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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힘'을 가지게 된 중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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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힘'을 가지게 된 중도파

[해방일기] 1946년 7월 1일

1946년 7월 1일

좌우 합작 노력을 지원하는 미군정 측의 입장을 살펴보았는데, 1946년 여름에 이남 정치세력들은 어떤 자세를 세우고 있었는가? 서중석은 좌우 합작 노력의 배경으로 국내 정국을 이렇게 분석했다.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387쪽)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로 돌아가자 남한 정국에는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첫째, 중경 임시정부 추대 운동을 폈던 일부 극우 세력은 테러 활동과 반소 반공 선전을 강화하면서 분단을 촉진하게 되는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을 폈다. 이승만의 6·3 정읍 발언은 이면에서만 펴오던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 일반에 공표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둘째,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분열·탄압 정책을 강화하고 좌우 합작을 권유하였던 바, 좌익 중심의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하였던 박헌영-조선공산당은 신전술을 채택하여 좌우 합작을 반대하면서 좌경 노선으로 선회하였다. 미군정의 좌익 억압 정책과 이에 대한 좌익의 대응은 조선정판사 사건, 국대안 파동 등을 낳았고, 좌익의 좌경 노선은 민중의 누적된 불만과 얽혀 9월 총파업, 10월 항쟁으로 나타났다.

셋째, 좌우 합작에 의한 민족 국가 건설을 최우선적인 과제로 삼는 통일 전선 세력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와 그 직후의 단정 수립 운동을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을 가져오게 하는 민족적 위기로 파악하였다. 이 시기에는 미소 양군이 남북을 점령한 상태에서 미소 양군을 내보내고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면, 좌익 중심의 정권 수립 형태도, 우익 중심의 중경 임시정부 추대에 의한 정권 수립 형태도 지양하고 좌우가 합작하여야만 한다는 여론이 전보다도 더욱 고조되었다.


글 끝에서 합작을 향한 여론이 고조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합작을 바라는 여론은 늘 있었고, 이제 그 표현이 활성화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미소공위의 성공을 바라는 여론이 바로 합작을 바라는 여론이었다. 미소공위 무기정회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 여론이 적극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합작을 바라는 중도파에게는 현실적인 힘이 없었다. 조직력을 가진 공산당과 자금력을 가진 한국민주당은 중도파에게 끊임없이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자기편이 되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몰아붙였다. 2월에 민주의원과 민전이 결성될 때 거의 모든 중도파 인사들이 한 쪽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정이 좌우 합작 지원에 나섬으로써 중도파가 비로소 현실적 힘을 갖게 되었다. 공권력은 미군 진주 이래 극우파에게 유리한 쪽으로 내내 작용해 왔는데, 6월 30일 하지의 특별 성명을 계기로 공권력의 주력이 중도파를 뒷받침해주게 된 것이었다.

극좌도 극우도 좌우 합작을 정면으로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군정청의 지원을 받게 된 좌우 합작 노력을 힘으로 찍어 누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지지하는 시늉은 하면서도 뭐든 트집 잡고 싶은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어제 소개한 한민당 성명에서 "각 단체 혹은 개인이 합작의 원칙 또는 조건을 발표 또는 제시함은 좋으나 그것으로써 타방에서도 합의한 것처럼 인상을 주게 하는 것은 대중을 현혹케 하고 합작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말도 그런 것이다. 한편 공산당과 민전은 '입법기관'을 만들려는 미군정의 의도에 의혹을 표했다. 7월 3일 박헌영의 기자 회견과 이튿날 민전 의장단의 기자 회견에서 그런 의혹이 표출되었다.

박헌영 기자 회견

(문) 여운형, 김규식 양씨의 좌우 합작 공작에는 어느 정도 기대되는가?
(답) 이 문제에 대하여는 양씨의 통일에 대한 원칙이 얼마나 서로 접근되었느냐가 중심 문제이다. 아직 이 점이 발표되지 않은 만큼 그 기대의 정도를 말할 수 없다. 원칙 없는 통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그 통일의 원칙은 무엇인가? 첫째 3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여 미소공위 속개 운동을 대중적으로 강력히 전개할 것. 둘째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소-반공적 파쇼 분자를 제외할 것. 셋째 테러 행동을 즉시 중지하고 테러 단체를 즉시 해체하며, 테러 희생자를 즉시 석방시킬 것.

(문) '입법기관'에는 참가하여 옳지 못한 경향과 싸울 의사는 없는가?
(답) 우리는 통일적 민주주의 정부가 조직되기 전에 입법기관이 조직된다 함은 사실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 문제는 3상 결정에 의하여 우리의 정부 조직의 길이 명료한데, 이러한 군정 연장 강화의 기관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독립신보> 1946년 7월 4일자, <이정 박헌영 연구>(임경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349~350쪽에서 재인용)

민전 의장단 기자 회견

(문) 입법기관 설치안에 대한 소견 여하?
(답) 그 제안의 주지와 성의에는 감사하나 정치적으로 지금 이러한 기관을 설치할 시기가 아니다. 이 안을 그대로 강행한다면 민주의원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문) 민족통일총본부를 어떻게 보는가?
(답) 민족분열총본부로 본다.

(문) 洪命熹 씨 제 3당 출현설에 대한 견해 여하?
(답) 아직 무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잡음과 혼선을 청소하고 통일 공작에의 그 활약을 우리는 기대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7월 5일자)


미군정의 좌우 합작 지원이 '입법기관' 설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6월 30일 하지 특별 성명 때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군정청의 공식적 발표가 7월 9일 하지의 성명서로 나왔다.

"나는 러취 장군이 제의한 조선 미군 점령 지대에 입법기관을 설치하자는 안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받았다. 나는 군정장관과 차안에 관하여 토의하였는데 우리는 이 제안이 조선인을 위한 자주독립 조선의 장래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남조선 주민과 각 정당의 진정한 통일을 기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서 남조선 주민의 복리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는 바이다.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조선에 임시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남조선에 대한 최고의 권력과 최고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합법적 의무인 한 나는 이 제안이 조선인의 복리를 위한 것이며 또 입법기관을 설치할 1계단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기관은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의 1계단이라고 보지도 않을 것이며 또 볼 수도 없다.

이러한 입법기관은 군정청이 남조선에 존속하고 있는 동안에 한하여 존재할 수 있으며 남북조선이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하에 통일될 시에는 차 임시 입법기관은 임시 정부에 이관되어 그 존속이 정지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기초로 조선의 민주주의 정부 발전에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하는 바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기관 설치가 진심으로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의 전체적 지지를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물론 일부 사리를 도모하는 분자들이 통일을 방해하고자 만반수단을 취할 지도 모르나 만약 이러한 분자가 있다면 모든 사람은 그들을 비국민(非國民)으로 인정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10일자)


하지는 입법기관 설치안을 러치 군정장관이 제출했다고 했다. 이 성명서가 나온 직후 러치가 기자회견에서 이에 관한 문답을 나눴다.

(문) 입법기관을 정당 통일 운동의 대행 기관으로 생각하는가?
(답) 절대로 아니다. 이 기관은 정당 융화의 결과로서 될 것이요, 결코 정당을 융화시키려는 대행기관이 아니다. 이 기관은 각 정당이 이곳에서 회합하여 각자의 의견 대립을 원만히 해결하고 서로 융화하게 될 것이다.

(문) 이 기관을 임시 정부의 대행 기관으로 보는가?
(답) 그렇지 않다. 이 입법단체는 임시 정부 수립까지의 단계이어야 할 것이며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에 노력하여 임시 정부 수립의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도록 위원회를 원조할 것이다.

(문) 입법기관은 현 군정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설치하는 것인가?
(답) 전연 그와는 반대이다. 즉 이 기관은 군정기관의 종료를 촉진시키며 임시정부 수립의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문) 이 입법기관은 군정청 현재 직원의 직위를 영구화시키자는 것인가?
(답) 그렇지 않다. 이 기관은 각 정당의 대표를 될 수 있는 데까지 광범위로 참여케 하여 행정관 선발 조치에 대한 광범한 역할을 할 기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문) 조선 정당 지도자들이 서로 합작할 것이라고 믿는가?
(답) 이 질문에는 정당 지도자 자신이 답할 수 있을 것이요, 나는 답할 수 없다. 일반적 협조의 광범한 수단이 있기를 희망할 뿐이요, 조선의 정당 지도자들이 우리의 기대에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리라고 믿는다.

(문) 입법기관의 성능은?
(답) 미국의 국회와 같다. 그러나 최고 결재권이 하지 중장에게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10일자)


좌우 합작을 지원하면서 그 성과로 미군정 당국자들이 바란 것이 이 '입법기관'이었다. 그들은 1945년 11월 20일 랭던이 제안한 '정무위원회'(1945년 11월 19일자 일기) 이래 미군정의 통제를 받으면서 남조선 주민을 대변하는 기구를 만들려고 노력해 왔다. 모스크바 3상 회담 전에 독촉을 그렇게 만들려고 했고, 미소공위 개막 전에 민주의원을 그렇게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미군정의 통제'를 받고 '남조선 주민을 대변'한다는 두 가지 조건이 상치되었기 때문에 이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민의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자기네가 상대하기 쉬운 극우파에게만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민주의원의 실패를 보고 극우파의 한계를 깨달았으니 좌우합작 지원은 그런 대로 민의에 한 발짝이나마 접근하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시적 성과에 대한 미군정의 집착은 좌우 합작 노력에 제약을 가하는 굴레가 되었다. 미군정의 독촉과 민주의원 지원이 실제로 극우파 지원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보아 왔다. 좌우 합작 노력에 대한 극좌의 저항에는 '입법기관 반대'가 가장 손쉬운 명분이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입법의회 선거 결과는 이 명분을 정당화시켜 주게 된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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