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소장 엄구호)는 지난 4월 6일부터 5월 25일까지 총 8회에 걸쳐서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 시민 강좌를 진행했다. 이 강좌는 러시아·유라시아 전문 연구 기관을 표방한 아태지역연구센터가 고선지, 혜초 등 역사 속 인물을 통해서 실크로드의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마련되었다. <프레시안>과 아태지역연구센터는 매주 한 차례씩 이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유라시아 대륙의 일원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할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관련 기사 : "'빨갱이', '스킨헤드'의 나라? 美·中 견제할 새 파트너!") |
고구려 멸망
고구려 유민 고선지가 중앙아시아 무대에 등장했던 이유는 고구려 멸망 때문이다. 고구려 멸망은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그의 두 아우 남건·남산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됐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남생과 그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두 아우와의 권력 다툼이었다.
남생이 당을 끌어들여 권력을 되찾으려다 평양성에서 대치하는 상황에서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열어 줌으로써 고구려가 멸망했다. 평양성 안의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당으로 잡혀갔다. 이때 당으로 잡혀간 고구려인 모두 노예 신세였다. 반면 남생과 승려 신성은 당으로부터 높은 벼슬을 받았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
고사계는 고구려 멸망으로 하서(河西, 오늘날 武威)로 끌려왔다. 고사계는 고선지의 아버지이나, 이에 관한 기록은 우리 역사에 없다. 거의 동시대 신라 혜초에 관한 기록도 우리 역사 기록에 없다.
고선지에 대한 기록은 <신·구당서>를 위시해 당 시대 역사 기록에 모두 기재되어 있다. 한 예로 <구당서>의 '고선지전'에 의하면 "고선지는 본시 고구려인이다. 아버지는 사계이며, 처음에 하서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워 사진(四鎭) 십장, 제위장군이 되었다." 고사계가 고구려에서 머나먼 하서로 끌려와 군인이 되었다.
고구려인들이 당에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인이다. 고사계는 토번과 돌궐을 제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고선지 그는 누구인가?
고선지는 외모가 사나이답고 건장한데다 기마와 궁술이 능하였다. 게다가 용감하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아버지를 따라 안서(安西)로 이주했다.
고선지에 관한 첫 기록은 고사계와 하서부터였다. 그때 고선지 일가는 고구려인이 하서로 끌려올 때 함께 잡혀왔다. 고구려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선지는 외모가 출중하면서 군인의 자질을 모두 겸비하였다. 하서에서 안서로 이주 한 후, 고선지가 아버지 공로로 유격장군이 된 것이 아니라 군인의 몫을 제대로 감당한 결과였다.
나이 20여 세의 고선지
안서에서 나이 20여 세에 고선지는 장군이 되었다. 이로써 고선지는 아버지와 관품(官品)이 같았다. 그러나 안서절도사 전인완(田仁琬)·개가운(蓋嘉運) 휘하에서는 높은 벼슬을 얻지 못했다. 그 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察) 때부터는 천산(天山)산맥 이남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할 때마다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매번 발탁되었다.
고선지의 최초 독자 전투는 달해부(達奚部) 전투였다. 개원(開元, 713〜741년) 말 달해부 반란으로, 현종은 안서사진절도사 부몽영찰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이때 고선지는 기병 2000을 거느리고 부성(副城)에서 북방으로 나아가 능령(綾嶺) 아래서 적을 궤멸하는 개가를 거두었다. 이 전투가 고선지의 첫 독자적인 전투였다.
고선지의 지역 사령관
부몽영찰의 상주로 달해부 격파로 공로에 대한 상주로 고선지는 안서사진 가운데 토번 침공이 빈번한 우전진(于闐鎭)을 맡았다. 우전진수사(鎭守使) 고선지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에서 토번을 막았을 뿐 아니라 우전 치안에 큰 공을 세웠다.
한편, 우전국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우전국과 같은 나라다. 혜초가 우전국을 순례했을 때는 우전진수사 고선지보다 10여 년 앞선다. 고선지는 첫 지역 사령관으로서 토번을 제압했다. 그 결과 우전진수사 고선지는 타클라마칸 사막 동북의 언기(焉耆)진수사로 승진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안서사진절도사 부몽영찰이 토번 연운보(連雲堡)를 함락하고 개선한 고선지에게 욕을 퍼부으며 "개의 창자를 먹을 고구려 놈, 개똥을 먹을 고구려 놈! 누가 너에게 우전사 자리를 얻게 상주해 주었냐?", "누가 네게 언기진수사를 얻게 해주었냐?", "누가 네게 안서부도호사를 얻게 해주었냐?", "누가 너에게 안서도지병마사를 얻게 해주었냐?"고 계속해서 물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정리하면 고선지는 우전진수사에서 언기진수사가 되었고, 다시 안서부도호 후에 도지병마사가 되어서 안서도호부의 제2인자가 되었다. 부몽영찰의 말투에서 보듯 고선지는 패망한 고구려 유민이라는 이유로 부몽영찰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그런 고선지가 계속해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사령관으로서 임무수행이 출중한 결과였다.
고선지의 토번 연운보 원정
현종은 747년 토번 정벌을 고선지에게 비밀히 명령했다. 현종의 군사 작전은 토번과 아랍 제국의 연합을 깨뜨려야만, 당이 서방에서의 잃은 패권을 되찾을 수 있는 군사 조치였다.
고선지가 토번으로 출정하기 전의 토번과 당의 상황은 ‛토번 옆의 소발률국(小勃律國) 왕은 토번으로 불려가서, 토번 공주를 왕비로 맞게 되자, 토번 서북의 20여 나라가 토번에 굴복하니, 이들 나라가 당에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그 후 전인완·개가운·부몽영찰이 여러 차례 토번을 토벌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현종은 특별히 칙서를 내려 고선지를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삼아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번을 토벌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현종의 특명에 의한 고선지 출정이었다. 고선지는 연운보 점령하고 탄구령(坦駒嶺)을 지나 소발률국(小勃律國)을 정복하였다. 고선지는 소발률국 정벌을 위해 탄구령(해발 4600미터)을 횡단하였다. 서양의 나폴레옹이 넘은 알프스 산맥이 2500미터였던 사실과 비교한다면, 고선지가 나폴레옹보다 약 2배 높은 힌두쿠시 산맥의 坦駒嶺을 넘은 셈이다.
고선지에 의한 토번 연운보 함락과 소발률국 점령으로 불름(拂菻, 오늘날 다마스쿠스)을 비롯한 72국이 당에 복속했다. 고선지의 작전 성공으로 서역 지배권이 토번에서 당으로 이양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었다.
안서사진절도사 고선지
토번 연운보를 함락하고 개선한 고선지에게 현종은 그 해 12월 안서사진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안서절도사 휘하 군사는 2만4000명이나 되는데다가 742년부터는 군복으로 매년 62만 필단을 공급받은 그런 절도다.
안서도호 관할 영역은 동쪽으로 언기, 서쪽으로는 소륵(疏勒), 남쪽으로는 우전 등 사진을 관할하면서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토번, 천산산맥 북쪽의 돌궐(突厥)을 감독·감시할 책무가 있다. 고선지가 임명된 안서절도는 동서 교류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책무를 가진 직책이다.
고선지의 서역 경영
▲ 실크로드를 점령한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프레시안 |
고선지는 토번 연운보 함락과 소발률국 정벌 때처럼 서역을 평정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고선지는 서역 평정을 위해 휘하 군사만 의지하지 않았다. 한 예는 고선지는 우전국왕 위지승(尉遲勝)과 더불어 서역을 평정하였다.
<구당서>의 '위지승전'에 고선지의 서역 정벌 기사를 보면 "(비사부도독 위지승이 우전 국으로) 귀국해 안서절도사 고선지와 함께 살비(薩毗)의 파선(播仙)을 격파하였다." 이는 고선지와 우전국왕 겸 비사부도독 위지승이 함께 살비·파선을 평정한 기사다. 비사도독부는 본시 우전국이며, 정관(貞觀) 22년부터 당에 투항했다.
그 후 우전국이 안서 사진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고선지가 우전진수사로 임명받은 후 우전에서 토번 세력을 몰아냈던 그 지역이다. 우전은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 현재 화전(和田)부근이다.
748년 토화라(吐火羅, 소발률국 서쪽 지역) 엽호(葉護, 왕의 뜻) 실리망가라(失里忙伽羅)는 걸사(朅師)가 토번 재물을 받고 걸사 안에다 토번의 3000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어 걱정이 되어 고선지의 안서병마를 동원해 소발률국에 5월까지 도착을 청원한 헌표(獻表)를 올렸다.
<신당서>의 '토화라전' 내용을 보면 "토화라 부근 걸사가 토번을 끌어들여 토화라 공격을 도모하자, 이때 토화라 섭호 실리망가라가 안서절도사 고선지에게 토벌해 줄 것을 간청하자, 황제가 군대를 보내서 이를 격파했다." 걸사 영역은 오늘날 타지키스탄 남부과 아프가니스탄 서북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이때 고선지는 걸사를 격퇴했다. 고선지가 당 황제의 명령을 받고 파미르 고원의 토화라로 진군할 때 주변 지역도 평정했다. 소발률국 남쪽의 개실밀(箇失密)도 고선지가 제패했다. 당 고종 용삭(龍朔) 원년(661) 파사(波斯)도독부를 위시해 16개 서역부(西域府)와 72주(州)가 설치되었으나 그 나라 왕을 도독으로 임명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실효적 지배는 아니었다. 그러나 안서도호 고선지는 서역을 장악했다.
고선지의 석국(石國) 정벌
750년 고선지의 석국 정벌하게 된 까닭은 당에 대한 조공 태만이었다. 석국 왕이 당의 강거(康居)도독부로서 충실하지 않았다. 석국이 서방 신흥 세력 대식(大食)과 연합했기 때문이다.
안서절도사 고선지의 중요 책무가 서역 제국의 조공에 대한 감독이었다. 그해 12월 고선지는 당나라 군사를 몰고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대평원을 가로질러 타슈켄트로 달렸다. 이때 이슬람은 부하라를 중심으로 동방 진출을 꾀하였으나 고선지의 토번 연운보 함락으로 아랍의 동방 진출이 일시 좌절된 상태다.
고선지는 석국뿐 아니라 아홉 나라와 더불어 당을 배반한 돌기시(突騎施) 등을 격파한 이유는 당에 대해 조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에 대한 조공은 예물을 바치는 행사만 의미하지 않는다. 당에 대한 충성 서약이다.
고선지의 대식(大食) 정벌과 안녹산 반군 토벌
750년 고선지 장군이 걸사국 왕 발특몰(勃特沒)과 석국 왕을 사로잡아 개선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대식(大食)에 대한 고선지의 공격 가능성은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태평광기>에 "고선지가 대식(大食)을 정벌하여 가려륵(訶黎勒)을 얻었는데, (그 나뭇잎) 크기는 5∼6촌 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선지의 대식 공격을 뜻한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755년 안녹산이 반란하자, 하서절도 고선지를 부원수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반군을 격퇴하게 하였다. 고선지는 태원창(太原倉)이 반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군수 물자를 군사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불살랐다.
한편, 안녹산 반군을 감당할 수 없어 섬군(陝郡)에서 동관(潼關)으로 고선지는 퇴각했다. 그런데 고선지와 늘 함께 했던 환관 변령성(邊令誠)은 현종에게 군량 탈취, 동관으로 퇴각했다는 이유로 고선지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고선지의 최후
고선지가 다른 곳에서 도착하자, 변령성은 칼잡이 100명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지시하면서, "대부(大夫)에게도 역시 명이 있다"고 하자 고선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 들였다.
한편, 칼리프 알-만수르는 노예 출신 아부 무슬림을 궁전으로 불러들여 살해했다. 아브 무슬림은 죽기 전까지 안서도호 고선지와 대적한 아랍 총독이었다. 공교롭게 고선지가 모함으로 죽은 같은 해 아부 무슬림도 살해되었다. 고선지의 출세 과정과 이븐 무슬림의 모든 것이 너무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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