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6월 24일
1946년의 좌우 합작 움직임을 '좌우 합작 운동'이라 부르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나는 내키지 않아서 '좌우 합작 노력'이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은 것이기는 하지만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꿀 만큼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인 큰 움직임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동'이라 부를 만큼 큰 움직임은 되지 못했어도, 매우 의미가 큰 노력이었다. 한국민주당의 자금력과 공산당의 조직력, 극우파에게 장악된 경찰력 등 폭력적 요소들에 지배받고 있던 당시 조선 남반부의 상황에 돌파구를 마련할 희망이 이 노력에 있었다.
좌우 합작 노력이 현실의 돌파구가 될 희망은 논리적 타당성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군정의 권력이 합리적 방향으로 운용되어 이 노력을 뒷받침해줄 때 비로소 현실의 여러 폭력적 요소들을 극복할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미군정의 지원이라는 것이 좌우 합작 노력의 추동력이면서 또한 한계였다. 좌우 합작 노력은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에 입각한 것인데, 미군정은 조선인의 민족주의 가치관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었다. 미군정은 실제로 반공주의에 치우쳐 좌우 합작을 통한 민족주의 발현을 가로막고 있었다. 1946년 초여름 시점에서 종래보다 합리적인 노선을 필요로 해서 좌우 합작을 지원하게 되었지만, 전폭적인 지원도 항구적인 지원도 바랄 상대가 아니었다.
좌우 합작은 '민족 통일 노선'의 한 길이었다. 1946년 1~2월 민전과 민주의원의 양립을 둘러싸고 통일 노선을 모색하는 거의 모든 움직임이 봉쇄되었다. <신천지> 1-6호(1946년 7월)에 실린 오기영의 글 "모세의 율법"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살필 수 있다.
이리하여 좌는 모두 극렬분자가 되어버렸고 우는 모두 반동분자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아귀다툼에 싫증이 나서 이들의 머리가 냉정하여지고 반성하는 날이 있기를 기다리면서 하후하박(何厚何薄)의 불공평을 범하지 않으려고 조심하여 좌우를 물을 것 없이 쌍방이 하루바삐 아집에서 해탈하라고 충고하는 부류가 생겼는데 이들에게도 명예는 분배되었다. 가로되 기회주의자라고.
그러니 극렬분자와 반동분자와 기회주의자뿐인 조선은 어찌될 것이란 말인가. 우에 속한 아버지는 반동분자요, 좌에 속한 아들은 극렬분자인데 만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가만있으면 이건 기회주의자요, 부창부수로 각기 남편을 따라서 고부마저 진영을 달리하면 극열과 반동은 뚜렷할까 모르거니와 이것이 도시 이 집안의 흥조(興兆)냐 망조(亡兆)냐. (<진짜 무궁화>(오기영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펴냄), 162~163쪽)
지금도 진영 논리에 말려들지 않는 중도적 입장은 '기회주의' 비판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당시 좌우 합작에 나선 중도파 인사들에게 '기회주의자'라는 지적이 전혀 부당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각별히 경모하는 안재홍부터 그렇다. 1월 하순 이래 그는 통일 전선 노력을 포기하고 좌우 대립 격화 과정에 한 몫 했다. 이제 미군정이 밀어주는 상황에서 좌우 합작에 나서고 있으니 '기회주의자' 아니면 무엇인가.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기회주의'를 욕설처럼 쓰는 세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기회주의'가 마치 '도덕주의'의 반대말처럼 통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그 반대말을 짚으라면 '원리주의'일 것 같다. 기회주의자 중에도 도덕적인 기회주의자가 있고 부도덕한 기회주의자가 있을 것 같다. '기회주의'가 욕설처럼 쓰이는 것은 '원리주의'가 판치는 세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회주의자' 소리를 너무 많이 듣다가 무감각해져서 이런 생각도 하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좀 더 생각할 여지가 있는 문제 같다.
아무튼 이 '기회주의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좌우 합작 노력에 임하고 있었을까? 안재홍의 7월 17일 방송 연설 "좌우 합작의 정치적 의의"에서 중도 우파의 전형적 자세를 알아볼 수 있다.
좌우 합작이 어찌해서 필요하고 또 긴급한가. 그것은, 임시 정부를 빨리 만들어야 우리의 건국 사업이 비로소 궤도를 타고 나아가게 되는 까닭입니다. 고쳐 말하자면, 이렇게 긴급한 임시정부를 만드는 데는 좌우 합작에 말미암아 민족 총의를 한데 묶는 것이 선결요항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좌우 합작은 어찌해서 임시 정부 건설에 선결문제로 되는가. 이것은, 국제적으로 미소 양국이 현실적으로 중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 국내적으로도 민족대중의 총의를 골고루 표현시켜서 어느 한편 사람들의 독점적인 이익만을 주장케 하는 것이 아닌 만민공화(萬民共和)의 새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상적으로만 말한다면, 한편 사람들끼리만 만든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공평된 마음에서 균등 사회와 평권 국가를 만들지 못할 것도 아니나, 실제로는 역시 각 계층의 의사와 이익을 몸으로써 대표하는 모든 세력을 잘 합쳐놓아야만 아무 폐해가 없도록 될 것이고, 그것이 민주주의 원칙에도 걸맞는 일입니다.
(…) 이 모든 대사업을 하루바삐 성취시키겠다는 소원에서 좌우 합작을 하자는 것입니다. 올봄 2월까지 노력하여 오던 좌우 합작이 일단 절망으로 된 후 좌우 향방의 대립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서로 신뢰하는 생각도 많이 얇아진 것 같으나, 그는 대립 항쟁하는 때에 항용 있는 일입니다.
그는 어찌되었든, 좌익 방면의 지도자가 여러 해 동안 일본 제국주의와 반항 투쟁을 하여 왔고, 또 그 본의가 대중의 해방을 위한 열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면 이 즈음에 있어 우리는 다시 동지애로써 그들과 대할 것이고, 그들도 마땅히 허심탄회로써 건국 사업만을 위하여 좌우 합작이 꼭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좌익 방면에 이러한 민족의 장래를 참으로 근심하는 애국적인 인물이 적지 않은 것을 믿고 있습니다.
(…) 오늘날 만일 우리 조선에서 적정 타당한 합작으로 하루빨리 통일 정부를 만들어내지 아니하면 우리의 조국에는 다시 중대한 위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것은 한편에서 극좌로 편향하고 있는 동안, 한편에서는 애국 운동의 틈에 휩쓸려 극우편향으로 반동적인 세력을 암암리에 부식하여 멀지 않은 장래에 그야말로 내란적인 항쟁의 피를 흘리게 할 화근을 만들 근심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인 까닭입니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129~132쪽)
좌익에 대한 불신감을 애써 덮어놓고 원론적 차원에서의 신뢰감을 부각시킨 연설이었다. 좌익을 무조건 적대하는 극우파는 말할 것 없고, 당시 중도적 우익 인사들도 좌익에 대해 상당한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불신감을 불러일으킨 가장 뚜렷한 계기가 연초의 '찬탁' 주장이었다.
맹목적 반탁은 극우의 기준이었고 맹목적 찬탁은 극좌의 기준이었다. 우익 전체가 일시 맹목적 반탁에 휩쓸린 과오가 있었지만, 그것은 조작된 <동아일보> 기사 등 정보 문제에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미소공위의 제5호 공동 성명을 계기로 상당수 우익 인사들이 "탁치에는 반대하지만 3상 회의 결정은 존중한다"는 중도적 입장을 밝히고 나왔다.
공산당의 맹목적 찬탁에는 전술적 효과를 노린 고의성이 더 분명하다. 극우의 반탁에 극단적으로 대항함으로써 좌익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공산당은 이 전술을 통해 통일 전선의 길을 봉쇄하고 우익의 이승만-김구 영수체제에 반발하는 상당 범위의 중도파까지 끌어들임으로써 민전을 통한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적대적 공생관계'를 의도적으로 추구한 분명한 사례의 하나다.
좌우 합작에 대한 미군정의 의도는 중도 우파 중심의 통일 전선을 최대한 넓게 이룩하는 것이었다. 극우파를 지원해 왔더니 민의 수렴이 되지 않고 미군정 자체에도 도전할 위험이 보였다. 그래서 공산당을 배제하고 극우파를 억누르며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 사이의 합작을 추진하면 극우파는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가장 폭넓은 주민 지지를 받는 우익 성향 통일전선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이것은 주도적 역할을 제안 받은 중도 우파에게는 물론이고 공산당의 헤게모니 집착에 시달려 온 중도 좌파에게도 바람직한 기회였다. 극우파가 실제로 누구에게보다 우익에게 독(毒)이고 극좌파가 좌익에게 독이라는 사실을 중도파 인사들도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좌우 합작 대표자들의 자세에 대한 정용욱의 분석에 나는 공감한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미군정이 좌우 합작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유지한다면 아직 좌우 합작운동이 자리를 잡기 이전에 우익의 공격으로 좌우 합작이 위기에 처하는 것을 막는 데 미군정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미군정의 좌우 합작 운동 지원은 처음부터 입법 기구 설립이라는 뚜렷하고 구체적인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좌우 합작의 주된 당사자인 김규식과 여운형은 미국의 구상과는 다른 목표와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체로 남한의 좌우 합작에 이은 남북 합작으로 진정한 민족 통일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임시 정부 수립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무엇보다 좌우 합작을 통한 민족 통일에 그 초점이 있었다.
김규식은 좌우 합작 운동 개시 이전부터 통일 정부의 창출을 돕기 위해서는 제 정파를 대표하는 연락위원회 내지 협의위원회의 수립이 필요하고, 민주의원의 강화로는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운형 또한 이승만의 정읍 단정 발언 이후 단정 수립설이 우익을 중심으로 확산되자 미소공위 재개를 촉진하기 위해 민주의원, 민전에 관계없는 좌우의 통일 조직을 주장하고 나섰다. 양자는 모두 좌-우 양측의 대표 기관이 가진 제한성과 좌우 합작을 위한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역사비평사 펴냄), 148~149쪽)
이런 맥락 속에서 며칠 전(6월 20일) 일기에서 언급한 김규식의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기" 발언 의미도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승만이 김규식의 집까지 쫓아와서(좀체 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좌우 합작을 격려하는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 김규식은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떨어뜨린 후에는 짓밟을 것도 안다. (…) 내가 희생한 다음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한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힘을 가진 것은 이 박사 당신이요. 불리한 싸움이지만 대의를 받드는 싸움을 나는 피하지 않겠소. 그러나 조그만 허점을 보여도 당신에게 짓밟힐 것을 나는 각오하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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