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물난리에 전염병…흉흉한 민심의 향방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물난리에 전염병…흉흉한 민심의 향방은?

[해방일기] 1946년 6월 27일

1946년 6월 27일

20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칠 줄을 모르고 연일연야 내리 퍼붓고 있어 전 조선은 이제 수마의 위협 앞에 떨고 있다. 경향 각지에 물바다를 이룬 곳이 한두 곳이 아니며 집 잃고 농토 잃은 동포는 부지기수다. 26일 국립중앙관상대 발표에 의하면 호우는 전 조선적이되 특히 경성의 한강은 박차적으로 증수가 되어 그 유역은 상당히 위험한 형편이다.

(…) 26일 오전 10시 현재 각 지방 雨量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성 174미리
인천 282미리
수원 426미리
부산 66미리
강릉 28미리

이상으로 보아 수원 안성 평택 등이 가장 우량이 많으며 다른 곳은 대개 100미리 이하 정도이다. 그리고 현재 비가 내리는 지역은 38이남 전부와 이북 각지까지 넣어 거의 전국적이다.

경기도경찰부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26일 오전 8시 현재 경기도내 수재 상황은 침수 가옥이 약 3171호를 돌파하고 인명 사망이 75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도 평택은 전읍이 물바다 속에 잠기어 시민의 안위가 매우 염려되며 평택에서만 판명된 사망자가 80명을 돌파하고 있다.

(…) 선로의 유실과 파괴로 거의 전선이 불통이 된 철도의 피해는 24일까지의 것이 판명되었는데 유실 파손 침수된 선로의 연장거리는 실로 수십 킬로에 걸쳐 조선 철도가 시작된 이후 처음 보는 큰 손해이다. 26일의 강우로 피해는 더욱 확대될 것인데 이에 운수부 공무과에서는 전원 동원하여 복구 공사에 착수하고 있으나 초미의 급무인 경부선의 공사만도 약 2주일의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관측된다.

(…) 이번의 폭우로 말미암아 경성과 부산 간의 전화도 26일 아침 8시 50분경부터 고장으로 불통되었는데 복구는 언제부터 될지 아직 알 수 없다 한다.

(<서울신문> 1946년 6월 28일자)

신문 기사만으로 당시의 피해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오늘(2011년 6월 27일)까지 여러 날 내린 비가 전국적으로 40~100밀리미터, 일부 지역에 200밀리미터라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강우량이었지만,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이 홍수를 "을축년 이래의 최대 홍수"라고 했다.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는 7월 초순부터 9월 초순에 걸쳐 네 차례의 홍수가 겹쳐진 것이었다. 인명 피해 647명, 가옥 유실과 붕괴가 2만3000호, 침수가 4만6000호에 달했던 이 홍수 중 한 때는 인도교에서의 한강 수위가 11.66미터까지 올라와 남대문 밑에까지 강물이 찰랑거렸다고 한다.

1946년의 홍수에서 한강 인도교 수위는 10.10미터까지 올랐었다고 한다. 기상 자료를 살펴보지 못했지만, 강우량 자체는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겪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싶다. 행정력이 약화된 상태와 주거 조건이 극히 열악한 많은 유민의 존재가 피해를 격화시켰을 것 같다. 그리고 5월 하순 확산이 시작된 콜레라가 6월 하순의 장마를 계기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장마는 호열자 유행에도 큰 영향을 주어 최근 2, 3일 내로 환자 수가 부쩍 늘고 있다. 지금 가장 심한 곳은 동진강 유역인 전북의 김제, 부안, 정읍의 각 지방과 경북의 대구, 영천 지방인데 (…) 26일 현재 남조선 전부의 환자 발생 수는 지난 22일 이후 300명이 더 늘어 1611명이며 그중 사망자는 48%인 776명인데 이 새 환자는 거의 전부가 전북과 경북 지방의 사람들이다. (<자유신문> 1946년 6월 27일자)

며칠 후 신문을 보면 대구 지역의 콜레라 사태가 부쩍 심각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경상북도로부터 운수부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경북 일대는 장마 끝에 호열자가 더욱 창궐OO되고 있음으로 경상북도에서는 6월 28일부터 도지사의 명령으로 금지 구역을 설정하여 여행자들은 이 금지 구역을 통과할 수는 있으나 동 구역 내에 하차는 못하게 되었다.

금지 구역 : 대구, 달성, 경산, 영천, 경주, 영덕, 영일, 청도, 선산, 김천, 예천, 문경.

(<자유신문> 1946년 7월 2일자)

6월 13일자 일기에서 인용한 대구의 의사 박희명의 회고도 약품 공급 등 당국의 대처가 미흡한 문제를 보여주는데, 콜레라는 환자만이 아니라 대다수 주민의 생활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서울 시내 호열자 환자 총수의 3분의 1을 점하는 마포구의 호역 상황! 마포구에는 7일 현재로 진성, 의사를 합하여 11명인데, 호열자 환자가 발생한 집 근처는 교통 차단을 하고 있으므로 환자 아닌 사람들이 식량이 없어서 기아 상태에 빠져 있다는데 당국에서는 아직 이에 아무런 조치도 없고 또 환자가 발생하여도 즉시 환자를 처리 않고 2, 3일간이나 발병지에 내버려두고 있는 일이 많으므로 마포구 주민은 위생 당국에 대한 불만이 날로 높아가고 있다 한다. (<자유신문> 1946년 7월 8일자)

민심은 생활 조건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미군정의 점령 정책을 정치적으로 비판할 동기와 능력을 가지지 않은 남조선 지역 일반 민중도 인플레와 식량난을 비롯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미군 통치에 대한 불만을 키우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6월 하순의 수해와 그에 이은 콜레라 사태로 생활 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군 통치에 대한 저항이 10월에 대구에서 터져 나오게 되는 데는 콜레라 피해가 가장 심한 지역이었다는 조건도 작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6월 하순의 장맛비 속에 이삿짐을 싸는 사람들이 있었다. 6월 25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워싱턴17일 UP발 조선] 소련이 남조선 미군 점령 지대에 주재하고 있는 소련총영사를 철퇴시킨 것은 미국이 북조선 소련군 점령 지대에 미국 영사관의 개설을 요구한데 대하여 소련이 반대의 회답을 한 것이라고 당지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소련 당국과 남조선 미군 사령관 존 알 하지 중장은 미군 점령 지대에 있어서의 소련 영사의 활동에 관하여 논의한 바 있었으나 하지 중장은 미국 정부에 대하여 다만 일반적 불만을 통고하였을 따름이고 그가 불만으로 여기는 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적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 중장은 소련 영사관 당국이 미군 점령 지대에 있어서의 좌익 운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뜻을 말하였다 한다. 6주일 전 미국은 소련에 대하여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북조선에 영사관 설치를 허가할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그때부터 고려는 하고 있으나 아직 미군 점령 지대에도 영사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미국의 소련에 대한 요구는 현재 그대로 있으나 회답은 없다. 이리하여 소련이 미군 점령 지대에 있는 영사관을 폐쇄하기로 결정한 것은 소련이 간접적으로 '노'라고 대답한 것으로 관측된다.

◊ 소련 영사관원의 담

미소공위 재개를 촉진하고자 오랫동안 분열 상태에 있던 좌우 정계도 요즈음 합작의 기운이 농후하여져 정계가 명랑화하고 있는 차제에 돌연 외전은 24일 소련 서울 영사관 철퇴설을 전하여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데 영사관원은 방문한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문) 철퇴설이 있는데 사실인가?
(답) 사실이다.
(문) 이유는?
(답) 미 주둔군 당국에 물어보라.
(문) 언제 가는가?
(답) 23일에 우리 철퇴를 원조해 주기 위하여 군인 수 명이 와서 철퇴 준비를 하고 있으니 26~7일경에는 가게 될 것이다.
(문) 평양으로 가는가?
(답) 모스크바로 간다.
(문) 영사관은 어느 때부터 두게 되었는가?
(답) 1925년부터 두게 되었고 1884년부터 1924년까지는 공사관을 두었었다.
(문) 관사 관리는 누가 하는가?
(답) 전부터 여기에 있던 관원은 전부 가고 새로 집 보는 사람이 본국으로부터 와서 관리하게 되었다.
(문) 미소공동위원회는 재개되는가?
(답) 틀림없이 가까운 장래에 될 것이다. 영사관 철퇴와 공동 재개와는 관련성이 없으니 염려하지 말라.

박헌영이 해방 직후 서울에 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소련 영사관이었고 이후 소련 영사관의 외교적 특권은 박헌영의 활동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 당시 소련 부영사 샤브신의 아내 쿨리코아가 이렇게 증언했다고 한다.

샤브신은 해방 초기부터 박헌영이 월북한 1946년 10월까지 14개월 동안 서울에서 매일 한두 차례씩 의무적으로 만났습니다. 이 기간 중 샤브신은 수차례 박헌영을 비밀리에 평양에 보내 소군정과 김일성 진영과의 비밀 회동을 갖게 했고 박의 서울 집회 등에도 반드시 참석, 후견인의 역할을 했지요.

샤브신은 미군정 등의 눈길을 피해 공원 등지에서 만나 자신의 승용차 뒷좌석에 박헌영을 태운 뒤 모포로 씌워 영사관 밀실로 데리고 가 밀담을 했습니다. 이들이 주로 논의했던 사항들은 김구-이승만 등 우익 진영과 미군정의 동향, 공산당의 활동 방향, 그리고 모스크바 중앙당의 지시 전달 등이었습니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앙일보사 특별취재반 지음, 중앙일보사 펴냄, 285쪽)

공산당에 대한 소련 영사관의 지원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언이다. 그런데 이 증언의 주인공 쿨리코아와 같은 인물로 보이는 파냐 이사악코브나 샤브쉬나의 <1945년 남한에서>에는 1946년 8월까지 서울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고 미군과 조선 우익에 대한 극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주는데, 영사관 철수에 관해서는 아무 기록이 없다. 공산당에서도 이와 관련된 미군정 비난이 없었다. 6월 26일 정례 기자 회견에서 박헌영의 논평만이 전해진다.

소련 당국이 그 총영사를 서울서 철수시키는 이유가 미-소 외교에 관련된 듯한 점도 UP통신이 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문제의 중심점은 소련이 3상 결정을 충실히 실행하자 함에 있다고 보입니다. 만약 앞으로 군정을 연장한다든가, 그것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간다든가, 밖으로 외교 기관을 신설한다든가 하는 것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하루라도 속히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을 실현시키는 사명과는 다른 노선입니다. 기존한 외교 기관을 철수하더라도 이 3상 결정 실천에 모든 것을 집중하여, 우리 정부 조직을 속히 실현시키려 한 것이 소련의 이번 조치의 본의일 것입니다. (<조선인민보> 1946년 6월 27일자, 임경석 <이정 박헌영 연대기> 343쪽에서 재인용)

소련 영사관의 폐지가 미국 측의 압력에 의한 것이리라 짐작하고 공산당과 소련 측의 강한 반발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뜻밖일 만큼 영사관 철수는 조용히 이뤄졌다. 샤브신 부영사 등 영사관 측의 박헌영 지지가 너무 편파적이어서 이북의 소련군 및 북조선공산당과 손발이 맞지 않는 문제가 생겼던 것은 아닐까? 지금은 석연치 않은 채로 일단 철수 사실만 확인하고 넘어가 둔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