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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같은 정치인, 김규식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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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같은 정치인, 김규식의 등장

[해방일기] 1946년 6월 20일

1946년 6월 20일

1946년의 좌우 합작 노력에서 중심이 된 인물이 좌익의 여운형과 우익의 김규식이었다.

여운형은 해방 당일 건준 깃발을 올릴 때부터 시종일관 좌우 합작을 제창해 온 인물이었다. 함께 건준을 시작했던 안재홍조차 1946년 1~2월의 대립 격화 분위기 속에서는 통일 전선을 접어놓았던 데 비해 여운형은 민전 공동의장을 맡으면서도 민전 내 합작파의 위치를 지켰다. 그가 좌우 합작의 좌익 대표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반면 우익 대표로 김규식이 나선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뜻밖의 상황이었다. 우익 진영은 이승만과 김구의 '영수' 체제가 굳어져 있어서 다른 인물에게 우익을 대표할 권위가 없었다. 안재홍, 원세훈 등 중도 성향 인물들은 권위에 있어서 두 영수와 비교가 안 되는 존재였다. 그런데 막상 김규식이 나서니 두 영수에 버금가는 제3의 지도자로서 존재감이 드러났다.

김규식(1981(?)~1950년)은 이승만과 김구보다 몇 살 연하로, 이승만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조선인이었다. 초년에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의지하며 자라났고, 사회 활동을 선교사 언더우드의 비서로 시작했다. 이승만보다 더 일찍부터 서양 문명에 노출되었고 더 깊이 체득했지만 이승만처럼 일방적으로 몰입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냉소적, 비판적인 그의 기질도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하지, 아놀드, 러치처럼 교양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이승만이 더 가까이 느껴졌고, 버치 같은 교양인에게는 김규식을 더 존중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독립운동 경력도 어떤 면에서 김구보다 더 풍부했다. 김구보다 먼저 동제사 등 중국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넓은 범위의 중국 혁명가들과 교분을 맺었으며, 1919년 파리 강화 회담과 1919~1920년 미국에서의 활동, 1921~1922년 소련 방문 등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임시정부의 근본적 혁파를 주장하는 '창조파'를 이끌면서 임정과 소원한 관계에 있다가 1935년 그를 중심으로 창당된 민족혁명당이 곡절 끝에 임정에 참여하면서 제1야당 대표 입장에서 부주석을 맡게 되었다.

해방 당시 임정에는 여당인 한독당과 제1야당인 민족혁명당 외에 여러 군소 정파가 있었는데, 한독당 외의 모든 정파를 묶어서 '비주류'로 볼 수 있다. 한독당이 우파이기 때문에 비주류를 좌파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정치 이념으로 봐서 확실한 좌파는 비주류 안에서도 비중이 작았다. 주류는 김구 중심의 '영수' 체제를 따르는 쪽, 비주류는 그 체제에 저항하는 쪽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1946년 1~2월 중 이승만-김구 중심의 '영수' 체제로 우익이 정비될 때 임정 비주류 대부분이 이와 결별, 민전으로 향한 것은 좌익을 찾아간 것보다 '영수' 체제를 피해 간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런데 이때 김규식은 이 움직임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주석으로 있던 민족혁명당을 탈퇴하기까지 했다.

조국의 완전 독립과 민족의 철저한 자유를 전취하기 위하여 40여 년 동안 해외에서 분투하여 왔고 또 앞으로도 오직 이것만을 위하여 국궁진췌할 비장한 결심을 가진 임시정부 부주석이며 조선민족혁명당 당수인 金奎植은 최근에 더욱 느낀 바 있어 18일에 단연 해당을 탈퇴하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본인은 한국이 완전 독립을 찾고 신국가를 건설하려는 이때에 더욱 우리의 요구하는 바 자주 독립적 과도 정권을 수립하려는 단계에 있어서는 개인이나 당파적 이해를 위하여 활동할 시기가 아님을 인정함으로 본인으로서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주석을 사면하는 동시 동당에서 탈퇴하는 것을 성명한다." (<조선일보> 1946년 2월 19일자)


<해방일기> 작업 시작 이래 상당량의 자료를 섭렵해 왔지만, 이 사람이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해하기에 가장 힘든 사람으로 김규식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여러 가지 선택에 관해서는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가 내 마음속에 남아 있고, 1946년 2월의 일도 그중 하나다. 이제 좌우 합작 노력에 그가 모습을 나타냈으니,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눈에 띄는 대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바란다.

김규식은 목소리를 죽이고 지냈다. 위의 성명이 그의 귀국 후 첫 개인 성명이었다. 한 달 후 이승만이 '광산 스캔들'로 물러난 후 민주의원 임시 의장을 맡으면서 언론에 모습을 자주 나타냈지만,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 했다. 그런 그가 좌우 합작의 우익 대표를 맡은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의외였기 때문에 그 장면을 극적으로 그린 회고담들이 전해진다.

1946년 2월 14일 민주의원 개원 때부터 김규식의 비서를 맡고 있던 송남헌은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좌우 합작에 나서기를 권하던 장면을 회고한다. 극우 노선을 달리던 이승만의 좌우 합작 반대가 김규식의 움직임을 가로막지 않았을까 하는 시각을 해소해 주는 회고다. 이승만의 강경한 권유를 김규식은 이렇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좌우 합작이 독립을 위한 단계라면 독립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겠다. 형님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을 안다. 또 떨어뜨린 후에는 짓밟을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독립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 내가 희생한 다음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한국 현대 정치사 1>(송남헌 지음, 성문각 펴냄), 296쪽. <항일 독립 투쟁과 좌우 합작>(강만길·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190쪽에서 재인용)

김규식의 측근으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일한 강원룡과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가 모두 비슷한 증언을 했다는 것을(<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403쪽) 보면 이 점에서 김규식과 이승만의 관계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이 일화가 당시 인구에 회자한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이승만이 이런 말을 했다는 송남헌의 회고도 전해진다.

"독립을 위해 미국 사람이 해보라는 것을 여하간 한 번 해봐야 안 된다는 것이 증명이 될 것 아니겠느냐?"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250쪽)

김규식은 1919년 8월에서 이듬해 10월까지 미국에서 활동할 때 이승만을 겪어볼 만큼 겪어봤을 것이다. 해방 후 서울에서 만난 이승만을 김규식은 "형님"이라고 불렀다. 좌우 합작에 나설 것을 이승만이 권할 때 김규식의 첫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형님은 대통령 못하면 못살 사람이고 나는 대통담배를 못 피우면 못살 사람이니 나를 대통이나 피우게 내버려 두시오." (강원룡의 회고,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249쪽에서 재인용)

이런 말이 김규식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겼기에 주변 사람들이 퍼뜨리고 세상 사람들이 입에 올렸을 것이다. 대통령 같은 건 대통령에 미친 너나 해라, 나는 대통이면 됐다. 냉소적인 태도지만 냉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뭐든 억지로 하려고 드는 세태가 그에게는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 세대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은 조선인이면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 노선을 극도로 싫어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듯하다.

커밍스가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87~188쪽에 언급한 재미있는 보고서 하나가 있다. 중경에 있다가 서울로 온 클래런스 윔스 주니어란 사람이 군정청에 제출한 보고서로, 임정의 정치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주 내용으로 한 것이다. 이 보고서 안에 "김구는 김규식을 미워하고, 두 사람 모두 이승만이라면 질색을 한다는 등" 임정 내의 파벌 관계 언급도 들어 있다고 한다.

윔스의 관찰을 뒷받침하는 다른 확실한 자료는 보지 못했지만, 외부인의 솔직한 지적으로 상당히 정확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김규식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아직 세밀한 파악은 못하고 있지만, 그 취향은 얼마간 이해가 될 듯하다. 그는 김구나 이승만 같은 행동가가 아니라 사물의 앞뒷면을 모두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승만과 김구가 현실의 힘에 대한 집착으로 한 우물을 파는 동안 그는 대통담배에나 집착하며 자기 자신에게까지 비판적 성찰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김규식을 전폭적으로 밀어서 좌우 합작에 나서게 한 버치 중위의 안목도 허술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운형도 좌우 합작에 대한 성의를 일관되게 보여 온 사람으로서 합작 노력의 중요한 한 축을 기대할 인물이었지만, 합작 노력이 온갖 견제를 뚫고 통상적 기대치를 넘는 성과를 거둘 가능성은 김규식처럼 초연한 인물의 참여에서 바라볼 수 있었을 것 같다.

이승만은 왜 김규식에게 합작 노력에 나설 것을 권했을까? 송남헌은 좌우 합작 사업을 위해 미군정에서 김규식에게 600만 원을 지급한 사실을 기록했는데,(<송남헌 회고록 : 김규식과 함께 한 길>(한울 펴냄), 75~76쪽) 이승만이 "삼청장으로 김규식을 방문해 50만 원쯤의 자금까지 내놓으며 좌우 합작에 나서 줄 것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249쪽) 김재명은 이런 해석을 소개한다.

위와 같은 대화가 있고 난 바로 보름쯤 뒤인 6월 3일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자"는 전라북도 정읍에서의 발언을 통해 공개적으로 단선-단정론을 주장했던 이가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런 만큼 이승만은 좌우 합작 운동을 통한 통일 정부의 구성 따위엔 아예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그가 김규식에게 합작 운동 참여를 종용한 데는 그 나름대로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는 게 김규식 측근들의 풀이다. 다시 말해 실패가 뻔히 내다보이는 좌우 합작 운동에 김규식을 몰아넣음으로써, 그의 정치적 경쟁자 하나를 매장시키려는 노회한 정치적 계산에 바탕한 것이라는 얘기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선인 펴냄), 325~326쪽)


이 해석에 나도 대체로 공감하지만, "실패가 뻔히 내다보이는"이란 대목은 의문이다. 좌우 합작 노력(나는 이것을 '운동'이라고 부르지는 못하겠다)의 성공에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작은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으며, 그 성공의 정도는 노력에 따라 결정될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합작 노력을 권하는 시늉을 한 것은 단순히 모든 일에 자기 영향력을 심어놓으려는 시도의 일환일 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버치가 앞장서고 하지가 밀어주는 좌우 합작 시도를 가로막을 길이 이승만에게는 없었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안면이 받히는 김규식에게 푼돈이라도 쥐어 주면서, 빈말로라도 권하는 척하면서, 김규식이 자기를 아주 무시하고 나가지 못하게 압력을 주는 것이 그에게 최선의 공작 아니었겠는가.

이승만의 속셈은 이제 내 눈에 환히 보인다. 김규식의 대꾸도 그 속셈을 곧장 찌르는 것이었다. 아직 김규식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런 대꾸를 통해 그의 성품을 조금씩 짐작할 수 있다. 김재명이 위 책에서 김규식 편에 붙인 제목 "한 온건 지식인의 실패한 이상주의"는 좀 아닌 것 같다. "이상주의"란 말도 좀 이상하거니와, 결코 "온건"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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