아닌가요?" 하고 따지고 싶었지만, 말을 했다가 학점에 지장을 줄까봐 차마 말을 못했다. 수업 시간을 지키지 못한 불만도 있지만, 가끔은 조교가 와서 동영상을 틀어주고 갈 때가 있다.

그리고 끝날 때 쯤 들어와서 출석 체크를 하고, 이럴 거면 집에서 따로 듣고 말지 이런 수업 때문에 내가 복학한 것이 아닌데. 저 무책임한 수업 방식은 대체 뭐냐고! 정말이지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이런 수업을 듣고 있는 자체가 안타까웠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학생이 있었는지 이미 수업을 포기하고 안 들어오는 학생들도 몇 있었다. (성준, 아무개 대학)


몇 년 전 다른 대학에서 같이 공부한 한 학생은 대학 수업이 고등학교보다 더 못하다고 난리였다. 리포트를 내더라도 피드백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으니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잘하는지를 알 도리가 없다. 인문·사회과학이라는 것이 워낙 정답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성적 처리에 불만이 없을 수 없지만 그래도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반응도 많았다.

이런 모든 것들이 사실 이번 등록금 문제에서 수구 보수 언론이 물 타기를 시도하는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다. 사실 부실 강의, 부실한 학습 시설 등을 성토하며 대학을 문제 삼는 것으로 한국 사회에서 등록금이 왜 문제가 되고 있고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회피해버리는 수구 보수 언론의 전략은 학생들에게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사실 가르치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할 말이 많다. 얼마 전 십수 년 만에 절친했던 고등학교 동기들을 만나 술 한잔하는 자리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다들 지방 대학 교수였다. 교수 생활하는 것의 괴로움을 한껏 토로하다가 결국 이야기는 연구 업적으로 넘어갔다. 연구 업적을 쌓는 방법에 대한 노하우를 서로 서로 전달해주며 형식적인 업적 타령에 대해 불만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이야기는 의외의 자리에서 끝났다. 올해 조교수 승진 심사를 앞둔 한 친구가 한국에 돌아와 이제 막 교수가 된 친구에게 한 조언이었다.

"그러니까, 학생들을 만나면 안 돼. 얘들 챙기다보면 내 연구 업적을 챙길 시간이 없어. 학생들 아무리 챙겨봤자 그건 평가에 반영이 안 되거든. 그러니까 너도 학생들 만나지 마."

내가 알기로는 이 두 친구 모두 학생들을 챙기려고 무지 애를 쓰는 교수들이었다. 그런데 승진 심사를 앞두고 학생들 챙길 시간에 요즘 학회지 동향이 어떤지를 파악하고 그 추세에 맞춰 연구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생존 노하우'가 전수되고 있는 셈이다.

대학이, 학교가, 가르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학생은 교수를 탓하고, 교수는 학생을 회피해야 하는 이런 황당한 상황이 반복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야기는 다시 학습 열의가 없고 동기 부여가 되어 있지 않으며 공부에 몸이 만들어져 있지 않은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졌다. 또 다들 지방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고민이 심각했다. 누구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영웅호걸로 만드는 것이 군자의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했지만 이들이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공부가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지였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빌리면 가르치는 것은 '목숨을 건 도약'이다. 상품의 가치가 사전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교환된 결과로 주어지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자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더구나 배우는 것의 즐거움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공부의 즐거움을 가르치는 것은 한 번도 시장에 나와 보지 못한 사람에게 시장을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이것이 목숨을 건 도약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애들을 만나면 안 돼' 하고는 바로 '그래서 넌 어떻게 가르치냐?' 하는 물음으로 도돌이표처럼 다시 돌아갔다. 여전히 가르친다는 것이 문제였다.

▲ <가르친다는 것은>(빌 스무트 지음, 노상미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빌 스무트의 <가르친다는 것은>(노상미 옮김, 이매진 펴냄)은 미국에서 잘 가르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그들이 생각할 때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잘 가르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모았다. 그러나 이 책은 잘 가르치는 사람들의 노하우만 모은 매뉴얼 북이나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그들의 체험을 모아놓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도대체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가르치고를 넘어서 가르친다는 것 자체에 대해 사유하고 깨닫게 해주려고 애쓰는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체험이 아닌 경험에 대한 책이다. 당신은 가르치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있는가? 이 책이 던지는 질문과 가치는 여기에 있다.

경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체험과 어떻게 다른가? 이에 대한 해답 중의 하나는 공교롭게도 첫 번째 인터뷰에서 나온다. 그것은 '장소'의 문제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교실에 들어설 때 학생들은 그를 그 장소에 걸맞은 사람으로 즉각적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은 교실에 진정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교실에 진정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교실은 스쳐지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이다.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터전을 파괴하고 그것을 실험실로 대체하였다. 역설적으로 근대의 경험주의에는 경험이 파괴되어 있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경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이 아니다. 경험이란 내가 살아가는 이 터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기술과 지혜를 발견하고 개발하고 전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경험주의는 삶의 터전을 하나의 실험실처럼 여기면서 이리저리 조작하여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으로 경험을 만들어버림으로써 경험 자체를 파괴해버렸다. 장소=삶의 터전의 파괴는 결국 경험의 파괴로 이어지고 오로지 우리의 삶은 소비적인 체험으로만 채워지게 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가장 망가져버린 것이 바로 교실이다.

누가 교실을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 모두 교실은 실험실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니 이렇게 삶의 터전에서 실험실로 바뀐 교실에서 우리는 불을 끈 채 파워포인트 자료로 지식을 전시하고 전수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지 않는가? 이 교실에서 경험은 파괴되고 전달되지 않는다.

교실에서 경험이 어떻게 파괴되어버렸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에릭 마저 교수의 사례이다. 그는 항상 학생들에게서 좋은 강의 평가 점수를 받았기에 자신의 강의가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강의라고 생각해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강의에서도 학생들이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뉴턴의 3법칙은 줄줄줄 외우는 학생들이 막상 그것을 실생활에서 발견하고 해석하는 문제에서는 거의 대부분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물리학을 추상적으로는 공부할 수 있었지만 일상생활에 적용하면 연관을 못 시키는 것이다. 오자와 마키코는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박동섭 옮김, 서현사 펴냄)라는 책에서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학교는 학습을 하는 장소인 동시에 생활을 하는 장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것과 만나면서 천천히 생활 체험을 쌓아 가지 않으면 아이들은 사는 힘을 충분히 익힐 수가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1+1=2"이고 "2/2=1"이라는 기호학적 사고, 개념적 사고에만 과도하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살아가야 하는 문제로는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릭 마저 교수의 인터뷰에서는 체험을 강조하면서 경험이 죽어버린 지금 교육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나온다.

'하면서 배운다'기보다는 '생각하면서 배운다'고 말하고 싶군요.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전국을 돌며 과학 교육에 대해 강연을 하면서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실습' 이야기를 하더군요. 학생들이 아주 엄격한 지시 사항을 준수하면서 실험을 하는, 그러니까 이걸 여기다 붓고 미터기를 저기까지 돌리고 숫자를 기록하라고 시키는 그런 실험 말입니다. 그건 실제로 학생이 하긴 하지만 머리를 쓰는 건 아니죠. 머리를 써야죠. (89~90쪽)

이게 바로 체험과 구별되는 경험이며, 실험과 구별되는 경험이다. 역설적으로 개념적 사고, 기호학적 사고야말로 추상적인 사고 능력을 키워주는 것 같지만 마저 교수가 보기에 이건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니다. 자동인형에 가까운 것이다. 마치 가이드북을 들고 여행을 떠나 그 자리에 아직 그 유적이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을 가이드북대로 확인하는 것과 같아진 것이 실험이다. 여기서는 사유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 물리학이건, 체육이건, 인문학이건, 사유를 촉발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의 장소, 그리고 그 삶의 터전에서 나오는 경험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 책에서 갑자기 인터뷰의 중간에 불쑥 등장하는 게 하나 있다. 미국에서 시행 중인 '학습 부진아 대책법'이다.

"No Child Left Behind"라고 불리는 이 법은 (1) 결과에 따른 책임 규명 강화, (2) 유연성과 지역 자치의 증가, (3) 유형성이 검증된 교육 방법에 대한 강조 (4) 학부모의 선택권 강화를 골자로 해서 읽기와 수학 과목은 초등학교 3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까지 각 주의 학업 기준에 의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각 학교는 매년 적정 수준 이상의 학업 성취를 증명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 이 책에서 인터뷰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커리큘럼이 훨씬 규격화되고 교사의 자율성은 줄어들고 진도를 따라가야 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다른 교육 방법은 불온시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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